개봉 신작 비평: 2시간의 '말'로 짓밟은 영화적 감각
제78회 칸 영화제의 초청과 『스크린 데일리』의 높은 평점, 로튼토마토 97%라는 수치는 이 영화를 명작의 반열에 올렸다. 하지만 2026년 4월 1일 어제 개봉한 <두 검사>에서 목격한 것은 영화적 성취가 아닌, 권위가 주는 환상의 실체였다. 전형적인 연출과 거세된 서사, 늘어진 호흡, 설명의 반복이 전부였다. 미장센은 창의적이지 않았고, 몽타주는 비어있었다. 나는 '영화'가 아닌 '정치학 논문'을 보고 있었다. 정치 학술회가 되어버린 칸 영화제를 믿기엔 우리의 시간은 소중하다. 이 영화를 봐야 할 이유가 과연 존재하는지, 권위에 기대지 않고 냉정하게 파헤친다.
이 영화의 첫 40분은 주인공이 감옥의 인물과의 접견을 요청해서 실제 만남이 성사되기까지로 소요하고 있다. 관객은 어떠한 전제나 심상의 근거도 부여받지 못하고 이 긴 시간 동안 비어있는 공간을 그저 바라봐야 했다. 보통의 영화에서 이러한 절제된 몽타주는 사유의 확장과 심상의 탐닉을 할 수 있는 여유를 부여한다. 하지만 이 영화의 빈 공간을 지나는 동안 다음 내용을 조급하게 독촉해야 했다. 관객은 마음껏 색칠할 수 있도록 붓을 들고 극장에 앉았으나 영화는 그릴 시간은 주고 아무런 물감을 주지 않았다. 물감을 섞고 여러 부분에 색칠해 보던 관객의 경험은 이 영화의 공허한 연출에 의해 무언가라도 내놓으라고 요구해야 하는 빈곤한 체험으로 치환되었다.
그 사이를 비추는 감옥의 미장센은 도움이 되지 못했다. 녹색을 활용하긴 했지만 그것이 심상을 부여하기엔 빈약했고, 감옥 내부가 형성하는 미장센이 차가운 현실을 드러낸다는 건 너무나 교과서적이었다. 프롤로그 격인 영화의 첫 장면에서 공사 중인 건물을 평면적으로 비추는 앵글은 이후 이러한 앵글이 전혀 나오지 않는다는 점에서 그럴듯한 장면을 끼워 넣은 느낌을 받게 했다.
대화로 모든 걸 설명하는 영화에서 미장센을 기대한 것 자체가 오산이었다. 이 영화는 모든 내용을 대화로 설명하고, 그 설명마저 부족하거나 지루한 부분이 많다. 40분의 지루한 기다림 끝에 마주한 장면은 20분의 설교였다. 감옥에서의 대화장면은 끝을 알 수 없는 대사의 연속이었고, 관객의 정체성을 혼란스럽게 했다. 영화를 보러 온 것인지 역사서를 읽어주는 라디오를 들으러 온 것인지 알 수 없게 했다. 그나마 이 장면엔 내용이라도 있었다. 모스크바로 가는 기차 안에선 내용 없는 수식어만 나열되기도 했다. 주변인물들의 지루함을 드러냄으로써 메타적인 장치로 보이려 했으나, 미장센과 몽타주는 아무것도 전달하지 않았고 관객은 스크린 밖으로 도주하고 싶은 물리적 피로감을 느끼게 된다.
이 영화의 원작이 소설임을 감안했을 때, 이 장면이 소설에서는 유의미하게 작용했을 것이라는 추측을 할 수 있다. 소설은 독자가 스스로 속도를 조절하며 긴장감을 유지할 수 있다. 중요한 부분은 몰입하고 상대적으로 그렇지 않은 부분은 속독하며 체력을 낭비하지 않는다. 하지만 영화는 다르다. 이러한 호흡의 조절을 감독이 직접 수행해 주어야 한다. 감독은 '보여줘야'하기 때문이다. 그런 의미에서 영화는 '보여주는' 것에 실패했다.
관객이 억지로라도 능동적인 관람 의지를 발휘해 보아도, 영화의 불성실한 설계 앞에 무력해진다. 주인공이 여러 사건을 마주하기 전 어떤 사상을 가지고 있었는지 전혀 알 수 없다. 이는 이후 이어지는 사건들을 통해 주인공의 사상이 심화되는 건지, 전복이 되는 건지 알 수 없어 혼란스럽게 한다. 이러한 캐릭터 아크의 부족은 해당 캐릭터의 입체성 결여로 이어진다. 이렇게 평면적으로 그려진 캐릭터를 관객이 느끼고 받아들이기엔 지나치게 단순하다. 관객이 스스로 생각하고 그 안에서 심상을 확장하거나 향유할 수 없고 그저 감독이 원하는 유일한 통로로 떠밀려 들어가야 했다.
※ 이 이후의 내용은 영화 <두 검사>의 주요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관람 전의 독자분께서는 주의하시기 바랍니다.
결말부로 갈수록 주인공을 정의의 화신으로 고착시킨다. 주인공을 정의로운 캐릭터로 만들려는 시도 자체가 주인공을 정답으로 규정하고 받아들이길 강요하게 한다. 절대적인 선과 악으로 규정하는 이분법적 구도는 극 영화를 프로파간다로 격하시킨다. 이렇게 관객을 강요하는 식의 내용 설정은 관객이 직접 느낄 수 있는 감각을 마비시키고 가르침을 주입하려는 시도로 보인다. 객석을 나서는 관객은 '영화'를 봤다는 느낌보다 '정치적 선동'을 들은 불쾌함을 느낀다.
하지만 이러한 설득마저 효과적으로 작동하지 않는다. 주인공이 검찰총장을 설득하는 과정에서 한 개인이 받고 있는 불법적 피해가 사회 전체의 피해로 확장하는 논리에 개연성이 부족하다. 특정 개인이 피해를 받고 있어 수사해야 한다고 설득하다가 갑자기 비밀경찰 전체의 불법적인 행위로 규정한다. 이러한 논리적 비약은 극의 내부 논리를 붕괴시키며 관객의 이성적 동의를 원천 차단한다. 인물에 부여된 직위라는 설정 만으로는 이러한 논리적 간극을 상쇄하기엔 턱없이 부족하다. 그 당시 사회상이라는 배경지식이 필요한 대목이다. 서사의 필연성이 영화 외부의 역사적 맥락에 의존하는 것은 영화가 영화적으로 기능하지 못한다는 것을 증명한다. 2시간에 가까운 시간 동안 이어진 텍스트의 나열 속에서 정작 서사의 핵심 고리는 방치한 연출의 직무유기에 지나지 않는다.
결말부는 이러한 논리적 부실함의 극치를 보여준다. 영화 내내 소련 정부의 부패를 고발하던 서사는, 일말의 징검다리조차 생략한 채 법치주의에 관한 논쟁으로 마무리한다. 아무런 전제도 없이 비약적으로 전개해 버린 것이다. 이걸 '절제'로 보기엔 관객이 사유할 도구가 없다는 말을 다시 가져와야 한다. 영화의 논리적 부실함에 높은 평가를 준 평단은 이를 이해하지 못한 관객의 탓으로 돌린다. 돈과 시간을 쓰고 스크린을 찾은 관객에게 이러한 의무는 없다. 반대로 연출과 각본이 그들의 의무를 수행했는지를 엄중히 따져야 한다.
영화는 빛과 소리, 시간과 공간이라는 감각의 총체를 다루는 매체이다. 이러한 요소를 얼마나 적극적이고 창의적으로 활용했는지가 영화의 평가를 가른다. 이러한 요소를 활용하여 메시지를 전달했을 때 관객은 매체적 해방감을 느낀다. 말로 할 수 있는 것을 굳이 영화로 보아야 할 필요는 없다. 하지만 지금 영화의 권위자들은 텍스트로 번역 가능한 영화에 높은 가치를 부여한다. 이렇게 풀어낸 내용을 다시 권위의 상징으로 삼는다. 나는 영화가 끝나고 크레딧이 올라가는 동안 말로 형용할 수 없는 감각적 충격에 사로잡히길 바라고 있다. 적어도 <두 검사>는 언어로도 충분히 전달 가능한 메시지를 굳이 스크린에 옮겼다. 심지어 말로 할 수 있는 이야기를 영화에서 다시 말로 하고 있었다. 어제 개봉한 영화이자 높은 평가를 받는 영화를 봐야 할지 고민하는 관객분들께 '보지 않아도 된다'라고 단호히 이야기하고 싶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