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보헤미안 랩소디', 비평이 놓친 음악적 체험의 구조

신작 '마이클' 개봉 전, 음악적 전기 영화의 성취와 패러다임의 재정의

by 오르
※ 이 글은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의 주요 내용과 결말을 포함하고 있습니다.


영화 <마이클(Micheal)>이 개봉을 앞두고 있다. 시대의 상징이자 대중예술의 선구자로서 그의 일대기가 영화로 나오는 건 필연적 결과이다. 그의 파란만장한 인생은 극적인 서사를 기대하게 한다. 이렇게 한 음악가의 인생을 다룬 전기 영화가 속속 등장하고 있다. 음악이 영화의 필수요소임을 생각하면 주크박스 형태로 구성할 수 있다는 점에서 상당히 매력적인 소재이다. 이미 많은 사람들에게 감동을 준 음악에 서사를 더한다는 것은 또 다른 감동을 선사할 수 있는 수단이 된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주크박스 전기영화를 이야기하면 여전히 <보헤미안 랩소디(Bohemian Rhapsody)>가 떠오른다.

이 영화를 보고 나서 가장 처음 느낀 건 감각적 체험이었다. 실존했던 인물을 다루고 있지만, 영화를 보는 동안 그 인물이 실존인물임을 신경 쓰고 있지 않았다. 역사적 사실이라는 제약에서 벗어나, 서사가 주는 정서적 경험과 이를 강화하는 음악의 존재가 극 안으로 끌어들이고 있었다. 이 영화는 다큐멘터리가 아니다. 철학적 담론을 제시하는 영화도 아니다. 관객에게 무엇을 보여주고 어떻게 느끼게 할지를 고민한 결과물에 가깝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이 영화는 평론가들의 평가와 관람객들의 평가가 극명하게 갈리는 양상을 보여주고 있다. 영화는 관객의 관람을 위해 존재한다. 그 관람을 위해 무엇을 어떻게 활용하느냐의 차이가 있을 뿐이다. 이러한 기준을 중심으로 이 영화가 가진 표현방식과 그 독창성에 관해 기존의 비평과는 다른 시각으로 바라본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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직관적 서사를 통한 입체적 감정의 전달


영화는 매체의 특수성을 활용해 관객에게 각기 다른 관람 방식을 제공한다. 어떤 영화가 복잡하고 입체적인 서사를 통해 관객이 그 안에서 무언가를 느낄 수 있도록 했다면, 이 영화는 관객이 서사를 따라오는 동안 감각적인 요소를 활용한 연출로 그 체험을 극대화하고자 했다. 평론의 잣대는 서사의 복잡성이 아닌, 형식이 관객의 감상을 얼마나 효과적으로 유도했느냐에 맞춰져야 한다. 극 중 프레디 머큐리는 독특하고 강렬하게 묘사되는 인물이다. 그의 일생 또한 평범하지 않다. 그럼에도 관객이 그에게 몰입하고 공감할 수 있는 건, 서사를 받아들이기 쉽게 하여 보편성을 확보했기 때문이다. 또한 인물이 겪는 감정의 종류 또한 일반적이거나 평면적이지 않다. 그 감정의 백미는 메리 오스틴과의 관계이다. 그는 그녀를 사랑하지만, 그녀를 사랑할 수 없다. 이러한 감정을 말로 표현하는 것은 불가능하다. 인간적 관계, 우정, 그 어떤 표현으로도 이러한 감정을 표현하기엔 어렵다. 이를 가장 잘 보여주는 것이 창문 너머의 조명 장면이다. 관계가 절단되었다고 해서 감정적 유대까지 끊어지진 않는다. 프레디 머큐리에겐 특히 그랬다. 그가 조명을 켜면 창문 너머 자신의 방의 조명으로 호응해 주던 상황은, 뿌연 안갯속에서 얇게 비치는 빛과 같은 희망이었다. 그 빛을 잡을 수 없는 절망감은 상황을 도주하고자 하는 충동을 주었다. 그가 도망치기 위해 찾은 파티와 유흥으로 점철된 빛은 화려하지만 공허했다. 점점 그 화려한 빛으로 자신의 눈을 멀게 했고, 눈이 멀고 난 뒤엔 어둠만이 존재했다. 오스틴이 자신의 삶을 살기 위해 다른 사람을 만나게 된 이후엔 아무리 조명을 켜고 꺼도 창문 너머 실낱같던 빛마저 보이지 않았다. 그의 고뇌와 고민은 성 정체성 자체의 혼란이 아니라, 이를 수용하는 대가로 지불해야 했던 유일한 사랑과의 단절에서 기인한 것이었다. 그가 도망치고자 했던 건 성적 취향이 아닌, 사랑할 대상이 없어진 외로움이었다. 자신이 아는 유일한 사랑을 사랑하지 못하게 된다는 것이 얼마나 외로운 일이고, 그 누구도 원망하지 못하는 것은 얼마나 답답한 일인지 영화는 연출로 보여주었다. 메리 오스틴의 존재를 이성애적 안식처로 해석하는 건 연출이 쌓아놓은 감정의 실체를 외면한 결과다. 이는 유사한 설정을 하나의 잣대로 재단하려는 시도가 영화의 본질을 어떻게 오독하는지 보여주는 사례이다.


대비를 통한 갈등과 긴장의 고조


대립된 상황을 교차하는 연출은 이러한 감정을 더욱 극적으로 느끼게 한다. 메리 오스틴을 사랑하지만 사랑하지 못하는 상황임을 고백하는 장면에선, 그녀를 위한 노래인 <Love of My Life>를 관객이 함께 부르는 공연 영상이 대조를 이룬다. 수많은 관객의 호응과 고립의 시작을 교차시키고, 아름다운 노래와 그 수신자가 받을 수 없는 사랑을 대조하여 감정의 격차를 벌린다. 그렇게 그녀가 떠나간 자리에 자신을 이용하려는 폴 프렌터가 자리를 잡는다. 그는 빛이 사라진 자리에 자극적이고 공허한 쾌락의 도주로를 설계했다. 그 끝엔 프레디 머큐리를 더 깊은 고립으로 몰아넣는 나락이 있었다. 영화는 이러한 대비를 통해 갈등과 그로 인한 긴장감을 격화시킨다. 처음엔 작은 갈등과 즐거움으로 시작하여 영화적 성취가 커질수록 그 성취와 갈등은 더 큰 차이를 보인다. 이로 인해 프레디 머큐리의 캐릭터 아크는 갈 길을 잃고 관객은 불안과 긴장을 느끼게 된다. 서사를 통해 긴장감을 유발한다는 점에서 브라이언 싱어의 영화가 맞다는 느낌을 강하게 받는다. 인물의 불안을 동력 삼아 극 전체에 서스펜스를 구축하는 방식은 브라이언 싱어의 특징 중 하나이다. 이 영화의 서사 전체를 떠받치고 있는 관계의 단절, 고립, 그로 인한 갈등을 통해 관객은 긴장을 느끼고 그 긴장은 몰입을 유발한다. 편집감독을 포함한 대부분의 핵심 제작진이 마지막까지 유지된 탓인지, 결과적으로 감독의 교체에도 불구하고 브라이언 싱어의 색채가 강하게 느껴진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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이해보다 감각을 위한 연출


빠른 서사는 이해보다 감각을 선택하도록 돕는다. 이 영화는 음악을 체험해야 하고, 평범하지 않은 감정을 익숙한 듯 받아들여야 하고, 캐릭터 아크를 통해 긴장감을 유발해야 한다. 관객이 자신의 경험을 통해 사유하게 되면 영화가 가진 독특한 감정을 전달받는 과정에서 정서적 순도를 해치게 된다. 관객 개개인의 경험과 정서가 영화를 감상하는 일에 노이즈가 되는 것이다. 분석적 이해보다 선행하는 감각적 투사를 위해 영화는 빠른 전개를 선택했다. 개연성보다 감각적 장면을 전면에 내세우고, 정적인 연출보다 빠른 컷편집을 통해서 긴장감을 유발했다. 이러한 빠른 컷편집은 도도한 예술가가 자본과 만났을 때의 긴장감을 잘 보여주고 있다. 인물의 타이트 샷을 빠르게 교차하면서 대화 과정의 모든 인물이 각자 가지고 있는 감정과 이해관계를 동시에 느끼고 파악할 수 있게 한다. 그들의 표정과 자세를 관객의 망막에 직격 하여 그 잔상까지 연출에 활용했다. 이렇게 망막에 맺힌 인물들의 찰나적 감정들은 빠른 컷 사이를 메우며 관객의 무의식 속에 겹겹이 쌓인다. 롱테이크를 통해 이를 표현하고자 했다면 관객에게 관찰자적 시선을 부여하여, 극 안으로 들어와 체험하고 느끼게 하기 어려웠을 것이다. 편집과 연출이 관객의 관람을 돕는 측면으로 작용했다는 점에서, 감독 변경에 의한 불가피한 선택이라는 지적은 큰 의미를 찾기 어렵다. 빠른 컷편집이 컷 안에서 감정의 축적을 방해한다는 의견에도 동의하기 어렵다. 영화는 서사 전반에 거쳐 감정을 축적하고, 장면을 통해 이를 터뜨린다. 하나의 장면을 통해 모든 것을 느끼는 영화가 아닌, 영화 전체를 따라 관람하며 그 흐름을 느끼는 영화로 구성되어 있다. 음악적 측면에서도 빠른 서사는 유효했다. 느린 서사를 선택했다면 로큰롤의 음악적 생동감을 해치는 방향으로 기능했을 것이다. 감각적인 비트와 베이스 라인이 가지는 폭발력은 빠르고 직관적인 서사와 만나 시너지를 발휘했다.


인물이 아닌 음악의 전기 영화


이 영화가 체험하는 영화로 만들어진 이유는 확실하다. 퀸의 음악을 감각적으로 받아들이는 것에 영화의 목표를 뒀다. 그렇기에 실제 인물과 사건에 대한 강박적인 해부보다, 음악의 정서적 파동을 극대화할 수 있는 드라마적 재구성에 우선순위를 둔 것이다. 영화가 전달하는 감정의 끝엔 항상 퀸의 노래가 있었다. 영화가 진행되는 동안 모든 퀸의 노래들이 각각 관객의 감각을 자극하고 있다. 이러한 점에서 서사의 전개와 감정의 축적이 그들의 음악과 정교하게 맞물리도록 한 연출은, 영화가 추구하는 감각적 체험을 실체화하는 핵심적인 성취다. 영화 내내 축적되어 온 감정은 마지막 Live aid에서 폭발한다. 관객은 펜스를 흔들고 소리를 지르지 않아도 그들의 음악과 함께하며 압도적인 감각을 부여받는다. 이런 측면에서 주변인물들과 그의 질병을 소비적으로 활용했다는 비판에 의미를 찾기 어렵다. 이러한 장치들은 결말의 공연 장면에서 그들의 음악이 가진 생명력을 관객에게 전달하는 것으로 기능한다. 그들의 음악이 주었던 가슴속 울림을 영화를 통해 전달하기 위해 매체가 가진 장치를 이용한 것이다. 이 영화는 프레디 머큐리의 전기 영화가 아니다. 퀸의 노래에 대한 전기 영화이다. 이 영화가 끝나고 크레디트가 올라가는 동안 관객의 가슴에 남는 것은 프레디 머큐리의 비극적 인생이 아닌 퀸의 노래가 주는 무한한 울림이다.


프로테스터가 아닌, 퍼포머 프레디 머큐리


영화가 성적 취향을 부정적으로 연출한다는 비평도 보인다. 프레디 머큐리의 일탈 시점과 성적 취향을 자각하는 시점이 동일하다고 인식하는 것으로 보인다. 하지만 이 둘 사이는 시점 차이가 있다. 프레디 머큐리가 성적 취향을 자각하는 시점은 오스틴과의 관계가 최고점으로 도달하는 과정에 있었다. 취향의 자각과 인물의 표정 연기는 관계가 종료될 것을 암시하고 있었다. 사랑하는 사람을 사랑할 수 없는 깊은 층위의 감정이 이어지며, 이러한 설정의 역할을 분명히 한다. 그가 방황하는 건 그 뒤에 외부의 악용과 착취에 의해 시작된다. 이것은 인간으로서의 고통이지 성 정체성에 의한 방탕이 아니다. 그의 취향은 취향일 뿐 그것이 무언가를 상징하지 않는다. 그는 프로테스터가 아닌, 하나의 인간이자 퍼포머로서 존재한다. 모든 영화가 메타포를 포함하며, 그것이 정치적 혹은 사회적 메시지를 담고 있다는 생각은 지적 허영심을 충족하기 위해 작품의 순수한 정서를 소모하는 행위다. 그들은 영화가 쌓아 올린 감정의 실체보다 자신들이 투영한 이데올로기의 정답지를 확인하는 데 더 몰두하고 있다. 외부의 착취가 진행되기 시작하는 지점에서 짐 허튼의 등장은, 성적 취향이 일탈의 도구가 아닌 하나의 생활 방식임을 분명히 한다. 그가 육체적 관계가 아닌 정서적 교류를 중시한다는 지점에서 또 다른 자극이 아닌 일상의 방향성을 제시한다. 그는 프레디 머큐리가 최종적으로 도달해야 할 일상적인 생활의 표본이자, 그 길로 이끌어 줄 유일한 희망의 끈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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뮤지컬 영화도 많고, 전기 영화도 많다. 이 두 가지를 결합하려는 시도도 더러 있었다. 하지만 이 영화가 대중의 선택을 받은 이유는 음악을 보고 느낄 수 있었기 때문이다. 이 영화는 러닝타임에도 불구하고 6분짜리 음악을 듣는 듯한 인상을 준다. 밀도 높은 정서는 관객을 몰입하게 하고, 음악의 감각적 체험은 감동을 극대화했다. 그의 죽음은 그의 파멸을 의미하는 것이 아니라, 영원히 남은 그의 성취를 보여주는 것이었다. 그의 고난과 역경은 그를 영웅으로 만들기보다, 수많은 어려움 속에서 음악을 통해 치유를 받던 우리의 상황을 느끼게 했다. 우리가 일상에서 음악을 통해 느꼈던 수많은 감정들이 직관적인 서사 속에서 정서적 유대를 유발한다. 이 작품은 영화가 어떠한 성취를 보여줄 수 있을지 또 다른 방향성을 제시한 사례라고 생각한다. 이제 곧 개봉할 <마이클>이 어떠한 영화를 보여줄지 가늠이 되지 않는다. <보헤미안 랩소디> 이후 등장한 음악가의 전기 영화가 그다지 좋은 모습을 보여주지 못했기 때문이기도 하다. 이 영화가 보여준 것과 같은 깊은 층위의 정서를 확보했을지, 그리고 영화관을 단순한 관람의 장소가 아닌 음악적 체험의 공간으로 활용했을지 흥미롭게 지켜보고자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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