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스페인 면세점 와인 선물사건' 이후 그는 같이 먹으려고 사 왔다며 매주 와인을 한 병씩 들고 왔다. 나중에 안 사실이지만, 이때 내가 와인에 대해 잘 모른다는 것을 알고 나중에 같이 즐기려면 천천히 와인에 맛을 들여야겠다 싶어서 '작업에 들어간 것'이었다.
와인을 어떤 화해와 화합의 증표쯤으로 생각한 나는 '와스라이팅'을 당하고 있는 줄도 모르고 사다 준 와인을 즐겁게 마셨다.
그가 주로 사온 와인은 '모스카토'였다. 모스카토는 영어로 하면 머스캣(Muscat)으로, 품종 자체의 당도가 높은 편이다. 우리가 흔히 아는 샤인머스켓도 이 머스켓을 개량해 만들었다. 모스카토는 발효과정에서 생기는 탄산을 그대로 담아 탄산이 있는 스파클링 와인이다.
그렇게 한 마디로 말하면, 이탈리아에서 건너온 달달한 스파클링 와인을 매주 마셨다. 주로 크래커에 크림치즈와 잼을 올려서, 혹은 과일과 치즈를 함께 얹어서 곁들여 먹었다. 하지만 우리는 같은 공간, 같은 술을 마시면서도 서로 다른 스탠스를 취했다. 나는 '음주가무'를 즐겼고 그는 '와인을 음미'했달까.
아무 생각 없이 '맛있다! 더 마시자!'라는 회로에 충실하며 때로 취기에 블루투스 마이크를 꺼내 들고 노래를 부르던 나의 옆에는 얄밉게도 멀쩡한 정신으로 와인을 홀짝거리며 핸드폰 화면에 무언가를 메모하는 그가 있었다. 누가 "같이 오셨어요?" 묻는다면, 그가 "아니요."라고 대답했을지도 모르겠다는 생각이 드는 지금이다(...).
뭘 그렇게 쓰나 살펴보니 '비비노(vivino)'라는 와인 평가 어플에 와인에 대한 테이스팅 노트를 적고 있었다. 그러고 보니 와인을 마시다 말고 흰 종이를 가져다 달라고 해 와인의 색을 확인하기도 하고, 와인의 향을 맡거나 맛을 보곤 핸드폰에 무언가를 적느라 와인을 따르면 처음 5~10분은 대화도 없이 핸드폰 화면만 내려다보곤 했다.
오기가 들어 나도 비비노 어플을 다운로드하고 로그인해 들어갔다. 사용법은 쉬웠다. 다만 쓸 말이 없었을 뿐.
'맛있었으니 일단 별점은 4.5점에서 5점. 그리고 음...'
다시 손이 마이크로 돌아가려는 찰나, 다른 사람들이 남긴 리뷰가 보였다.
"흰 꽃의 향, 사과 향, 복숭아의 향이 나고 맛은 역시 사과, 복숭아의 맛과 함께 패션후르츠 같은 트로피컬 한 맛도 나네요."
"처음에는 꽃 향과 함께 사과 맛이 가장 많이 나지만 입에 머금고 있으면 파인애플의 산미도 조금 느껴지고 끝에는 망고의 단맛이 길게 남네요."
이게 무슨 말인가. 와인은 포도로 만들었는데 포도 맛이 나지 망고며 사과며 꽃이 웬 말인가. '포도로 만든 음료에서 포도 맛이 나서 포도 맛이 났다고 말하면 안 되는 것인가. 왜 당당히 포도의 단 맛이라고 말하지 못하는가. 머릿속으로 떠들며 다시 한번 와인을 들이켰다.
그런데 와인을 머금은 내 머릿속에 방금 본 그 단어들(사과, 복숭아, 망고, 파인애플...)이 자신을 찾아보라는 듯 둥둥 떠다녔다. 그러고 보니 사과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파인애플의 상큼한 맛이 나는 것 같기도 했다.
머금었던 와인을 꿀떡 삼키고 입맛을 다셨다. 입 안에 머금었을 때와 삼키고 난 후 남아있는 잔당감이 묘하게 달라지는 것을 느끼면서, 이번에는 바로 와인잔을 기울이는 대신 코를 갖다 대 향기를 맡았다.
코 끝으로 맡아지는 단 향이 마치 꿀 향 같기도 했는데, 자연스럽게 꿀이 맺히는 꽃이 떠올랐다.
"동구밭 과수원길 아카시아 꽃이 활짝 폈네~"
과수원길가에 만발한 아카시아 꽃 향을 맡아본 적은 없지만, 이 노래 가사에 걸맞은 향이 깔려야 한다면 지금 맡고 있는 이 와인의 향이 되어도 이상하지 않겠다는 생각이 들었다.
와인에서 피어나는 한 송이 꽃을 오감으로 느낀 후에는 와인을 마시며 음주가무를 하는 일이 줄었다. 대신 나도 핸드폰을 붙들고 한때 포도였던 것이 만들어내는 포도가 아닌 것들의 맛과 향을 음미해 보는 일이 늘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