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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이제 May 31. 2021

무심코 삶을 밝히는 것들

내게 있는 무엇이 남을 기쁘게 하나, 기분 좋은 상상


 예배에 한참 늦은 아침 타려던 버스가 늦게 도착한다기에, 조금 더 빨리 도착하는 버스를 타기 위해 정류장까지 걸음을 재촉해 걸었다. 마침내 다다른 정류장에서 리넨 셔츠의 소매를 둘둘 말아 올리며 생각했다. 버스가 오려면 8분 남았고, 5분 정도를 걸어왔으니까 그냥 아까 그 정류장에서 잠자코 기다릴걸. 어쨌듯 버스가 나타날 사거리에 시선을 고정한 채 땀을 식히고 있는데 비눗방울 하나가 시야에 들어왔다. 미끄럽게 뱅글 돌더니 금방 퐁 터졌다. 뒤이어 고만고만한 크기의 비눗방울이 줄줄이 눈에 들어온다. 그중 가장 작은 비눗방울을 눈으로 좇다가, 여자아이 하나와 눈이 마주쳤다. 


 여서 일곱 살쯤 되었을까. 아이는 분홍색 면 마스크를 살짝 내리고서 입술을 동그랗게 만들어 후- 비눗방울을 불고 있었다. 주말 낮이라 가족들과 소풍을 가려는지, 깜찍한 빨간 원피스에 하얀 타이즈를 단정히 신고 있었다. 원피스와 같은 날 샀나 싶은 빨간 벙거지 모자로 인해 더더욱 소풍이라는 단어가 떠올랐던 것 같다. 아이는 나와 마주친 눈을 거두지 않은 채 계속해서 비눗방울을 만들어냈다. 그러나 힘이 너무 들어갔는지 비눗물만 튈 뿐 아까 같이 줄줄이 비눗방울은 만들어내지 못하고 있었다. 아마 저를 관심 있게 지켜보는 내게 최대한 그럴듯한 비눗방울을 만들어 보이고 싶었을 것이다. 


 맘 같지 않게 자꾸 숨에 힘이 들어가는 아이가 마침내 조그만 비눗방울을 두어 개 불어냈을 때 ‘잘하네, 예쁘다’ 하고 반응해 보였지만, 연신 도로 위를 지나가던 차 소리에 가볍게 묻히고 말았다. 하려던 말이 제대로 전달되지 않고 나니, 도리어 아이에게 꼭 그 말을 전해야 할 것 같았다. 아주 잠깐 마스크를 내릴까 고민하다 대신 눈으로 열심히 웃어 보였다. 보기 좋게 아래로 처진 눈이었다면 좀 더 자연스럽게 칭찬을 대신할 수 있었을 텐데, 그렇지 않아 과하게 힘주어 접은 눈이라 아이가 나의 소리 없는 칭찬을 오인한데도 할 말은 없었다.


 한편 나도 그제야 아이의 눈을 똑바로 보았다. 올려다볼 때 깊게 지는 짙은 쌍꺼풀이 사랑스러웠고, 이목구비가 야무진 예쁜 생김새를 보아 동남아 혼혈아인 듯했다. 어딜 가기에 저렇게 깜찍하게 입혔을까 아니 어쩌면 아이가 하나하나 야무지게 골라 입었을 것 같기도 했다. 오늘 머리는 묶지 않고 풀겠다고 그리고 벙거지 모자를 쓰겠다고 했을지도, 와 같은 생각을 하며 버스 도착 시간을 보다가 다시 한번 시야에 들어온 비눗방울을 무심코 검지 손가락으로 터뜨렸다. 그러자 아이가 활짝 웃어 보였다. 이거구나. 이렇게 놀고 싶었구나. 적당한 힘으로 숨 뱉는 방법을 터득했는지 아이는 곧잘 비눗방울 기차를 만들었고, 나는 아이의 웃음에 힘입어 크지 않은 비눗방울들만 골라 톡 톡 터뜨렸다. 


 아이의 소리 없는 웃음이 어찌나 환하던지, 잠시 후 도착이라고 뜬 버스가 두어 번 정도 긴 신호에 걸렸으면 좋겠다고 생각했다. 머지않아 아이의 엄마처럼 보이는 여자가 나타났다. 여자는 엄마 특유의 빠르고 다정스런 손길로 옷매무새를 다듬어주고서 아이의 손을 잡았다. 나도 때마침 기다리던 버스가 왔다. 순하게 엄마 손을 그러쥔 아이는, 다른 쪽 손을 어깨 높이까지 들어 올리더니 빠르게 흔들어 보였다. (안녕-) 여운이 길게 남을 그 해사한 웃음을 띈 채였다. 참 예쁘구나 아이는. 쉽게 사람 마음을 얻어낼 수 있구나 아이는. 나는 놓칠세라 가방을 어깨에 둘러매고서 양손 인사를 했다. 버스에 올라타 이동하는 짧은 시간, 이루 말할 수 없는 충만함을 느꼈다. 아이는 지금 자신이 무슨 일을 했는지 알까? 


 피천득 시인은 어느 날 잘못 걸려온 전화 속 ‘미안합니다’ 하는 명랑한 웃음소리를 듣고 갑자기 젊음을 느낀다. (피천득 시인의 산문집 <인연> 중) 비눗방울 아이의 해사한 웃음은 내게 난데없이 선(善)을 떠오르게 했다. 봄의 예고편처럼 연하고 보드라운 것은 무엇이든 피워낼 수 있을만한 아주 고귀하고 흠결 없는 선을. 


 각 사람의 유일무이함과 그가 지나는 삶의 한 시기가 만나 의도치 않게 남을 기쁘게 할 수도 있겠다고 생각했다. 다른 누구일 필요 없이 나 혹은 당신만이. 다른 어떤 때일 필요도 없이 바로 지금. 누군가에게 무심코 젊음이나 봄, 선 같은 것들을 떠오르게 할지도 모른다고. 그러니 누구든 인생의 어느 때를 지나고 있든 버스 정류장에서 마주친 아무에게라도 하루를 밝힐만한 영향력을 행사할 수도 있는 것이라고, 그렇게 믿어보면 어떻겠냐고 아무에게나 말하고 싶어 졌다. 


 이 비눗방울 아이는 앞으로 커가는 동안 얼마나 다양한 사람들의 하루를 의도치 않게 밝히게 될까. 운 좋게 그와 마주친 사람들은 그 기억으로 인하여 당장 착한 일을 도모하고 싶을 정도일 것이다. 의도하지도 의식하지도 않아 아이는 자신이 언제 누구를 그렇게 기쁘게 했는지 모를 테다. 이 날의 기억을 이렇게 구구절절 써내 기억하려는 나도, 어떤 모습으로 어떤 날에 의도치 않은 기쁨을 선사한 경험이 꽤 쌓여 있는지도 모를 일이다.


 인생의 어느 때를 지나든 살아 존재함으로 인해 미지의 누군가를 기쁘게 할 수 있다고 믿고 외출하는 삶이란 좀 다를 것 같다. 의도해서 가능한 것도 아니지만, 이왕 지금 내가 지닌 것으로 가능한 것이라면 좀 의도해보고 싶기도 하다. 피천득 시인의 산문에 등장하듯, 때 마침 나도 젊은 목소리를 지녔으므로 다른 때보다 목소리를 좀 더 가다듬고 이곳저곳에 인사를 건네보아도 괜찮겠다.


 그렇게 방울방울 띄워낸 목소리가 툭, 무심코 누군가에게 닿고, 연이어 그 사람만이 할 수 있는 의도치 않은 행동으로 또 다른 삶의 중심부에 무심히 가닿는 세상. 즐거운 상상이다. 내가 누구라도 지금이 언제라도 누군가에게 삶은 살아봄직하다는 기분을 선사할 수 있다는 걸 상상하며 집을 나선다면, 그리고 그만큼 다양한 초면들이 기분 좋게 내 삶에 간섭할 특별한 날이 오늘이 될 수도 있다고 기대한다면, 더워지는 날씨쯤 두 팔 벌려 넉넉히 반길 수 있을지도.


노을지는 동네의 낱낱한 생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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