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나예글빛 Apr 19. 2022

일곱번째.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기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방법 배우기

공즉시색 색즉시공(空卽是色 色卽是空)


'반야심경'에 나오는 말입니다. 만물의 본질이 곧 공(空), 비어있음을 뜻하는 말입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간다 함은 무엇을 의미할까요? 우리가 살고 있는 이 세상이 보이는 세상이라고 한다면, 보이지 않는 세상 역시 '비어있음'의 그 무엇일까요.


지금 이 순간을 사는 방법을 배우는데,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야 하는 이유는 무엇일지 궁금해집니다. 감각에 의존하여 살아가는 삶에서 보이지도 않고 만져지지도 않는 그 세계를 과연 어떻게 하면 들어갈 수 있을지, 그리고 그 세계 속에서 사는 삶은 보이는 세계 속에서 사는 삶과 무엇이 다를지 함께 살펴보겠습니다.


에크하르트 톨레의 '지금 이 순간을 살아라'의 일곱 번째 이야기입니다.




일곱번째장.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기



"진정한 자유로움이란 그러한 형체 없는 영역에 접근하는 것입니다. 그럼으로써 눈에 보이는 모습을 당신 자신과 동일시하는 것에서 벗어나게 되고, 더 이상 모습에 얽매이지 않게 됩니다. 우리는 그것을 '현시되지 않은' 세계, 만물의 보이지 않는 근원, 만물의 내면에 있는 존재 자체라고 부를 수 있습니다. 그것은 깊은 고요와 평화의 영역이면서도 기쁨과 생동감으로 충만한 공간입니다."



내가 '아는'것들에 대한 생각을 해봅니다. 눈으로 직접 보았거나 경험해보았으며 어떤 현상에 대한 하나의 해석을 옳은 것이라 외웠던 것들이 소위 제가 가진 '지식'이었습니다. 그리고 그 지식은 제가 삶을 살아가는데 필요한 판단의 기준을 제공해주었지요.


그러한 판단들이 이어진 선택들은 '나'라는 사람이 어떤 사람인가에 대한 기준이 되어주었고 시간이 지날수록 '나'를 규정하는 판단들이 늘어갔습니다. 그리고 저는 제 자신을 그런 판단들 속에 세워두느라 나 자신에 대한 본질이 무엇인가를 묻지 못했습니다.


내면은 항상 끊이지 않는 생각과 판단으로 소란스러웠고 자연히 불안과 초조함이 늘 따라다녔습니다. 눈에 보이고 손에 쥐어질 수 있는 영역에서 '나'라는 사람을 세워보려 했습니다. 시간이 지날수록 자유로움 대신 스스로 부여한 압박은 점점 더 무거워지는 삶을 지속하게 할 뿐이었습니다.



눈에 보이는 영역을 벗어나 눈에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간다함이 무엇일까 책을 읽으며 생각에 잠겼습니다. 보이지 않은 세계에 들어간다면 과연 내가 그 고요한 세계로 들어간 것인지 어찌 알 것이며, 그 세계 속에서 나는 무엇을 위해 존재하게 되는 것인지도 생각하게 되었습니다. 그리고 어찌하여 보이지 않는 세계에 머무는 것이 기쁨과 평화를 가져다줄 수 있는 것인지 몹시도 궁금했습니다.






책의 저자는 현시되지 않은 세계를 '깊은 고요와 평화의 영역이면서 기쁨과 생동감으로 충만한 공간'이라 말합니다.


"다음과 같은 영적인 수행을 해보세요. 부지런히 삶을 영위해 나아가되, 주의력을 완전히 외부 세상과 마음에 빼앗기지는 마십시오. 일부는 내면에 남겨두십시오. 외부 세상에서 무슨 일이 일어나든 당신의 뒤쪽 어딘가에서 깊은 평화의 느낌으로, 당신을 결코 떠나지 않는 고요함을 당신은 느낄 수 있습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눈에 보이는 모든 형상 안에 있는 생명이요, 존재하는 모든 것의 내적인 본질입니다."



여섯번째장에서 저자는 '몸 안에 뿌리내리기'의 방법으로 의식의 일부를 몸안에 남겨두라 하였습니다. 몸 안에 의식의 뿌리를 내리고 그 뿌리를 지지하고 딛게 하는 영역이 바로 현시되지 않은 세계인 것일까 생각해봅니다. 우리의 의식이 내면에 자리 잡게 되면 배경처럼 머물러 있던 고요함이 그 실체를 '의식의 공간'이라는 영역으로 드러냅니다.


어떠한 소리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고요함이라는 것도 존재할 수 없고, 어떠한 물체도 존재하지 않는다면 공간 자체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를 좀 더 자세히 알아보기 위해 침묵과 공간에 대해서 살펴보도록 하겠습니다.



◈ 침묵


"모든 소리는 침묵에서 태어나서 침묵으로 돌아가서 소멸하며, 살아 있는 동안에도 침묵에 둘러싸여 있습니다. 침묵은 소리를 존재하게 합니다. 그것은 모든 소리, 모든 곡조, 모든 노래, 모든 말이 지닌 특성이며 동시에 현시되지 않은 세계의 일부입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이 세상에서 침묵으로 존재합니다. 당신은 침묵에 주의를 기울이기만 하면 됩니다. 대화를 하면서도 단어 사이의 공백, 문장 사이의 무언의 틈새를 의식하십시오. 그러는 동안 당신의 내면은 점차 고요해질 것입니다."



절대적인 '소리 없음'과는 다른 의미로 여기서 말하는 침묵은 의도적으로 인식하려 노력해야 알아차릴 수 있는 침묵이라고 생각합니다. 왜 침묵에 주의를 기울이면 내면이 고요해지는 것일까요. 그것은 바로 자기 자신을 '관찰자 의식'으로 두고 자신의 생각을 바라볼 수 있기 때문이 아닐까 싶습니다.


소리가 주인공인 듯하고 침묵이 소리를 뒷받침하는 배경인 듯 보이지만, 소리의 틈새를 인식하게 되면 침묵은 배경을 넘어서 의식 전체를 관장하는 일종의 '의식의 감독관'이 됩니다. 의식의 일부일지라도 자신의 의식을 인식하게 되면 외부의 소란함에 자신을 몽땅 내어주는 불상사는 일어나지 않을 것입니다.


즉, 자신의 중심을 잃고 외부의 사건과 타인의 말에 휘둘리는 일의 빈도는 현격히 줄어들 것입니다.



◈ 공간


"소리가 침묵 없이 존재할 수 없듯, 빈 공간이 없다면 아무것도 존재할 수 없습니다. 물체든 몸이든 모두 무(無)에서 나와서 무에 둘러싸여 있으며 결국 무로 돌아갈 것입니다. 현시되지 않은 세계는 이 세상에 침묵으로 현존할 뿐 아니라 우주 전체에 펼쳐져 있습니다. 이것은 침묵과 마찬가지로 눈에 잘 띄지 않습니다. 모두가 공간 속의 물체에 주의를 기울일 뿐, 공간 자체에 주목하는 사람은 없지 않습니까."



우리의 인식의 초점은 언제나 '사물'을 향합니다. 그렇기에 우리가 살아가는 세상에서는 수많은 물체와 의도가 반영된 대상이 우리의 인식을 쉽게 낚아챕니다. 그러나 저자가 말하고자 하는 바는 어떠한 대상이든 그 대상이 자리한 '공간'이 없다면 대상 또한 존재할 수 없다는 것입니다. 공간의 본질은 '비어있음'이라 말합니다.


공간을 우리의 '의식'에 대입하여 본다면, 생각과 감정, 감각의 대상 즉 마음의 부산물이 존재하기 위해서는 이를 인식할 수 있는 '의식'이 필요합니다. 의식을 바탕으로 드러난 생각, 감정, 감각이 곧 자기 자신이라 생각하지 않을 수 있게 되면 삶에서 벌어지는 다양한 삶의 상황에 대한 대처방법이 달라지게 될 것입니다.






"공간과 시간이 내면에서 무심과 현존이라는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인식될 때, 외부적인 공간과 시간은 여전히 당신에게 존재하긴 하지만, 훨씬 덜 중요해집니다. 세상은 계속해서 존재하지만, 당신을 더 이상 속박하지 않을 것입니다.


공간 속에 물체가 없으면 공간을 의식하지 못하는 것처럼, 나타나지 않은 세계를 깨닫기 위해서는 나타난 세상이 필요합니다. 나타나지 않은 세계는 이 세상을 통해, 궁극적으로는 당신을 통해 그 자신을 실현하는 것입니다. 당신은 우주가 그 신성한 목적을 펼칠 수 있도록 하기 위해 여기에 있습니다. 그러나 당신이 얼마나 중요합니까!"


 

보이지 않는 세계로 들어가는 것은 참으로 쉽지 않은 일처럼 느껴집니다. 다만 어렴풋이 대상에만 초점을 맞췄던 시선을 배경으로 돌려보고, 소리 뒤에 존재하는 고요함을 인식함으로써 '보임 뒤의 보임'을 보는 것이 현시되지 않은 세계로 들어가는 방법인 것인가 생각합니다.


'나타나지 않은 세계를 깨닫기 위해서는 나타난 세상'이 필요하다고 말한 것처럼, '나타남'이라는 존재로서 삶을 구성하고 있는 요소들을 둘러보아야겠습니다. 나를 드러내고자 하는 끊임없는 욕구는 결국 세상에 나를 통해 무엇을 드러내고자 함 인지도 생각해 보아야겠습니다.



매화나무를 보았습니다.

처음에는 가지에 매달린 뽀얀 꽃송이들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그리고 한참 꽃구경을 하고 나서야 꽃 위로 보이는 파란 하늘이 눈에 들어왔습니다.

파란 하늘에서 내려다보는 매화나무 한그루가 보였고 그 옆에 서 있는 저를 의식하게 됩니다. 의식의 시선이 더 높이 높이 올라가자 매화나무와 그 옆에 서 있는 제가 더 이상 보이지 않았습니다.

가본 적 없는 우주에서 제가 서있는 곳을 바라보는 상상을 해봅니다. 더 높이, 더 멀리 나아가 보아도 끝이 나지 않는 광활한 무한의 공간에서 저를 바라보는 제가 있었습니다.


저는 보이지 않는 세계 속에 다녀온 것이었을까요.






'나는 무엇을 드러내고자 하는가'


언젠가부터는 제 스스로에게 '왜'라는 질문을 수도 없이 하게 되었습니다. 마치 '납득이'가 된 것처럼 스스로 납득되지 않으면 쉽게 움직여지지 않았습니다. 누군가에게는 고집스럽게 보이기도 했겠지만, 맹숭맹숭하게 사는 것보다는 삶의 만족도는 높은 것 같습니다 ^^


'나타나지 않은 세계는 궁극적으로 당신을 통해 그 자신을 실현한다'라는 말에 꽤나 설렙니다. 제가 무엇을 하고자 할 때, 나의 뿌리는 나의 어느 곳을 향해 뻗어가고 있으며 그 뿌리는 나의 어떤 '의식의 대지'위에 자리 잡을 것인지 사뭇 궁금한 기대감이 올라옵니다.


보이지 않는 세계로의 입문, 그 발을 뗀 것인지 확실히는 모르겠으나 한 가지는 배운 것 같습니다. 대상 에 존재하는 공간과, 소리 너머에 자리 잡은 고요함이 무엇을 뜻하는지요 ^^


읽어주시어 감사합니다. 수고 많으셨습니다 :)

매거진의 이전글 여섯번째. 몸 안에 뿌리내리기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