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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이주영 Apr 06. 2020

1. 나는 미친놈과 결혼했다

이 남자와 살려면 내가 그의 몫까지 정신을 차려야 한다.

 

밤 11시 45분, 조용한 집안.

오늘도 어김없이 남편의 휴대폰에서 요란한 소리가 울려 퍼진다. ‘취침시간’ 알람이다. 남편은 늘 그렇듯 알람을 끈 후 하던 일에 몰두한다. 어차피 잘 것도 아니면서 알람은 왜 맞춰 놓는가 싶지만, 이렇게라도 하지 않으면 밤이 되어 자야 한다는 사실을 잊어버리기 때문이다. 그가 잊어버리는 것은 취침시간만이 아니다. ‘그 일’ 이외엔 대부분의 것을 잊어버린다. 아니, 신경 쓰지 않는다.      

하루는 퇴근시간이 다 되어 가는 늦은 오후, 내게 전화를 해서 뜬금없는 소리를 해댔다.


"혹시, 오늘 집 앞 전철역에서 구두끈 못 봤어?”


어처구니가 없다. 구두도 아니고 ‘구두끈’이라니. 그는 하루종일 구두끈이 없어 덜컥대는 구두를 신고 있었음에도, 동료 선생이 "왜 구두끈을 안 매고 다니는 거야?” 물어보기 전까지 아무런 불편을 느끼지 못했다. 그 말을 들은 후부터 걸음걸이가 불편해서 신기했다고 웃으며 말했다. 정신을 딴 데 팔고 있으면 웬만한 신체적 불편함은 느끼지 못하는 법이다. 전날 저녁, 그는 구두끈이 낡았다고 아무래도 교체해야 할 것 같다고 혼잣말을 했다. 남편은 구두끈을 교체하려고 구두에서 끈을 뺐을 거고, 다시 끼워 매는 것을 잊어버린 것이 틀림없다. 구두끈을 빼는 데 너무 많은 시간을 써서 서둘러 해야 할 중요한 일을 얼른 다시 해야 했으니까. 


남편의 뒷모습. 그는 ‘그 일’ 이외엔 대부분의 것을 잊어버린다. 아니, 신경 쓰지 않는다.


구두끈 에피소드와 비슷한 일화는 한두 개가 아니다. 그는 신발 밑창을 반나절 동안 잃어버린 적도 있으며, 방금 시계방에서 찾은 시계를 잃어버린 적도 있다. 어떤 일을 잊어버리거나 물건을 잃어버리는 것이 일상인 그지만, 시계를 잃어버렸던 날은 잠을 설치기까지 했다. 결혼 기념으로 장모가 그에게 선물한 것이기 때문이다.

옆 동네에 있는 시계방에서 전지를 갈고 오겠다고 집을 나선 그는 집에 돌아와서야 자신이 시계를 잃어버린 것을 알았다. 시계를 찾으러 다시 집을 나서려는 그를 내가 말렸다. 이미 늦은 밤이었고 느닷없이 폭우가 쏟아지고 있었다. 시계방에서 시계를 찾은 것은 확실하다고 하니 길거리 어딘가에 떨어뜨렸을 게 뻔하다. 그는 뭐든 바지 앞주머니에 대충 쑤셔 넣는 버릇이 있다. 바지 주머니에 넣었다 잃어버리는 일을 그만큼 겪었으면 고칠 만도 한 습관인데, 고칠 생각을 하지 않는 것인지, 바지주머니에 넣었다 잃어버린 사실들을 모조리 잊어버린 것인지 알 수 없다. 시계를 떨어뜨린 장소가 어딘지도 모르면서 폭우 속을 헤매는 일은 헛수고일 게 뻔하다. 

왜 시계를 시계방에서 찾자마자 손목에 차지 않았는지, 왜 가방 속에 넣지 않았는지, 잔소리를 하는 것도 귀찮았다. 그런 말을 해봤자 그의 습관이 고쳐질 리 없다. 습관이 몇 마디 잔소리로 고쳐지는 것이었다면 이 세상 누구도 나쁜 습관을 가지고 있지 않을 것이다. 짜증이 났지만 짜증을 낸다고 잃어버린 시계가 돌아오는 것도 아니고, 시계를 분실한 당사자가 그날따라 극심하게 본인의 부주의함을 자책하고 안타까워하는 모습을 보여 아무 말도 하지 못했다.      

다음날 아침, 꼭두새벽부터 현관에서 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남편이었다.

"이 시간에 어딜 가는 거야.”

"시계 찾아올게. 밤새 기억을 더듬어봤는데, 시계방 옆 과일가게 앞에서 뭔가가 떨어지는 소리를 들은 거 같아. 아마 시계였을 거야.”

걸으면서도 그가 포기할 수 없는 ‘그 일’에 몰두하느라 물건이 떨어지는 소리 따위 신경 쓸 정신이 없었던 게다. 성질이 불끈 났다.

"네가 만약 시계를 찾으면 그건 기적이다. 기적!”

나는 짜증이 밀려와 그냥 방에 들어가 잠을 잤다. 얼마 후 현관에서 나는 소리에 잠에서 깼다.

그가 손에 손목시계를 들고 환하게 웃고 서 있다.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정말 기적이야! 과일가게 앞에 커다란 트럭이 세워져 있었는데, 트럭 뒷바퀴 바로 뒤에 시계가 떨어져 있었어. 길바닥에 있었으면 누군가 벌써 주워갔을 텐데 말이야. 그리고 트럭이 어젯밤 그 폭우에서 시계를 지켜줬어!”

기적이 이런 식으로 다가온 게 아쉽기는 했지만, 기분이 나쁘지는 않다. 

"어… 시계가 죽었네…. 어젯밤에 전지를 갈아 끼웠으니 전지의 문제는 아닐 테고. 이런….”

"다시 시계방에 갖다 줘!”

"아마, 밤새 온 비 때문일 거야. 너무 습해서 그럴 수도 있어. 시계를 헤어드라이기로 말려봐야지!”

"네가 만약 시계를 드라이기로 말려서 고칠 수 있다면 그건 기적이다. 기적!!”


잠시 후, 욕실에서 들리는 환호소리. 그는 시계를 드라이기로 말려 고쳤다. 또다시 기적이 일어난 것이다.      

나는 살면서 기적 같은 일을 몇 번이나 겪었을까? 하는 생각에 이번엔 상당히 기분이 좋아진다. 남편이 시계를 잃어버리지 않았더라면 겪지 못했을 기적이다. 기적은 ‘행운’이 아니라 ‘다행’이라는 사실을 깨달으며 ‘다행’의 가치를 새삼 느낀다. 이 남자와 살면 몰랐던 사실을 앞으로도 많이 깨닫게 될 것 같은 예감이다. 몰랐던 것을 알아간다는 것은 과연 좋은 것일까? 왠지 피곤할 것만 같다.


기적이다. 기적.


시계를 찾고 고친 후 안정을 되찾은 그는 편한 마음으로 다시 ‘그 일’에 몰입했다. 남편이 쉬지 않고 해대는 ‘그 일’이란, 책을 읽는 일이다. 우리 모두가 하는 것이 바람직하다고 생각하는 행위, ‘독서’라는 것.     

마흔을 넘겨 한 결혼에서 내가 가장 바랐던 것은 무엇인가? 정신을 똑바로 차리고 살아야 한다는 긴장감에서의 해방이었다. 더이상 혼자가 아니니 내 옆에 있는 사람이 정신만 차려 준다면 나는 피곤한 긴장감에서 벗어날 수 있을 거라는 속셈이었다. 

조금 게으르고 안이하지만 무척 소박한 바람과는 달리, 나는 책에 미쳐 온갖 물건을 골고루 잃어버리고 취침시간까지 잊고 사는 남자와 결혼을 하고 말았다. 이 남자와 살려면 내가 그의 몫까지 정신을 차려야 한다. 

결혼은 없었던 일로 하기엔 매우 번거로운 제도다. 작가 이만교는 결혼은 미친 짓이라고 했던가? 나는 결혼이 미친 짓이라고 생각하지 않는다. 그저 내가 ‘미친놈’하고 결혼했을 뿐이다. 


이 남자와 살려면 내가 그의 몫까지 정신을 차려야 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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