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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흐 함 Jan 29. 2024

관찰과 사랑의 공통점

<노상관찰학 입문> 서평

사회도 환경도 그리고 디자이너로서 지속가능한 경제 활동 방식을 고민하고 있습니다.

이 글은 <노상관찰학>의 서평단으로 선정되어 적게 되었습니다. 하지만, 선정되어 책을 받아서 읽으면서 너무 좋아서, 제가 책을 사서 좋아하는 사람들에게 선물하고 있습니다.
여기저기 추천하고 싶어서 가지고 다니다가 낡아버린 책


시작. 관찰의 어려움

관찰은 디자인의 시작이고 기본이다. 적어도 그래야 한다고 생각한다. 내가 생각하는 디자인이란, 현재 상황에서 좀 더 나아질 지점이라던가, 달라졌으면 하는 부분을 포착하고 차별적으로 접근하는 법을 제안하는 과정이다. 그렇기 때문에 현재 상황을 관찰하는 것은 시작이자 결과까지 영향을 지대하게 미친다. 이러한 관찰의 중요성을 인지하고 어릴 적의 유치원이라던가 초등학교에서 개미 혹은 식물 ‘관찰’ 경험을 불러일으키고자 한다. 어릴 때 해봤으니까  그 느낌 아니까 별거 아니라며 ‘관찰‘을 시도한다. 하지만 의외로 ‘관찰’이라는 것이 쉽지 않았다. 관찰을 통해서 차별할 수 있는 지점을 발견하기를 바라지만, 종종 누가 봐도 뻔한 것들만 보이고 혹은 관찰을 통한 발견은 너무 보잘것없게 느껴진다. 어떻게 하면 더 효과적으로 더’잘‘ 관찰해 볼 수 있을까 고민하던 와중에 이 책을 만나게 되었다.


나는 <노상관찰학입문>을 굉장히 실용적인 이유로 다가갔다. 언어화된 ‘관찰 행위’을 습득하여 관찰 과정과 그 이면의 철학을 타인에게도 공유할 수 있게 되어 도움받거나, 인정받고자 했다. 관찰을 잘하고자 하는 실용성에 기인한 나의 욕망은 노상 관찰 학의 무용을 설명하는 책의 앞부분부터 맥없이 풀어지고 만다. 노상 관찰 학의 중심에는 이것저것 재야 하는 실용성을 따지는 태도에서는 피어나기 어려운, 무용할 때만 생겨날 수 있는 순수한 호기심과 열정이 자리 잡고 있다. 어떤 대가도 바라지 않고 순수한 호기심으로 지나치던 것들에 “귀를 기울이는 다정함” 에는 ‘진심’이 한가득 있다. 본인의 감정이나 욕망을 뒤로하고 과학자의 마음으로 대상을 진심으로 바라볼 때만 보이는 것들인 것을 발견한다. 나는 이는 분명히 ‘사랑’이라는 생각이 들었다. 그리고 책에서 사랑하기 위한(관찰하기 위한) 다음 네 가지 태도를 발견하였다.


하나. 순수한 호기심을 낼 수 있는 용기

실용성에 기인한 욕망을 넘어서서 우스꽝스러워 보이더라도 진지한 태도로 무용한 것에 진심을 다하는 노상 관찰자들의 순수한 진심 앞에서는 저절로 숙연해진다. 이들의 진심을 읽고 나니, 내가 관찰을 왜 어려워했는지 짐작이 간다. 유치원, 혹은 초등학교 때 가졌던 무용할 수 있는 용기와 인내심은 어른이 된 나에게는 더 이상 남아있지 않았다. 나에게는 소위 ‘사악한 마음’ 즉슨, 어떤 것에 도움을 주려는 ’ 도움파‘ 혹은 인정받고자 하는 ‘인정파’와 같은 욕망이 순수한 호기심을 앞서버린다. 반면, 이러한 욕망은 노상 관찰자들은 가볍게 넘기고 관찰 자체에 몰두한다. 남들은 아무런 가치를 부여하지 않는 잊힌 사물에 진지하게 몰두하는 모습 앞에선 어떤 욕망을 품은 마음도 부끄러워진다. 개똥의 위치, 형상, 상태 등이라던가, 유럽 방귀 채집이라던가 맨홀, 토머슨, 건물 파편을 모으는 그들을 모습과 과정을 읽어보니, 내가 관찰을 어려워했던 이유는 순수한 호기심을 낼 용기의 결여일지도 모른다.

세상 사람들이 보기에는 가치가 없는 것에 자기가 직접 가치를 매기는 일은 정말 용기가 필요하더라고요. <고현학에서 시작하다> 아카세 와가 p116


둘. 있는 받아들이는 있는 자세

감정을 앞세우는 ‘감상’보다는 있는 그대로를 받아들이는 ‘관찰’을 하는 것 또한 노상 관찰자의 자세이다. 이러한 태도를 가진 눈으로는 절망적인 상황도 흥미로운 지점을 찾아볼 수 있는 초월적인 태도를 지니게 한다. 노상 관찰자가 간토대지진과 같은 자연재해를 대하는 방식은 불편함이라던가, 절망의 감정을 앞세워 오브제의 이전 상태를 그리워하고 돌려놓으려는 대신 무너진 질서 속에서 신선함을 발견하고 설렘을 느낀다. 이는 마치 어디서든 놀이거리를 찾아내고야 마는 아이 같다. 무용을 내세운 노상 관찰은 오히려 더 새로운 질서를 만드는 데에 유용한 것이 않을까 라는 생각이 들었다. 지나가버린 과거를 다시 세우려고 그리워하는 것보다는 상황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것이 오히려 도움이 되는 경우를 종종 보았기 때문이다.


재해가 일어나면서 도시는 전부 잿더미가 되어버렸죠. 인간은 아무것도 없는 상태에서 도시 생활을 시작해야 했습니다. 함석으로 지붕을 만들고 찌그러진 냄비 하나로 밥을 먹었어요. 어떻게 보면 서툴고 낯선 첫발이었죠. 모든 것이 신선했어요. <고현학에서 시작하다> 후지모리 p94


지금까지 인간 세상은 거의 질서를 쌓아오며 완성해 왔어요. 마치 5층 석탑처럼. 그것이 재해로 폭삭 무너져 완전히 산산조각이 나자 그때까지 질서 있게 쌓여 있던 물건들이 전부 땅바닥에 나동그라졌습니다. 그리고 제가 고물상을 보고 신선하다고 느낀 그 상황이 되었습니다. 지붕 기왓장 옆에 유모차가 있고 그 옆의 부품이 다 드러난 시계가 있는 모습이 펼쳐졌어요…(중략)… 어쨌든 망가진 것들은 정말 흥미로워요. 새로운 게 보여 두근거립니다. <고현학에서 시작하다> 아카세가와 p95


셋.  오래 사랑하기 위한 절도

관찰은 데이터를 모으는 과정이다. 디지털, 데이터가 흔하게 너무 당연해진 이 시대이지만, 생각보다 많은 데이터가 디지털 바깥에 존재한다. 그리고 디지털 바깥에 존재하는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여러 협력을 요구한다. 그것이 사소해 보이는 협력일지라도. 그러한 데이터를 수집하기 위해서는 면밀하게 그리고 타인의 입장과 나의 상황을 최대한 배려해서 절도 있게 접근해야 한다. <건물 파편을 줍다>에서 서술하는 이치키 쓰토무의 건물 파편 수집의 과정은 별거 아닐 수도 있지만, 내게는 많은 노하우와 능청, 그리고 절제가 필요한 꽤 고난도의 수집이라고 느껴졌다. 새로운 개념이라 설명이 많아지고, 현장 사람들이 귀찮아질 수도 있기 때문이다. 건물에 대한 존경을 표하면서 분명하게 본인이 원하는 건물 파편을 요구하는 진심 어린 편지라던가, 일꾼들의 점심시간 낮잠 시간 후에 찾아가는 치밀함, 그리고 주도 면밀하게 철거 과정을 주시하다가 파편을 줍기 적당한 때에 철거팀에 접선을 시도하는 민첩함, 그리고 유혹적인 파편이 있어도 약속을 지키는 절제는 ’ 원하는 것을 위해서는 이 정도는 해야 하는구나.’라며 그의 진지함은 나를 왠지 안심시켰다. 오히려 우스꽝스러울 수 있는 이 진심만이 이를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동시에 그의 생업의 경계를 넘지 않는다던가, 가격을 지불하지 않는다는 것과 같은 그만의 규칙은 그가 파편 수집을 가능한 한 오래오래 사랑하는 것이 가능하게 한다는 생각이 들었다.


넷. 섣불리 판단하지 않음

책의 앞부분에서는 노상 관찰 학의 무용함을 전면에 앞세웠지만, 책은 사실은 노상 관찰 학의 유용에 대해 나긋하게 중저음으로 조용히 외치고 있다는 생각이 들었다. ’ 역사‘의 기본을 관찰이라고 소개하는 것은 결국 관찰은 기본 중의 기본이라고 이라고 못 박아 놓는 것이 아닐까. 간편함, 효율성을 강조하며 빠른 변화를 피부로 느끼고 있는 시대다. 이러한 시대의 흐름과는 반할지도 모르지만 그렇기에 더욱더 섣불리 판단하지 않고, 있는 그대로 보아야만 자세히 보아야만 볼 수 있는 깊이는 더 특별하다. 도시 속의 구성원들의 모습도 건물의 형태도 도시와 관계하는 방식의 선택의 폭은 다양해지지만, 변화의 가속도가 붙어 어느 것 하나 마음 편히 음미할 수 없는 상태로 긴장감이 고조되는 이 시기에 다양함을 발견하는 것은 관찰의 특권이 된다.  


.. 이 히스토리라는 개념에 고현학적 의미를 더한 이가 박물학의 아버지 아리스토텔레스였다. 그는 유명한 <동물지>를 쓰기에 앞서 히스토리를 ‘체험과 관찰의 성과를 기술하는 것‘이라고 정의했다. <박물학은 노상관찰의 아버지> 아라마타 히로시 p377


시턴이 실천한 것은 박물학을 둘러싼 ‘근원적으로 즐기는 어떤 방법’의 기술이며 비법이다. 그것은 가령 컬렉션(수집)이라는 근원적 행위와 깊게 관련되어 있다. 좇는 것은 모으는 것이며 모으는 것은 다양성을 안다는 것과 같다. 즉 박물학이란 깊으면 깊을수록 깊이 파고들면 파고들수록 대상이 좁혀지는 것이 아니라 확산하고 증대한다. <박물학은 노상관찰의 아버지> 아라마타 히로시 p401


마무리. 조금은 서글픈

1980년대에 쓰인 <노상관찰학입문>은 2024년 현재에도 전혀 거리낌 없이 공감 간다. 그때에도 ’ 물건‘의’ 사건‘과’ 사물‘이 별개로 다뤄져 서글펐던 그 당시의 현실은 지금도 크게 변하지 않은 듯하다.

노상관찰자의 눈으로 보면 노상에 있는 모든 것은 ’ 사물‘이라는 한 마디로 집약할 수 있다. 그런데 노상의 세계는 사건과 물체라는 두 가지로 성립하다. 사물은 ’사’와 ’ 물‘로 나뉘며 구체적인 사물에 각각 ’ 건‘이라는 글자를 더해 ’ 사건‘과 ’ 물건‘이라는 이름이 주어진다. 그리고 이 각각을 전문적으로 다루는 사람이 있다. 사건은 도심 복합빌딩 2층에 사무소를 차려 탐정이 취급하고, 물건은 복합빌딩 1층에 사무실을 차리는 부동산에서 다룬다.” <노상관찰이라는 깃발 아래에서> P39

책이 쓰인 지 40여 년이 지난 현재에도 여전히 물건과 사건은 각각 별개로 다뤄지고, 물건 속의 쌓인 사건이 한순간에 사라지는 경우를 도시 속에서 종종 접한다. ‘사건을 좇는 탐정의 눈으로’ 물건‘ 속 사건의 존재를 기꺼이 찾으려던 1980년대의 노상 관찰’이 2024년에도 여전히 부족하기에 더 간절하다는 사실은 반갑기도 하고 아직도 서글프다는 사실에 씁쓸해지기도 한다.

붙잡고 싶은 부분이 너무 많았다.

거의 이 책에 러브 레터를 쓰듯이 서평을 적어내려 간듯하다. 책을 읽으면서 욕망보다는 이 책의 존재 자체의 찬양(?)하게 되었다. 있어 주셔서 감사합니다. 라고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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