와인, 왜 좋아해요?
마시면서 배워야 한다는 점이, 직접 부딪치며 배우기를 좋아하는 성향과 맞아서요.
꽃과 다양한 과일, 풀과 후추를 넘나드는 향을 느낄 수 있어서요.
가격대에 따라 맛이 전혀 다른 것이 신기해서요.
생명력을 가진 와인을 마시면 그에 어울리는 생명력 있는 음식을 먹게 되어서요.
탐험을 떠날 수 있는 넓은 맛의 세상이 있어서요.
"저도 와인 좋아해요"
라고 말하는 나의 속마음은 그러니까 이런 것이었다. '소주나 맥주보다는 그래도 와인이 낫지'하는. 두 번째인가 세 번째 만남 자리에서 와인 이야기를 꺼낸 그(지금의 남자친구)가 이렇게까지 와인을 좋아할 줄 알았으면... 알았어도 뭐 결과는 똑같았겠지만 조금 덜 억울했겠다.
문화탐방 프로그램으로 스페인에 한 달간 체류하고 돌아오는 길, 짐이 너무 무거워 남자친구가 부탁한 와인은 미처 사지 못했다. 양해를 구하고 다른 선물을 사긴 했지만 아무래도 신경이 쓰여 면세점에서 하프보틀 와인을 샀다. 레드와인 한 병, 화이트와인 한 병을 오직 직감과 내 미적 감각을 총동원해 와인병 라벨 디자인만 보고 골랐다.
한 달 후 오랜만에 만난 자리에서 반가운 상봉 후, 그토록 먹고 싶었던 부대찌개를 먹으며 와인병을 내밀었다. '짐이 무거운데도 내가 이렇게 신경 써서 와인을 사 왔어! 어때!' 하는 의기양양한 미소가 걸려있었을지도 모르겠다. 하지만 남자친구는 어떤 감동의 표현이나 감사인사도 없이 와인을 요리조리 돌려보더니 천인공노할 말을 뱉고야 말았다.
"그렇게 좋은 와인은 아닌 것 같아. 이런 거면 그냥 안 사 왔어도 됐는데..."
이럴 수가. 나는 네가 조개껍데기를 주워다 줘도, 진짜 별로인 옷을 커플티로 입자고 선물해 줘도 한 번 불평 없이 감사함을 표현했는데! 말로 다 할 수 없는 배신감과 속상함에 '어떻게 그런 말을 할 수 있냐'며 따지는 사이 부대찌개의 떡을 골라먹는 것도 잊지 않으며, 그날 저녁이 지나갔다.
선물을 사 준 사람의 성의를 봐서라도 면전에 대고 "이 선물이 별로다"라고 이야기하는 일은 없어야 하며, 그 말을 뱉는 순간 결투신청을 한 것이라고 봐도 무방한 것이 아닌가 생각하는 나로서는 투지로 피가 끓는 저녁이었다. 결투! 오직 전쟁!
시간이 지나 그의 소통방식을 알게 된 나는 그 말이 어떤 뜻이었는지 안다.
"나는 취향이 분명해서 내가 부탁한 그 와인이 아니면 딱히 좋아하는 게 아닐 확률이 높아. 사다준 건 고맙지만 혹시나 네가 필요이상의 소비를 한 건 아닐지 걱정이 되네. 사 오지 않았어도 괜찮았을 테지만, 사와 준 마음 잘 받을게!"
뭐 이런 말이 아니었을까. 그의 체면과 이미지를 위해 최대한 미화시키고 순화시켜보았다.
어쨌든, 지금은 머릿속에서 참을 인을 외며 그의 말을 애써 순화시키지 않아도 그 말에 상처받지 않을 자신이 있다. 지금의 나도 그와 같은 말을 할 것임을 알기 때문이다.
"이 와인은 굳이 안 사 와도 되는데"
이렇게 말하게 되기까지 내 기준 꽤나 많은 돈을 들인 값비싼 와인레슨을 받아야 했다.
일명 '마시면서 배우는' 레슨이라고.