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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김주현 Apr 04. 2021

나는 지금 어떤 직선 위를 걸어가고 있는가

뮤지엄헤드 <인저리타임 Injury Time>

하나의 직선은 수많은 점들로 이루어져 있다. 그 수많은 점들 중 하나에 위치하여 있을 때 우리는 우리가 어딘가에 위치하는지, 무엇을 이루어 가는지 잊어가며 우리를 잃어간다. 끊임없이 1인칭 시점으로 나를 들여다보며, 2인칭 시점으로 나를 되돌아보고, 3인칭 시점으로 나를 내려다보며 살아야 할 필요가 있다. 그로써 과거가 생성하고 있는 현재의 어긋남, 그 시공의 연쇄를 받아들이며 과거와 현재라는 두 세계의 교차가 만들어 내는 시차를 마주할 수 있을 것이다.




Q. 두 세계의 교차가 만들어 내는 시차


2019년도에 5개월이 조금 넘는 시간을 프랑스에서 보냈다. 그 당시 프랑스는 한국과 7시간의 시차를 가지고 있었다. 중간에 써머타임이 종료되면서 8시간의 시차가 생기기도 했지만, '나'라는 사람에게 그 정도의 시차는 오히려 더 나다운 삶을 살 수 있게 해 줬던 적당한 시차이지 않았을까라는 생각이 든다.


공간의 차이는 시차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시간의 차이는 어떠한가. ‘오늘의 나'와 ‘이전의 나' 사이에는 어떠한 시차도 존재하지 않는가. 이번 전시는 그것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한다.

   


강재원, 곽인탄, 오은, 이충현, 최태훈 총 5명의 작가가 참여한 뮤지엄헤드의 전시 <인저리타임 Injury Time>에 다녀왔다. 인저리타임(Injury Time)은 주로 축구경기 총 90분의 시간 이후에 부상이나 다른 요인들로 인해 지연된 시간만큼을 추가로 배정하는 추가시간을 의미한다. 기획자의 말에 따르면 이 전시는 오늘의 조각이 일종의 추가시간에 위치한다고 가정하며 그것이 어떤 부상을 축적, 극복하는지 또 어떻게 현재를 생성, 역전하는지 질문한다는 것이다.


다섯 명의 작가들은 각자 오늘의 자신과 하나의 직선을 이루고 있는 이전의 자신을 '현재'라는 시공간으로 불러온다. 그들은 그렇게 형성되는 '어긋난 현재'와 '두 세계의 시차'를 직접 마주하며 갈등과 더불어 여전히 새로운 충돌과 이동에의 열망을 표출한다. 기획자는 이러한 작품의 연속성을 "종료되지 않는 과거를 현재의 시공에서 결정하고, 이미 지난 무언가가 역전되는 상상을 하며" 자신이 게재했던 미래를 선행한 과거의 글 <인저리타임>을 재구성한 후 같은 제목의 전시에 이어 붙였다.


과거라는 조각은 현재와 하나의 직선을 이루기도 하지만 이는 또 결코 일체 될 수 없는 독립된 평행한 두 직선을 이룬다. 전시가 말하는 인저리타임, 즉 추가시간은 시작과 끝이 부재한 뫼비우스의 띠가 아니다. 이는 시작도 끝도 존재하며, 그 존재로 인해 이산하며 또 연동되는 나선형의 시공인 것이다.


 


 

인저리타임, 어긋난 현재의 연쇄


 이번 전시에서 나의 발걸음을 가장 오랫동안 멈춰있게 했던 작품들은 바로 아래의 곽인탄의 작품들이다.


(좌) 곽인탄, <동세 21-1 Movement 20-1>, 2021 (우) 곽인탄, <강박의 통제 불가능성 The Out of Control of Compulsion>, 2020


곽인탄은 자신의 작업을 머릿속을 떠나지 않는 파편들을 모아 조각적 형태를 구성하는 시도로 설명한다. 요즘 눈을 감으면 머릿속에 떠다니는 생각의 파편들로 잠에 잘 들지 못하는 나와의 동질감 때문인지는 모르겠지만 계속해서 그의 작품들에 눈이 갔다. 형태와 질감의 끊임없는 중첩과 반복은 강박을 마주하는 과정과 닮아있으며, 이는 또 새로운 구조로의 재구성이기도 하다.


곽인탄, <동세 21-1 Movement 20-1>, 레진, 철, 스테인리스 스틸, 타공판, 퍼티, 아크릴물감, 에폭시, 바퀴, 160×97×63cm, 2021


곽인탄, <강박의 통제 불가능성 The Out of Control of Compulsion>, 시멘트, 레진, 타공망, 철, 스테인리스 스틸, 132×45×35cm, 2020


<동세21-1>(2021)은 눈, 입, 귀, 발, 손 등의 인체의 조각들로 이루어진 한 인물로서의 형태를 보인다. 이 작품이 흥미로운 점은 과거 그의 <강박의 통제 불가능성>(2020)과 하나의 직선을 이루며 더욱 유의미해지기 때문이다. 곽인탄의 <동세21-1>(2021)은 자신의 지난 개인전에서 선보인 <강박의 통제 불가능성>(2020)과 <지옥문 위에 앉아있는 사람>(2020) 속 인물을 해방시켜 어디론가로 빠르게 이동시키는 상상에서 출발한다.


말 그대로 나는 이번 전시에서 마주한 <강박의 통제 불가능성>(2020)을 통해 어떠한 틀에 갇힌 존재의 억압됨과 그것의 발버둥 침을 온전히 느낄 수 있었다. 그리고 그것의 연쇄된 작업물인 <동세21-1>(2021) 또한 현재라는 시공간에 존재한다고 해서 단순히 과거의 것들의 해방의 결과물이 아닌, 여전히 충돌과 이동의 열망을 표출하고 있는 역동성을 지닌 작업물이라 느껴졌다.


과거의 파편들이 충돌하고 이동하여 결국 현재의 파편을 이루며 현재의 유의미한 파편으로 자리 잡는다. 언젠가는 현재의 이러한 파편 또한 미래, 즉 미래 시점에서 현재의 유의미한 파편으로 자리 잡는 것이 아닐까. 이러한 측면에서 과거의 조각을 현재로 가져오는 인저리타임으로써 형성된 '어긋난 현재'는 하나의 직선을 이루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독립된 개체로 존재하게 한다.


곽인탄, <Gate - 1>, 철, 스테인리스 스틸, 213×120×113cm, 2019


곽인탄의 또 다른 작품인 <Gate-1>(2019)의 가늘고 긴 철제 구조물은 머릿속의 파편들이 툭 치면 와르르 무너질법하게 불안정한 조각적 형태로 구성되어있는 듯한 느낌을 준다. 어쩌면 <Gate-1>(2019)의 인저리타임으로 나온 결과물이 <강박의 통제 불가능성>(2020)이며, 이 작업물의 인저리타임으로 나온 결과물이 <동세 21-1>(2021) 일지도 모르겠다.


이 외에도 작가들은 각자의 인저리타임으로 형성된 '어긋난 현재'로 인하여 하나의 직선을 이루는 과거와 현재를 동시에 독립된 개체로 바라본다.

강재원, <Exo2_crop>, 인플레이터블(inflatable), 270×458×213cm, 2021


강재원은 과거 자신의 작업물의 형태를 왜곡하고(Skew), 비틀고(Twist), 구부리며(Bend), 하중을 가하는(Gravity) 등의 효과를 적용한 결과물 <Exo2_crop>을 이번 전시에서 보이고 있다. 이는 과거와 미래의 시간은 물론이고 평면과 디지털 세계를 오가며 '어긋난 현재'를 형성한다. 유일한 것 같은 이 작품은 컴퓨터 프로그램으로 언제든지 복제, 저장할 수 있는 형태를 삼차원의 공간에 출력한 결과물에 불과한 것이다.


최태훈, <라크 인간 Human LARK>, 185×120×120cm, 2021
최태훈, <자소상 1 Self-portrait 1>, 보조테이블 상판들, 119×135×125cm, 2020


최태훈은 2018년부터 수차례의 전시를 통해 DIY 제품의 기본 유닛들을 자의적으로 재구성하는 일종의 해킹 조각을 선보였으며, 이번 전시에서는 앞선 전시들의 상이한 조형 방식을 하나의 작업으로 소환해낸다. 이는 곧 이 작가가 '어긋난 현재'를 생성하고 재구성하는 방식일 것이다.


(1) 오은, <라스트미닛골 Last Minute Goal>, 2021 (2) 오은, <마이너인저리 Minor Injury>, 2021 (3) 오은, <19#4>, 2021


이충현, <Trinity>, 스테인리스 스틸, 우레탄 도장, 100×200×100cm, 100×200×100cm, 141.4×141.4×100cm, 2021




A. 두 세계의 교차가 만들어 내는 시차

    

공간의 차이는 시차를 만들어낸다. 그렇다면 시간의 차이는 어떠한가. 오늘의 '나'와 이전의 '나' 사이에는 어떠한 시차도 존재하지 않는가. 이번 전시는 그것에 대한 물음에 답을 한다.


1차원은 직선, 2차원은 평면, 3차원은 현재 우리가 살아가는 입체공간, 4차원은 3차원에서의 시간과 공간이 별개가 아닌 하나로 존재하는 시공간을 의미한다. 3차원에서는 공간좌표인 (a, b, c)만 존재하였다면, 4차원은 공간좌표 (a, b, c)에 시간 좌표 d가 추가된 (a, b, c, d)의 형태를 보인다는 것이다.


나는 이번 전시가 우리가 살아가는 세계를 시공간이 존재하는 4차원으로 바라보고 있다고 생각한다. 과거의 추가시간에 해당하는 오늘의 조각이 충분히 현재를 새롭게 생성하고 역전시킬 수 있다고 보기 때문이다. 이러한 관점에서 ‘오늘의 나'와 ‘이전의 나' 사이에는 분명한 시차가 존재한다. 그 시차는 현재의 노력으로 줄어들기도 하고, 늘어나기도 하며, 나아가 자신에게 맞는 적절한 시차를 형성할 수도 있을 것이다.



나는 지금 어떤 직선 위를 걸어가고 있는가


지금이 나에게 주어진 과거의 추가시간이라면, 나는 어떤 선택으로 현재를 재구성할 것인가. 인생은 B(birth)와 D(death) 사이의 C(choice)라고 한다. 내가 지금 이 순간에서 어떠한 선택을 하느냐가 내가 그어 놓은 직선의 방향을 선택하기도 하고, 그것의 모양을 결정하기도 한다. 며칠 전 나의 물음에 대한 친구의 대답은 나에게 본질적인 해답을 가져다주었다.


    "우리가 하나의 직선 위에 놓여있다면 지금 내가 하는 이 선택이 나의 직선을 조금 울퉁불퉁하게 할지는 모르겠지만 결국엔 멀리서 보면 곧은 직선을 이루지 않을까?"

    "그래. 그리고 혹시 아니? 너 선택으로 조금 튀어나간 그 직선이 결국 나중엔 별 모양을 만들지도 모르잖아."


맞다. 맞는 말이다. 꼭 인생을 다른 사람들이 살아가는 직선으로 살아갈 필요가 있는가. 나의 모양을 만들어 가면 되는 것이다. 나는 왜, 아니 사람들은 왜 직선으로 살아가고자 노력하는가. 그 이후로 정했다. 나는 파도의 물결을 닮은 곡선으로 살아가겠다. 당신은 어떤 모양의 선 위를 걸어갈 것인가 생각해보기를 바라며, 윤도현의 노래 <생일>로 글을 마친다.


온 우주의 별자리들을 다 헤매도
벗어나지 못하는 이 사막의 중심에서
나는 나의 죄를 닮은 밤하늘을 향해
아무도 사랑하지 않을 거라고 말했다
그러자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중략>

나의 모든 것들이
그리워지기 시작했다
나의 죄를 닮은 밤하늘
이젠 너도 사랑할 수 있다
윤도현, <생일> 中


언젠가는 우리도 우리가 과거에 내린 수많은 선택과 결정을, 그리고 그것이 형성한 어긋난 현재인 오늘의 조각을, 어쩌면 그 모든 것들을 사랑할 수 있게 되기를.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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