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보헤미안 Lyn Apr 10. 2020

당신을 응원합니다

헤어 디자이너가 건넨 따뜻한 이야기

  휴직 둘째 날, 어제는 제대로 누리지 못했던 평일에 쉬는 즐거움을 이제야 제대로 느끼게 되었다. 남들 쉴 때 같이 쉬는 것도 중요하지만 뭐니 뭐니 해도 남들 일할 때 쉬는 기쁨이 더 큰 것 같다. 그렇게 나는 평일의 여유로움을 한껏 즐겼다. 그러다 귀찮고 피곤하다는 이유로 한동안 방치해놓았던 머리에 눈길이 갔다. 엉클어지고 파마가 다 풀려 부스스한 머리를 휴직 기념으로 싹둑 자르고 싶은 충동을 느꼈다. 치렁치렁한 머리를 잘라내면 몸도 마음도 한결 가벼워질 것 같았다. 게다가 바쁜 출근시간에 드라이기로 말리느라 꽤 많은 시간을 소요했던 장발에 지쳐있기도 했다. 곧바로 예약을 잡았다.


오랜만에 만난 헤어 디자이너는 평일에 어떻게 왔냐며 환하게 맞아주었다. 나는 그간의 상황을 설명하였고 그녀는 공감과 응원을 해주었다. 진심 어린 표정과 말 한마디 한마디가 고마웠고 힘이 되었다. 사실 6개월 전 방문했을 때에도 나는 그녀로부터 많은 것을 얻어갔다. 당시 나는 조직에서의 내 역할에 대해 고민하고 있었는데 그때도 이미 심신이 많이 지쳐있을 때라 더 이상 소진되지 않도록 나는 이전보다 더 개인주의화되고 있었다. 담당 업무만으로도 벅찬데 위아래 챙기느라 정신적, 체력적인 소모가 더했기 때문이다. 그리고 어느새 어디까지가 내 일인지 구분이 가지 않을 정도로 모든 일에 관여되어 있었고 기타 잡무는 건네주기조차 미안해서 계속 맡아하다 보니 기타 업무가 주 업무를 위협할 정도로 한껏 쌓여 있던 차였다. 


일 욕심이 있는 것도 아니고 조직에 잘 보여서 출세하고 싶은 욕심도 전혀 없는데 어느새 회사의 시스템과 빠듯한 업무 스케줄과 상사의 재촉에 내가 말려든 느낌이었다. 


모른척하고 싶었는데 어느새 그 모든 일을 하고 있었다.




자주 못 만나 반가워서인지 아니면 서로가 이야기를 하고 싶게끔 끌어내는 성향이어서 그런지 나와 디자이너는 평소 미용실에서 이런저런 이야기를 많이 하는데 6개월 전 방문했던 그날도 다소 진지한 이야기를 나누었다.


담당 디자이너는 헤어숍 내 인턴들의 교육을 담당하고 있었다. 때문에 하루 일과를 끝낸 저녁에는 지친 몸을 이끌고 밤늦게까지 인턴들을 교육했는데 그녀는 교육을 하다 보면 인턴들이 교육시간에 집중하지 않고 시간 때우기 식으로 앉아있거나 가르쳐주는 방식을 그대로 따라 하기보다는 보다 쉬운 방법으로 자의적인 변형을 통해 일을 처리하는 모습을 종종 보게 된다고 했다. 그때마다 처음부터 다시 교육하는데 피곤한 밤에 보상도 없는 일을 하는 것에 몇 번 회의감이 들기도 했지만 이윽고 이게 본인이 해야 하는 일이라고 생각했다고 한다. 인턴이 하는 샴푸 서비스부터 각종 기본이 되는 보조 업무들이 곧 고객의 만족과 직결되기 때문에 인턴들 모두 이상적인 서비스 수준에 도달할 때까지 교육하는 것이 본인의 임무이자 본인이 좋아하는 이 일과 매장을 지키는 일이라 했다. 


나는 그녀에게 의지가 있는 인턴들 교육만으로도 힘이 들 텐데 굳이 따라오지 않는 인턴까지 보살피기에는 너무 피곤하지 않냐고 물었다. 어차피 그들의 인생이기 때문이다. 하지만 그녀는 그것이 중요한 업무고 그게 본인의 업이기에 힘들어도 해야 한다고 했다


그녀는 소명의식이 있었다. 물론 본인의 일을 사랑하기 때문일 것이다.




나는 잠시 생각에 잠겼다. 나는 회사생활이란 무릇 내가 받는 월급만큼만 일하는 것이 합리적이라고 생각하는 사람이었다. 때문에 직급과 월급에 비해 업무량과 난이도는 그 수준을 넘는 것 같아 스트레스를 받았고 불만을 가졌다. 그리고 무엇보다도 지금 내가 하고 있는 일은 내가 하고 싶은 일이 아니었다. 인력부족을 이유로 조직은 내게 새로운 보직으로 직무전환을 시켰고 나는 그 일을 몇 해째 해오면서 도대체 이 일을 계속해야 하는 것인지에 대한 의문이 계속 있었던 것이다. 


이처럼 그녀와 나는 본인이 원하는 일을 하는지 여부의 차이점이 있기는 했지만 가장 큰 차이점은 직업에 대한 소명의식이었던 것 같다. 내게 직장은 '밥벌이의 수단'일 뿐이었다.


그러고 보니 몇 해전 마사지실에서 만난 실장님도 그랬다. 나보다 대여섯 살이 어렸지만 이른 나이에 사회생활을 시작해서 연차는 상당했는데 여전히 본인의 업에 대한 열정이 가득했다. 일례로 마사지실에 새로운 제품이 들어올 때마다 매번 자비로 구매해서 그 효능을 테스트해보느라 본인 월급의 대부분을 쓴다고 했다. 그래야 고객들에게도 적합한 제품을 추천해줄 수 있기 때문에 꼭 필요한 일이라 했다. 그녀도 소명의식이 투철했다.




그녀들의 소명의식과 본인 업에 대한 진지한 자세는 나에게 감명을 주었다. 나는 내게 주어진 일이 아니라면 무심히 지나쳤을 것이고, 교육하는 이가 불성실하다면 벌써 포기했을 것이기 때문이었다.


하지만 디자이너의 말은 분명 내 가슴에 따뜻함을 남겼다. 쉽지 않은 일이지만 분명 필요한 일이기도 했다.


머리를 싹둑 자르고 나니 한동안 느껴보지 못했던 가벼움이 느껴졌다. 마음속 음울했던 무언가도 같이 잘려나간 것 같았다. 디자이너는 휴직 기념 선물이라며 헤드스파를 받고 가라고 했다. 세심하게 생각해주는 마음이 고마웠다. 두피 스케일링과 마사지를 받으며 몸도 마음도 시원해졌다.


그리고 나도 이번 휴직기간 동안 내가 진정 원하는 업이 무엇인지 꼭 찾아보겠다고 다짐했다. 



*사진출처: Pixabay-Free Photos

매거진의 이전글 휴무인 듯 휴직인 듯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