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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제니아 Aug 23. 2023

<퀴어마이프렌즈>를 보고

빛나는 그들의 우정. 그리고 나와 친구들.



"나는 그들만큼 하나님을 사랑하지는 않는 거 같아." 친구들과 <퀴어 마이 프렌즈>를 보고 난 뒤 내 입에선 이런 말이 튀어나왔다. 퀴어이면서 하나님을 믿는 주인공 강원, 그리고 그의 세계를 담는 감독 아현의 서글프고 아름다운 7년 여정의 다큐멘터리를 보고 든 생각이었다.


나는 그렇게까지 치열하게 하나님을 믿을 필요가 없었다. 교회 공동체 안에서 내 존재는 의심 없이 받아들여졌고 하나님의 사랑에는 의문이 없었으니까. 내가 믿는 하나님이 곧 공동체가 믿는 하나님이라는 자신도 있었다. 그 자신감이 깨진 건, 강원과 아현이 처음 만났던 (영화에 아주 잠깐 언급되는) 그 작은 기독교 대학에서였다.


그 작은 학교가 세상의 전부이던 시절, 나와 친구들은 다양한 사건을 보고 겪었다. 그즈음부터 하나님이 조금 더 간절해졌다. 내가 믿는 하나님이 모두를 사랑하는 하나님이길 간절히 바람과 동시에, 설령 아닐 수도 있다는 두려움도 마주했다. 해결되지 않는 어떤 상황을 목도할 땐 역시 그런 분이셨군 하며 하나님을 미워했지만, 그가 우리를 조건부로 사랑하시지는 않을 거라는 강한 믿음에 사로잡힐 때도 있었다. 하지만 무엇도 확신할 수 없어 대부분은 슬펐고 친구들과는 주로 죄책감과 무력감에 대한 감정을 나누었다.


그렇게 졸업을 했다. 세상에 나오니 현실적인 문제들이 산적해 있었고 남 생각할 겨를이 없었다. 암울한 뉴스들이 쏟아졌지만 엄연히 말하자면 내 이야기는 아니었고, 가만히 있어도 우울할 때라 내 에너지를 빼앗기고 싶지 않았다. 나를 향한 하나님만 생각하면 차라리 맘이 편했다. 현실의 문제들은 있지만 그분이 날 사랑하지 않으실 거란 의심은 없었으니까. 그냥 그렇게 살다가 이 영화를 만난 것이다. '하나님이 이런 나를 사랑하실까?'에 대한 두려움을 고백하는, 여전히 존재 그대로 교회 공동체나 대한민국 사회에서 인정받지 못하는 강원, 그리고 그의 친구 아현의 이야기를.


두 사람이 처음 만난 그곳의 이야기가 나올 때 움찔했고, 친구들이 화면에 잡힐 때는 몸이 가려운 느낌마저 들었다. 아현과 강원의 관계에서 나를 보고, 내 친구들이 보였다. 좁은 원룸에 다닥다닥 붙어 누워서 시답잖은 수다나 떨며, 틴더나 소개팅에 대해 이야기하고, 식탁 위에 올라와있는 먹다 남은 호가든 캔, 옥상에서 담배 피우는 뒷모습, 이곳 서울에 우리 자리가 있을까? 체념하던 소리들, 이런 내 밑바닥을 보여주고 싶지 않다며 소리치다 터지는 눈물. 이런 것들은 나와 친구들의 이야기와 다름없었다.


그리고 2시간 동안 강원과 아현은 나를 5년 전 끈적끈적한 식탁이 있던 학관 구석, 두부김치가 맛있던 양덕의 호프집, 그리고 좁디좁은 장성동 원룸으로 데려다 놓았다. 우리가 무엇을 할 수 있냐고 묻던 친구의 목소리가 다시 들렸고, 나의 잘난척하는 낮과 성찰하는 밤 사이에서 괴로웠던 나날이 생각났고, 그 와중에 위로가 되어준 친구들 얼굴들이 떠올랐다. 마치 누가 알려주기라도 하는 듯 친절하게 모든 것이 떠오른 것이다. 네가 있던 곳은 거기야, 네가 이런 말을 했고, 이런 행동을 했단다. 이런 잘못도 했고 이런 철없는 생각도 했었어. 정말이지 괴로웠고 반가웠다.


그래서 영화를 보는 내내 눈물이 났나 보다. 자꾸 나와 친구들이 겹쳐 보여서. 하나님을 사랑해서 괴로웠던 우리의 날들이 떠올라서. 나 지금 하나님이 너무 편해졌다는 사실에 죄책감이 느껴져서. 하지만 돌아가고 싶지는 않아서.


영화를 보고 난 지금, 여전히 혼란스럽다. 삶이 바쁘고, 당사자가 아닌 사람으로서 어디까지 말할 수 있는지, 내 행동에 의미가 있는지, 그저 내가 분노의 대상을 찾고 싶어 하는 게 아닐까 싶기도 하다. 인풋은 많은데 정리가 되지 않는 기분이다.


그런 내게 "지옥까지 같이 가줄게"라는 아현의 웃음 섞인 한마디는 많은 감정을 느끼게 한다. 나도 다시 그런 마음이 들까. 영화를 보고 나서 영혼이 이끄는 것을 택해야겠다는 결심이 섰다. 모르긴 몰라도 같이 훌쩍이며 영화 봤던 친구들이 내 곁에 있고, 위선자나 잘난 체 하는 자라는 평가를 받을까 두렵지만 나는 어느 정도 그런 사람이라 어쩔 수 없다. 


난 보기 좋게 감추거나 세련되게 표현하지는 못하지만 계속 뭔가를 쓰거나 말해야 하는 사람이고, 그 일의 동력에는 분명히 분노가 있다. 나도 이런 나를 인정하겠다. 내게 '무언가 하고 있다'는 안도감을 주는 동시에 불편해서 떠나고 싶은 그 자리를 찾아보겠다. 솔직히 자신은 없지만 이 글을 쓰기 전과 후의 내가 달라지면 좋겠다. 강원과 아현이 용기를 주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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