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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주인우 Jul 22. 2023

교사가 죽어간다.

한 선생님을 추모하며…

일어나지 말아야 할 일들이 너무 많이 일어나는 세상이다.


빵을 만드는 기계에 사람이 끼이고, 두 명이 일했어야 할 위험한 곳에서 혼자 일하다 세상을 떠나는 노동자들에 대한 기사가 연일 터져 나와도 높은 분들은 눈 하나 깜빡하지 않는 비정한 세상이다.


학교의 모든 일은 교장의 책임이다.

초등 2년 차 교사가 1학년 담임과 나이스를 맡았다는 내용만 보고도 ‘학교가 정상이 아니군.’하는 생각이 든다. 교사들은 다 그랬을 것이다. 고등학교에서는 고3 담임을 저경력 교사에게 주지 않는다. 조금 다른 이유겠지만 학생 돌봄도 어렵고, 학부모 민원도 가장 심한 초등학교 1학년 담임을 저경력 교사에게 주면 안 된다. 선배 교사들의 기피가 있었는지 어떤지 모르겠지만 이것은 분명 교장의 잘못이다. 인사권은 교장에게 있고, 교장은 교사들을 다독이고 학부모들 민원을 최소화하는 방향으로 학교를 운영했어야 한다. 지역별로 초등학교 교사들은 거의 대부분 같은 대학 출신으로 이루어진 무서운 세계이다. 이러한 세계에서 후배들에 대한 최소한의 방어막은 주어졌어야 한다. 그러나 시스템이 무너졌고, 책임자가 없었다.


지금 한국의 교사를 방어할 시스템은 없다.

적어도 우리가 학교를 다닐 때는 학교에서 학생을 퇴학시킬 수 있었다. 지금은 교사를 방어할 아무런 장치가 없다. 심지어 강제 전학도 학교 폭력 가해 학생의 학습권 보장 따위를 폭넓게 지지해 준 법원 덕에 매우 어려워졌다. 별 학습권을 다 보장해 준다. 학생이 배우려는 자세와 태도, 다른 사람과 함께 있을 때 지켜야 할 최소한의 도리도 배워야 한다는 것을 법원에 있는 사람은 배우지 못했나 보다.


교사의 휴대전화 번호는 개인정보가 아니라며 가정통신문에 교사의 개인 휴대폰 번호를 그 교사의 의견과 상관없이 게재한 것이 불과 몇 년 전이다. 가정통신문은 학교 홈페이지에 업로드된다. 학부모들은 끊임없이 민원을 제기한다. 친구가 대학 조교로 있는데 대학생 학부모도 민원을 계속 넣는다고 한다. 자기 자녀의 학점이 잘못된 것 같다고 교수한테도 전화를 한다. 학부모들은 이 과정에서 뭐가 잘못되었는지도 모른다. 하물며 초중고 담임교사야 말해 무엇할까.


학부모 민원이 너무 심각하다고 교사들이 끊임없이 교육청과 교육부에 말해왔지만 교사들의 목소리는 무시되었다. 가끔 밤새 문자를 보내는 학부모들이 있다. 생각보다 그 가끔은 자주 찾아온다. 교사를 고소하는 학부모도 많다. 교사는 이런 일들에 속수무책이다.


명예퇴직 신청은 다 받아들여지지 않고, 임용고사에 합격한 젊은 교사들이 2-3년 내에 학교를 떠난다. 5년간 약 4만 8천여 명의 교사들이 과로와 교권 추락을 이유로 교직에서 이탈했다고 한다.


교실은 이제 전쟁터다.

전쟁터가 아니라 무덤이 되었는지도 모르겠다.


학교에서 죽음을 선택하기까지…

다 알 수는 없지만 나도 그런 생각을 한 적이 있었다.

먹을 수도, 마실 수도, 잘 수도 없는 기나긴 날들.

학교를 그만두라는 어머니와 포옹하지 않으면 출근을 하지 못했던 날들.

어떻게 죽어야 내 아픔을 알아줄까 고민하던 날들.


장학관 출신의 우리 교장은 사람의 마음을 잘 다루었다. 교장이 치료비를 학교에서 내줄 테니 치료를 받으라고 했다. 그 치료비가 정말 학교에서 나왔는지 교장 주머니에서 나왔는지는 지금도 모른다. 트라우마 치료를 1년 정도 진행했고, 학교를 떠나 잠시 다른 즐거운 일에 몰입하면서 서서히 치유되었다. 그때 이미 나는 교육경력 10년이 넘는 베테랑 교사였다. 그런데도 학교는 너무나 아프고, 교사를 보호할 장치가 하나 없는 곳이었다. 좋은 교장을 만난 것은 그저 운이었다.


감히 그 마음을 다 안다고 할 수가 없지만 그런 입장에 처해 본 적이 있는 교사는 참으로 많을 것이다. 현장에 있는 교사들은 민원의 칼날과 고소의 위협 속에 무방비 상태로 내던져있다.


추모도 마음대로 못합니까?

학부모들은 유려한 글솜씨로 카카오톡 프로필 사진을 변경해달라거나 학교 앞 화환을 치워달라는 등 교사들에게 눈에 보이는 추모를 하지 말아 달라고 요구했다. 문자를 받은 교사는 추모도 마음대로 하지 못하냐고 분통을 터뜨렸다.


우리는 그런 곳에서 일하고 있다. 일거수일투족을 감시받고, 부정확하거나 왜곡된 정보를 전한 아이의 말을 발판 삼아 찌르고 할퀴는 학부모들의 말과 행동을 날것 그대로 온몸으로 막아내야만 하는 그런 곳에서 일한다.


오늘 보신각 앞에 오천여 명의 교사들이 모였다고 한다. 동료 교사를, 어린 후배 교사를 추모하고자 하는 마음이 가장 클 것이지만 교사들의 살려달라는 외침인지도 모르겠다.


논외로, 어른들은 초등학생들이 너무 어리다고 생각하지만 초등학생들도 많은 것을 알고, 스스로 판단한다. 연일 기사가 터지는데 아이들에게 진실을 숨길 수는 없다. 아이들도 이 일이 어떤 문제가 있었던 것인지 알고, 비판적으로 생각하고, 각자의 방법으로 추모할 수 있어야 한다. 그것이 아이들에게 제일 상처를 덜 받게 하는 일이다.


소아과가 없어지고, 교사들은 이탈한다.

마음이 죽어가는 교사들을 여럿 본다. 그렇게도 반짝반짝 빛나던 친구들이 학교에서 쓰러져가고, 어두워지고, 아파하는 모습을 보면서 20대의 그때가 때때로 현실 속 기억이 아닌 것만 같기도 하다. 학과 친구들을 만나면 왜 우리는 서울대에 학과가 그렇게도 많은데 사범대를 오고, 교직에 나왔을까 후회의 장을 매번 열기도 했다. 이제는 학교에 열정을 다하지 않으리라 다짐하면서도 현장에서 또 몸을 날리고 마음을 다치는 친구들과 동료들을 보며 가슴 한 켠이 쓰리다.


모든 아이들이 행복해지는 것이 꿈이라고 입버릇처럼 말하며 미소 짓던 나의 젊은 시절에게 늘 미안하다. 돈을 많이 벌어서 가난한 지역의 아동을 위해 기부하거나 학교를 세워주면 좋았을 것을 왜 현장으로 나와서 이렇게 아프게 되었을까.


소아과가 없어지는 것과 교사들이 계속 이탈하는 맥락은 결국 같을 것이다. 내 자식만 중요하고, 내 자식을 위한다는 명목의 어긋난 사랑으로 타인을 상처 준 수많은 부모들이 결국은 아이를 치료할 의사와 가르칠 교사를 내쫓고 있다. 아니, 이제 아이를 지켜주던 사람을 죽음으로 내몰았다.


시스템이 필요하고,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우리는 이미 소중한 한 사람을 잃었다. 이 사실은 변하지 않는다. 애끊는 슬픔이다. 분노가 치밀어 오르는 슬픔이다. 선생님도 누군가의 귀한 자식이었는데 그 학부모는 어떤 자격으로 그 선생님의 개인 번호까지 알아내어 괴롭혔을까.


학교는 왜 선생님을 지켜내자 못했을까. 교육의 질은 교사의 질을 넘지 못한다는 그 말을 그렇게도 많이 인용하면서 그런데 왜 교육 당국은 언제나 교사들의 의견을 무시하고 보호하지 않았을까. 이런 일이 있을 것이라고 교사들, 특히 초등 교사들은 자신들을 보호해 달라고 수없이 많이 당국에 요청하였다. 교육 정책은 언제나 교사를 소외시키고 교권은 땅 깊은 줄 모르고 추락해 가고 있다. 직업적 특성상 사명감이 강하고, 빨리 배우며, 대체로 순응적인 이들은 어떤 일이 있어도, 그럼에도 불구하고 교실을 지키기 때문에 결국 교사들은 계속 소외되고 위험에 노출되었다.


이제는 시스템을 마련해야 한다. 교사를 지켜낼 시스템 없이는 교사들, 특히 젊은 교사들은 계속 이탈할 것이고, 교육의 질은 이미 떨어져 가고 있으며, 결국은 미래를 이끌어 갈 다수의 선한 학생들도 피해를 입을 것이다.


인식의 전환이 필요하다. 그렇게 울부짖는 ‘공교육 정상화’는 공교육이 사교육을 능가하는 성취를 낳는 것이 아니다. 교육의 의미를 제고하고 교사와 학생이 행복하게 생활하고 배워가는 곳을 만들기 위해 정부와 학부모가 학교와 교사를 지원해야 한다.


그리고 나는 단호히 말할 수 있다. “학부모님들이 다니시던 학교와 지금의 학교는 완전히 다르고, 그때 그런 교사들도 없습니다. 그러니 제발 교사들을 감시하고 비난하는 일을 멈추십시오.“


악몽이 끝나고 꿈꾸는 학교가 되기를…

나는 잠시 학교를 떠나 아기를 보고 있다. 아기가 주는 기쁨이 지금까지 삶에서 느낀 기쁨과는 아예 다른 차원의 세상 같아 충만한 행복감 속에 살고 있다. 그러나 한편으로는 잠깐 학교를 떠나서 더 행복하지 않았나 싶다. 9월에 학교로 돌아가기로 결정한 순간부터 악몽을 꾸고 있다.


교사가 학교에 가는 것이 더 이상 악몽이 아니기를 간절히 바란다. 출근하는 게 지긋지긋하고 싫은 정도가 아니라 교실과 교무실이 지옥 같은 교사들이 너무 많이 있다.


학부모에게 맞아서 치료를 받으면서 소송도 못한 교사,

새벽까지 악성 문자를 끊임없이 보내는 학부모 때문에 매일 밤을 새우는 교사,

학생에게 멱살을 잡히는 교사…


교권이 아니라 최소한의 교사의 인권도 보장되었으면 하는 소박한 바람도 이루어지지 않는 교실에서 좋은 교육을 꿈꿀 수는 없다.


교대와 사대를 지원했던 포부와 사명감.

교단에 처음 설 때의 설렘과 열정.

이런 것이 지켜지는 학교였다면…

그랬다면…


교사들의 악몽을 멈추고, 꿈꿀 수 있도록 교사들이 지켜질 수 있기를 바란다.




삼가 고인의 명복을 빕니다.

부디 그곳에서는 편안하시기를 간절히 기도해 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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