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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Hoho Apr 05. 2022

너의 인생은 틀렸다?

‘구식 생각’은 분명히 존재한다.

사회는 변화하고, 낡은 생각은 과감히 버려야 한다.

어른들이 말하면 무조건 따라야 하고, 어른들이 하는 충고를 듣는 것은 아랫사람의 도리인가? 아랫사람은 어른들한테 충고할 수 없고, 무조건 수긍해야 하는 것이 과연 맞는 것인가? 내가 살던 인생과 ‘다른’ 방식의 삶에 대해서 인정하지 않는 사람들의 편협함에 몸서리가 쳐진다. 자식은 부모가 낳았기 때문에 시키는 대로 따라야 하는 노예가 아니라, 그저 이 짧은 삶에서 우연히 만난 다른 객체임을 인정한다면, 그들의 독립된 자아를 진심으로 인정한다면 억압하는 말을 함부로 하지 못할 것이다. 이것은 비단 부모 자식 간의 문제는 아니다. 같은 세대를 살았던 사람일지라도 그런 자기중심적인 사고에서 벗어나지 못하는 사람들이 있다.


우리나라의 가부장적 문화에서는 분명 억압하는 존재와 희생하는 존재가 있다. 구식 사고방식이라고 해도 억압하는 존재가 이야기하면 그것을 받아들여야 하고 급진적인 사고를 하는 희생하는 존재는 차별받고 억압당한다. 너의 인생이 틀렸다고 말한다.

과연 틀린 인생이 무엇이고 정답인 인생은 무엇인가


틀린 인생이 있다면 내가 봤을 때는 자신의 인생의 의미와 가치를 발견하는 데에는 소홀한 채 많은 돈을 벌기 위해 온 인생을 허비하며 그 돈으로 집을 사서 별 볼 일 없는 회사를 그만두지도 못하고 일확천금을 노리며 쳇바퀴 같은 삶을 산다던가, 그런 의미 없는 삶으로 인해 노후에 얻은 병환을 치료하는 데에 모두 써버리는 인생이 틀린 인생이다. 하지만 그런 인생이 행복하다고 말한다면 안타깝지만 말릴 생각이 없다.


가부장적 문화에서는 이해시키는 것이 아니라 이해하기를 강요한다. 군대 문화이다. 이는 반발심만 불러일으킨다. 무식한 방법이다. 군대를 다녀온 사람들은 억압당하는 것이 익숙해서 다른 사람들을 억압한다. 나도 모르게 내면에 파시스트를 키우게 된다. 전쟁과 폭력이 정당화될 수 없듯, 모든 형태의 억압은 정당화될 수 없다.


가부장적 문화에서는 배려라는 단어로 희생을 포장한다. 우리나라는 다수를 위해 소수가 포기해야 하는 것들이 어마어마하게 많다. 하지만 그 소수의 입장에서 본다면 내가 자유롭게 설 땅이 없다는 사실에 인생이 얼마나 외로울까. 차라리 공동체에서 벗어나 시골에 가서 혼자만의 삶을 꾸리고 사는 편이 나을 것이다.


억압받는 소수의 시선에서 세상을 보자. 내 자식이 장애인이라면, 내 자식이 성 소수자라면, 우리 가족이 동남아에서 온 외국인 노동자라면, 여자라면, 비건이라면. 무심결에 사람들이 내뱉는 한마디 한마디가 상처로 다가올 것이다. 우리는 은근히 소수 집단을 평가하고 틀렸다고 말한다. 그들을 보며 다수로써의 우월감을 느낀다. 그 상처들이 쌓여 사회에 담을 쌓게 될 것이다. 다수의 의견이 받아들여지는 것은 그들의 의견이 옳고 정당해서가 아니라 다수가 가진 물리적인 힘 때문이다.


눈치를 보지 않고 사는 사람들이 미친 사람이 되는 한국 사회는 서로 다른 다양한 사람들을 포용할 능력이 없다. (여기서 눈치 보지 않는 사람에는 남에게 피해 주는 사람은 제외한다.) 비단 소수자만이 다른 사람이 아니다. 약간 산만한 사람, 유독 말수가 적은 사람, 매일 똑같은 옷을 입는 사람, 문신이 많은 사람, 알바만 하며 사는 사람, 노출이 많은 옷을 좋아하는 사람, 흰색 옷만 좋아하는 사람 등등 5천만 명의 인구가 있다면 5천만 명의 ‘다른’ 사람이 있다. 대한민국은 5천만 명의 ‘다른’ 자아를 포용할 능력이 없다. 5천만 명의 성실한 노동자만을 환영한다.

자기의 생각이 구식이라는 것을 인정할 사람은 없다. 하지만 아직도 한국 사화에는 구식 생각이 만연하다.


다음은 내가 인생의 교과서로 여기는 헨리 데이비드 소로의 ‘월든’에 나오는 구절들이다. (‘월든’은 미국의 청소년들에게 필독도서이다.)


“옛사람들은 옛날 방식을 따랐고, 새 시대의 사람들은 새로운 방식을 찾아야 한다. 옛사람들은 불을 지피기 위해 땔감을 구하는 법도 모르던 때가 있었다. (…) 따라서 단지 연륜이 있다고 해서 반드시 젊은이들에게 좋은 스승이 되는 것은 아니다. 현명한 사람은 삶을 통해 어떤 절대적 가치를 배우지 않았겠느냐 혹자는 생각할지도 모른다. 그러나 실제로 노인들이 젊은이들에게 줄 수 있는 아주 중요한 충고는 없다. 노인의 경험 역시 아주 부분적인 것에 불과하고, 그들의 삶도 개인적인 이유로 비참하게 실패했기 때문이다. 예전보다 나이가 들고 실패를 겪었어도 그들에게 일말의 신념은 남아 있을지 모른다. 그러나 나는 이 세상에서 30년 남짓 살아왔지만 연장자들에게 가치 있거나 진정한 충고를 아직 한마디도 들어본 적이 없다. 그들이 내게 해 준 충고는 아무것도 없다. 아니, 충고를 할 수 없다는 표현이 더 정확할 것이다. 나의 여생은 지금까지 내가 시도해 본 적 없는 실험이다. 그들이 그들의 삶을 살아보았다는 사실은 내게 아무런 도움이 되지 않는다. “


“나는 우리가 지금보다 훨씬 더 믿음을 가져도 좋다고 생각한다. 우리는 스스로를 제외한 다른 것들에는 너무나도 지대한 관심을 쏟으면서 정작 자신을 돌보는 데는 소홀하다. (…) 일부 사람들이 느끼는 끝없는 불안과 긴장은 거의 치유가 불가능한 병이다. 우리는 일의 중요성을 과대평가하는 경향이 있다. 그러나 우리의 손길을 거치지 않고 이루어지는 일들이 얼마나 많은가! 우리가 병들어 일손을 멈춘다고 세상이 멈추는가? 우리는 잠시도 경계를 늦추지 않으며, 될 수 있으면 신념을 품고 사는 것을 회피하고 있다. (…) 또한 너무나도 철저하고 진실하게 현재의 삶을 숭상하도록 강요받으며, 변화의 가능성은 철저히 배제한다. 그러면서 이렇게 사는 방법밖에 도리가 없다고 말한다. 그러나 원의 중심에서 그릴 수 있는 반경의 수만큼이나 살아가는 방법은 무한하다. “


다양한 삶의 방식이 인정받아야 한다.

나의 인생도 정답이고, 너의 인생도 정답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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