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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hyeon Sep 21. 2019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 없는 것들

넷플릭스 드라마 「믿을 수 없는 이야기」를 보고


숱한 영상에서 사람들이, 특히 여성들이 성폭행을 당하고 죽었어도 아직 하지 않은 말들이 있다. 넷플릭스 「믿을 수 없는 이야기」가 그 말을 한다. 익숙한 장르임에도 쾌락을 쫓던 기존과 다르며, 선한 영향력을 가지고 있다. 앞선 사람들의 스포일러 없는 후기만 봐도 가슴 벅차게 좋은 점들이 많다. 여기서는 좀 다르게 이 드라마가 갖고 있지 않아서 좋았던 것들을 말해 보려 한다.


◆ 퇴근 후 가사노동에 시달리는 여성이 없다.

드라마는 두 플롯을 병행한다. 한 줄기는 피해 여성 마리이고, 다른 한 줄기는 사건을 파헤치는 여성 형사 캐런과 그레이스다. 캐런과 그레이스는 경력이 많으며, 팀장을 맡을 만큼 유능하다. 두 형사는 각자 가정이 있어 퇴근 후 집에서의 모습이 종종 등장한다. 그 모습은 직업이 변호사여도 아침에 남편 밥 차리고 나가야 하는 K-무비 같지 않다. 집안일을 하더라도 여남이 동일하게 하며(남편이 더 많이 하는 듯도 보인다.), 그 장면은 주로 동반자와 업무 이야기를 자연스럽게 나누기 위한 장치에 불과하다. 그보다는 집에서도 밤늦게까지 사건 해결에 매달리는 장면이 더 잦고, 집안 구성원들은 그들의 직업과 태도를 무척 존중한다. 그레이스의 남편은 그의 사건 해결을 위해 자신의 커리어 희생까지 감안하기도 한다. K-무비에서 커리어 포기는 늘 아내가 하던데.


◆ 전형적인 캐릭터가 없다.

세상엔 참 다양한 특성과 사람들이 있다. 그런데 미디어에는 그 다양성이 없다. 쓰던 사람 계속 쓰려는 편의인지, 창의력 있는 시나리오를 쓰기 귀찮아서인지 모르겠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는 그런 틀에 박힌 캐릭터가 없다. 몇 캐릭터를 예로 들고 싶다. 사건의 실마리가 좀처럼 드러나지 않자 답답해진 캐런은 수사에 다소 무심한 팀원 모리스를 꾸중한다. 여기서 모리스역이 남성이고 동양계인 것부터 무척 마음에 들었는데, 꾸중을 들은 후의 태도는 더 인상 깊었다. 물론 처음엔 말대꾸를 했다. 그러나 곧 정당한 훈계임을 인정하고, 후에 열심히 임해 증거를 가져온다. 캐런에게 보고하며 뿌듯해하는 모습이란. 여성 상사라고 무시하는 남성 따위 없다. 캐런의 또 다른 팀원 미아 역시 백인이 아니다. 디지털 정보 수집에 능숙하여 노트북을 달고 사는 캐릭터가 여성인 것도 좋았으며, 이런 캐릭터에 요구되곤 하던 너드 이미지가 아닌 것은 더 좋았다. 미아를 중심으로 여성 형사들끼리 당구장에서 술을 마시며 사건 정보를 나누는 장면은 짜릿하기까지 했다. 이런 거 그동안 남자들만 했잖아요? 그레이스의 팀원 로즈마리는 나이가 많은 여성이지만 그 누구보다 사건 해결에 빠삭하며 팀 내 중재자, 가장 본질적인 멘토 같은 인물이다. 인턴 일라이어스는 중동계로 보인다. 팀원들은 그의 의견을 무시하는 법이 없다. 불가능한 점은 지적해주고, 거기서 더 발전한 시각을 끌어준다. 이는 결국 그가 유능한 인턴으로서 사건 해결의 중요 단서를 잡는 기반이 된다. 메인 캐릭터들은 당연히 좋았으니 굳이 말하지 않았다. 이러다 등장인물을 전부 얘기할 기세여서, 이만 줄인다.


◆ 가해자 변호가 없다.

이때까지 유사 장르물에서는 피해자에 이입하기 어려웠다. 가해자의 불우하고 부당하며 억울한 인생사를 구구절절 읊어주며 범행의 이유를 호소한다. (그러면서 결국엔 아이에게 애정을 주지 않은 엄마 탓이 되더라.) 또는 소름 끼치는 사이코패스로 신격화하기도 한다. 주로 대세라는, 잘생겼다는 남자 배우를 써서. 가해자는 과거부터 미래까지 낱낱이 분석해주면서, 그로 인해 잃어버린 피해자의 인생은 알 바 아니다. 믿을 수 없는 이야기에서는 반대다. 사건 뒤 피해자의 일상을 야금야금 침범하는 트라우마를 보여준다. 마리를 따라다니는 카메라, 마리의 서글픈 얼굴을 담는 타이트한 앵글, 귀를 먹먹하게 하는 듯한 사운드가 시청자를 마리의 자리로 이끈다. 그렇게 우리는 사회 시스템이 피해자에게 폭력적이라는 것, 피해자가 늘 미디어에서 보여주는 방식대로만 존재하지 않는다는 것, 피해자가 겪는 후유증은 여러 형태일 수 있다는 것 등을 배운다. 여성의 이야기는 세세한 반면 범인은 간결하게 검거한다. 그를 홀라당 벗겨 카메라 앞에 세운다. 공포와 위엄 따위 느껴지지 않는 초라함이다. 말미 재판씬에서도 범인의 변론은 가볍게 넘겨버리지만, 피해자들이 직접 그간 겪었던 고통을 호소하는 증언에는 긴 시간을 쓴다. 드라마가 취하는 존중이 느껴졌다.


◆ 신파가 없다.

신파는 나쁜 게 아니다. 상업영화에서 손쉽게 결말짓기 위한 수단으로 쓰고 마는 게 문제다. 이 드라마엔 신파가 없다. (사전을 찾아보니 신파에 그 뜻이 없다. 편의상 신파라고 쓴다.) 드라마 초기부터 꼼꼼하고 차근차근히 쌓아나간 심리 묘사 덕분에, 눈물 없이 전했음에도 그 울림이 매우 컸다. 캐런과 그레이스는 범인을 검거하고서 크게 환호하지 않는다. 사회에 남아 있을 성폭행범들과 그들을 빨리 검거해야 한다는 의무감, 앞으로 또 다른 피해자가 나올지 모르는 불안을 느낀다. 그때 마리에게서 전화가 온다. 마리 역시 과한 감정 표현을 하진 않는다. 아주 담담하게 고마움을 전하는데 이는 곧 캐런과 그레이스에게, 시청자에게 전하는 희망의 메시지가 된다. 성폭행 트라우마는 남들 다 하는 아주 사소한 일도 누리지 못할 정도로 피해자를 괴롭힌다. 마리에게 그 상징은 면허였다. 마리는 이제 차를 몬다. 그 뒤엔 면허를 따지 못했던 시절 타고 다닌 자전거가 매달려 있다. 고통스러운 과거는 완전히 잊히지 않을 것이다. 그러나 그를 인 채 달리는 마리가 가슴 찡한 감동을 준다.


얼마 후 윤이형 작가의 단편소설 「피클」을 읽는데, 성추행 피해자 유정이 나온다. 유정을 두고 회사 사람들은 '걔 좀 이상한 애에요. 상상한 것을 실제라고 믿어요.'라는 식으로 매도한다. 성폭행 증언이 거짓말일 거라 강압 취조를 받다 스스로마저 혼란스러웠던 마리가 떠올랐다. 이 드라마와 다른 작품에서 또 마리가 등장한 것은, 그만큼 이 폭력이 보편적이라는 뜻일 테다.


여성 서사작 제작 중단, 여성 착취물 제작과 같은 논란이 있어도 넷플릭스를 놓지 못하겠는 건 믿을 수 없는 이야기 같은 작품이 있어서다. 며칠째 이 드라마 생각을 떨칠 수가 없다. 그동안 여운이 없었던 영화들은 여성인 내가 이입할 곳이 없었기 때문이었구나 한다. 이 드라마와 더불어 「그레이스」와 「블렛츨리 서클」을 추천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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