단편 소설(short story)
1화 크리스마스 이브날의 문단속
크리스마스이브인 오늘 일기예보엔 정오 무렵부터 강한 바람을 동반한 눈이 내릴 것으로 예보돼 있었다. 원더풀 제약회사에 입사한 지는 일 년이 됐다. 오늘은 월차로 휴무였다. 웨이브에서 <스즈메의 문단속> 이란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어제 여사친인 주희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약속 없으면 같이 퇴근 후 저녁이나 먹자며 연락해 왔다.
ㅡ연남동 경의선 숲길에 있는 일본식 돼지고기 꼬치구이 식당 어때? 그녀는 친구가 추천해 준 맛집이라고 했다.
ㅡ집돌이인 나를 기어이 끄집어내야 네 직성이 풀리지. 주희와의 저녁 약속 생각에 기분이 설렜다. 연말인데 여자 친구가 없어 기분이 우울해지려던 참이었는데. 구원투수처럼 나타난 그녀의 연락이 반가웠다.
오피스텔에서 차를 몰고 오후 5시 반쯤 여유 있게 나갈 생각이었다. 샤워하려고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휴대전화 문자 알림이 울렸다. 송내 북부역 근처 바스(VAS) 정형외과 윤 원장님 메시지였다.
'인영 대리. 이따 저녁에 말이야. 친구들이 와인 한잔하고 싶다는데. 와인이랑 곁들여 먹을 안주 준비해 줄 수 있을까.'
새로 뚫은 거래처 원장님의 부탁이라 대놓고 무시할 수 없었다.
'와인이랑 안주를 사 가는 거야 문제가 안 되는데, 주희와의 저녁 약속은 어떡하지'
화장실 세면대의 물을 틀어놓은 채 잠시 망설였다. 곧바로 대답이 없자, 윤 원장님에게 다시 문자가 왔다.
'바쁘면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안녕하세요. 원장님. 샤워 중이라 메시지 확인이 늦었습니다. 지금 바로 전화드리겠습니다.'
ㅡ원장님 즐겨 드시는 와인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건조한 입술에 각질이 일어났다. 잡아 뜯으려니 입술이 아파 그만두었다.
ㅡ병원 일만 잘하지. 와인에 대해선 자네보다 문외한이야. 그런데 자네 시간 뺏는 거 아냐? 오늘 크리스마스이브라 데이트 약속도 있을 텐데.
ㅡ괜찮습니다. 아직 여자 친구가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데이트 약속이 있을 걸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주희는 할 수 없지 않으냐며 괜찮다고 했다. 쿨한척했지만, 전화 통화하는 목소리는 실망한 눈치였다.
'나만큼 그녀도 저녁 약속을 기다렸나 본데.....' 주희의 목소리에 평소와 달리 서운함이 묻어났다.
스즈메만 문단속을 잘해야 할 게 아니라 나도 뒷문 단속을 잘해야 했다. 오프 하루 전날이라도 카톡 프사에 푸껫에서 찍은 수영복 사진이라도 올려놓았어야 하는 건데. 이미 미미즈는 문을 열고 꿈틀거리면서 솟아올라 나를 향해 거대한 몸뚱이를 드러내며 드러눕고 있었다.
단골세탁소에 전화해 양복 드라이클리닝이 끝났는지 물었다.
ㅡ다됐습니다. 찾아가셔도 됩니다.
ㅡ네. 고맙습니다.
'참, 세탁소 사장님은 부지런하셔.' 입고 갈 양복이 준비돼 있어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가고 싶지 않은 자리에 억지로 떠밀려 가야 하는 상황이 영 내키지 않았다.
때마침 연말 이마트와인 클리어런스 행사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와인에 대해 잘 모를 땐 종류별로 각각 한 병씩, 그리고 가성비갑인 제품을 직원에게 추천받으면 그만이다. 이마트에 들러 코노 소비뇽 블랑 화이트 와인 한 병, 까스텔 로쉐 마제 까베르네 소비뇽 레드 와인 한 병, 셋 중에서 가장 비싼 샴페인 도르 브뤼 한 병과 다회용 플라스틱 와인잔을 구매했다.
ㅡ와인 에어레이터와 와인, 잔은 준비됐고. 와인과 잘 어울리는 안주는 뭘 사면 되나요?
ㅡ취향에 따라 다르긴 한데, 보통 4~5인용 델리스 치즈 플래터 스페셜세트를 보통 추천해 드리긴 해요. 몇 분이 드세요?
경황이 없어서 윤 원장님을 포함해 몇 명의 친구분이 모이는지를 물어보지 않았다.
ㅡ그냥 델리스 세트 하나 주세요. 세트 안에 프레지던트 살구 아몬드 과일 치즈는 몇 번 먹어본 적이 있다. 먹다 보면 살구, 아몬드, 코코넛 과육이 씹혔다. 촉촉하고 고소해서 마음에 들었다.
바스 정형외과에 도착해서 원장님께 몇 분인지 여쭤보고 부족하면 근처 마트에 얼른 다녀올 생각이었다.
2화 바스 정형외과 송년 모임
윤 원장님은 저녁 8시면 친구들과 와인 모임이 끝날 거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50대 남자 원장들도 아줌마들 못지않게 수다스러웠다.
ㅡ오늘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는데, 인영 대리도 한잔해야지.
ㅡ차를 가지고 와서요. 원장님.
ㅡ운전 때문에 맛있는 와인을 포기해서야 쓰나. 여기 있는 원장들도 다 대리운전해서 갈 거야. 크리스마스이브에 한잔 정도는 괜찮아. 건네준 잔에 담긴 와인을 보니 차를 구입하면서 부모님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지만, 모두의 시선이 쏠려 있어서 와인잔을 비워야 했다.
'차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절대 술을 입에 대서는 못쓴다.' 아버지는 15년 버스 운전을 하시는 동안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으셨다. 제약회사에 합격하고 투싼 차량을 구입할 때 부모님은 적금을 깨서 2,000만 원을 보태주셨다. 동네 친구들은 새 차를 샀으니 돼지머리에 고사도 지내고 차에 막걸리도 부어야 사고를 면한다고 겁을 줬다. 미신에 휘둘리기 싫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일어날 사고는 어차피 일어날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바스 정형외과를 나온 시간은 밤 9시가 다 돼서였다. 병원 미팅룸을 대충 정리하고 쓰레기를 담은 20L 종량제 봉투를 버리기 위해 1층에 내려왔다. 도로 위에 쌓인 눈이 10cm는 돼 보였다. 바람까지 휘몰아쳐서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종종걸음으로 미끄러운 빙판길을 피해 보도 위를 걸어갔다. 정오부터 내린 눈이 얼어서 도로 위는 군데군데 결빙 상태였다. 시청 제설 차량이 염화칼슘을 뿌리며 지나갔고 그 뒤에 연막소독차를 따라 달리는 아이들처럼 차들이 줄지어 달렸다. 휴대전화에 폭설 주의보와 한파주의보 재난 문자가 올라왔다. TBN 한국교통방송에서는 블랙 아이스에 대비해 자동차를 서행운전 하라고 당부했다. 병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주희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뭐 해?'
'연남동 경의선 숲길에서 커피 마시고 있어. 이제 끝났구나.'
'병원 주차장이야.'
'이쪽으로 올래? 커피 사줄게.'
그녀만 괜찮다면 크리스마스 아침을 그녀와 함께 맞이하고 싶었다. 눈 내리는 경의선 숲길을 마냥 걷고 싶었다. 같이 커피를 마신 후에 카페를 나서면서,
'우리 집에서 넷플릭스 보고 갈래?' 이렇게 말하면 주희가 뭐라고 말하려나. 혹시 몰라서 방 청소를 하고 나오긴 했다. 벌써 저녁 9시 20분인데,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그녀에게 그런 말을 꺼낼 수나 있을지. 붙잡지 못한 시간은 모래시계의 좁은 통로를 따라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송내 IC에서 서울 방향 고속도로 진입로는 이미 차량정체가 시작돼 있었다. 도로 위에 차라도 적던지, 아니면 눈이라도 내리지 말아야 하는데. 영화에 공간 이동 능력자가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웜홀(worm hall)이 눈앞에 열린다면 연남동으로 순간 이동하고 싶어졌다.
차들이 지체되는 걸 보니 분명 앞쪽에서 접촉 사고가 났음이 분명했다. 고속도로로 진입해 보니 도로 보수공사 작업차들이 1차선에 길게 가드레일을 세워놓고 공사 중이었다. 1차선에서, 2차선으로 가드레일의 범위가 넓어지자, 차들은 덜 막히는 차선을 찾아 부지런히 방향지시등을 켜고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나는 앞차들을 따라 2차선에서 3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하려다가 앞차가 멈추는 바람에 어정쩡하게 2차선과 3차선에 걸쳐 있었다. 잠시 후 후미 쪽 2차선을 달려오던 차량이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미러로 보고 있으려니 이건 무조건 들이 받힐 상황이어서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간발의 차이로 접촉 사고를 면한 카니발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소리를 질렀다.
ㅡ야 인마, 너 도로 전세 냈어? 카니발 운전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씩씩거렸다. 조수석에 앉은 여성이 뜯어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매어놓은 목줄을 풀어줄 주인을 하루 종일 기다린 똥개처럼 튀어나오려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ㅡ미안합니다. 나는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살짝 고개를 내밀어 사과했다. 별것 아닌 일에 불같이 화를 내는 남자에게 똑같이 대들었다간 시비가 붙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차선 변경하는 중에 가로막혀서 있던 건데.'
창밖으로 왼손을 들어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앞에 정체돼 있던 차들이 공사 구간을 빠져나가면서 차들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3차선으로 차선 변경하고 속도를 높였다. 2차선에서 뒤를 바짝 따라붙은 흰색 카니발이 신경 쓰였다. 카니발 차주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액셀러레이터를 급가속하며 앞질렀다가 다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보복 운전을 반복했다.
ㅡ저 미친놈이. 덜컥 겁이 나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도 거칠어졌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2차선을 달리던 흰색 카니발은 전방에 접촉 사고로 멈춰있던 택시와 BMW 차량을 피하려고 급하게 핸들을 우측으로 꺾었다. 블랙 아이스 위에서 미끄러진 카니발이 팽이처럼 뱅글뱅글 돌더니 3차선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손써볼 틈도 없이 내 차의 좌측 후미를 들이받으며 멈춰 섰다. 카니발 보닛에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펑'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내 차는 무게중심을 잃고 한 바퀴를 구르며 전복되면서 에어백이 터졌다. 추돌하는 순간 공차 중량만 2,100kg이 넘는 카니발의 육중한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차체가 우그러지면서 유리창이 깨져서 파편이 날렸다. 선루프가 깨지면서 아스팔트 바닥에 긁히는 소리. 타이어가 마찰하면서 나는 고무 타는 냄새. 유리 파편에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두려움이었다.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인간의 뇌는 사고나 죽음을 앞둔 극한의 상황에 놓이면, 살아온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했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은 뇌가 생존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수많은 기억을 스캔하는 거라고 말했다. 다른 의견은 공포 상황을 최소화하려고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 뇌의 도파민 분비를 돕기 위한 현상이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후배 용택이도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ㅡ형,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횡단보도 건너다가 음주 운전 뺑소니 당했잖아.
ㅡ그때 한 달간 의식이 없었지. 너희 어머니 우리 집에 와서 아들 식물인간 되면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매일 울다 가셨는데.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난 거야?
ㅡ뭐 그냥. 그때 생각이 나네. 정말 거짓말하나 안 보태고, 내가 여태 살아온 인생이 오래된 영화필름처럼 눈앞으로 주르륵 지나가면서 다 보이더라니까.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게 나한테 일어나니까 되게 신기했어.
내가 타고 있던 갈색 투싼 차량이 뒤집히던 순간에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 기억이 스치듯 먼저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성경학교 둘째 날, 율이 누나와 함께 보냈던 하루의 기억이었다.
3화 율이 누나
2006년 8월 11~12일 사이에 강대 교회 여름성경학교가 열렸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동네 후배 용택에게 빨간색 스쿠터를 빌려 타고 강대 교회로 갔다. 5학년이 되었으므로 어린애같이 자전거나 타고 다닐 순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오토바이 면허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용택이의 장래 희망은 군산 시내에 멋진 오토바이 대리점을 여는 것이었다. 그런 용택이의 원 포인트 레슨이면 충분했다.
ㅡ형, 오른쪽 액셀을 아래 방향으로 돌리며 당기면 앞으로 나가고, 이렇게 브레이크를 잡으면 멈춰 서는 거야.
스쿠터 운전법은 용택이 말마따나 식은 죽 갓 둘러 먹기처럼 쉬웠다.
예전 강대 교회 출입문 안쪽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녹슨 철제 탑이 서 있었다. 5m 높이의 꼭대기에 종이 매달려 있었다. 미영이 아빠 방 집사님은 강대 교회 관리 집사님이셨다. 교회 청소, 전기, 수도를 관리하시면서 예배 시간에 맞춰 종을 치셨다.
신축한 강대 교회는 내가 주일학교 4학년이 되던 해에 완공되었다. 전면 중앙에 예배당 출입로와 계단 그리고 낮은 아치형의 둥근 지붕은 대리석으로 마감했다. 양측을 적벽돌로 외벽을 두른 직사각형 형태의 구조물 뒤로 본관이 이어졌다. 가운데 지붕 위에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전면부 직사각형 위로 솟아 있는 원추형 첨탑 끝에 두 개의 십자가가 달려 있었다. 교회 앞마당을 지나 뒤쪽으로 걸어가면 왼편에 목사관과 오른쪽엔 교인들이 사용하는 조립식 자재로 지어진 식당이 보였다.
동네 이장님인 아빠는 오늘 옆집 덕배 아저씨 큰딸 결혼식에 가셨다. 엄마와 전주에 나가신 김에 자취하는 형을 만나 저녁을 드시고 오신다고 하셨다. 주영이 형은 대학교 졸업반이었다. 율이 누나는 내가 초등학교에 1학년일 때부터 우리 집에서 세 들어 살게 되었다. 2002년 5월 31일 FIFA 월드컵이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열린 날, 나는 동네 어귀 아카시아 아래에서 율이 누나를 처음 만났다. 아빠와 배 씨 아저씨는 군산 시내에서 같이 버스회사에서 일했다. 누나의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비며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아파트까지 팔게 되었을 때, 남는 방이 있으니 우리 집에서 함께 살자고 아저씨를 설득한 사람이 우리 아빠였다. 2005년 여름에, 누나의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저씨는 버스회사를 그만두셨다. 성실한 버스 운전사였던 아저씨는 택시회사로 직장을 옮기고 나서, 세상에 더는 미련이 없는 듯, 술과 도박에 손을 대셨다.
율이 누나는 작년에 익산 보건대학 간호학과에 합격했다. 그녀는 학기 중에는 통학하기가 불편해서 익산 원광대학교 대학로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딸에게 무관심한 아저씨를 대신해서 엄마가 누나의 자취방을 알아봐 주고 전세 계약도 해주셨다. 수업이 끝나면 그녀의 친구들이 동아리 활동이며 소개팅이며 학교 축제에 놀러 갈 때 누나는 밤늦게까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해야 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하면서도 우리 엄마, 아빠, 내 생일은 잊지 않고 챙겼다. 엄마가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다.
-율이야, 네가 힘들게 몸으로 일해서 번 돈 그렇게 허투루 쓰면 안 된다.라고 말려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술과 도박에 빠진 배 씨 아저씨가 술에 취해 돈을 내놓으라고 누나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지 애미 잡아먹은 년.
돈이 없다고 버티는 누나에게 배 씨 아저씨는 욕설을 퍼부었다. 누나의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진 게 인정머리 없는 딸년을 뒷바라지하다가 생긴 거라고 말했다. 술 취한 배 씨 아저씨의 술주정에도 누나는 슬픈 눈으로 아저씨가 잠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일요일 밤이 돼서, 누나가 익산 자취방으로 돌아갈 때면 부모님은 승용차 트렁크에 쌀이나 밑반찬, 채소와 과일 등을 싣고 그녀를 데려다주곤 했었다.
4화 강대 교회 여름성경학교
이번 여름 성경학교에서 5학년 담당은 배율이 선생님이셨다. 8월 12일 교회에서 만난 누나는 흰색과 검정 체크무늬 치마에 오렌지색 U자형 반팔 티셔츠와 연두색 긴팔 카디건을 입고 있었다. 주일 학교를 담당하는 목사님의 설교 말씀이 끝나고 5학년 아이들은 분반 공부 모임을 하러 배율이 선생님 앞으로 모였다.
ㅡ오늘은 조금 덥지만, 교회 밖으로 나가서 분반 공부할까?
ㅡ예배당이 시원하고 좋은데.... 준필이는 앉은 채로 투덜거렸다.
ㅡ그냥 밖으로 나가자 준필아. 안에만 있었더니 답답해 죽겠어. 서준이가 준필이를 일으켜 세웠다.
율이 선생님과 아이들은 교회 앞 연두색 기와지붕을 이고 있는 정자를 향해 걸어갔다. 잠시 걷는데도 무더운 날씨와 강한 햇살 때문에 눈살이 찌푸려졌다. 미영이는 정자로 나 있는 좁은 논둑을 따라 걷는 동안 선생님의 손에 매달리다시피 걷고 있었다. 불청객의 발걸음에 개구리들이 개울로 뛰어들며 여기저기서 퐁당 소리가 났다. 그때마다 미영은 놀라 비명을 질렀다.
ㅡ아휴, 징그러워. 그녀가 질러대는 소리에 놀라 황소개구리가 시끄럽게 울어댔다. 논둑을 따라 심은 콩잎 위에선 방아깨비, 청개구리, 방귀벌레가 보호색을 믿고 은신해 있었다. 붉은색 딱지날개를 지닌 칠성무당벌레는 초록색 활주로를 따라 느릿하게 움직였다.
동네에서 지은 정자지만, 농번기에는 비어 있으니 잠깐 이용해도 문제 될 건 없었다. 정자 주변을 따라 해자(a moat)를 두른 듯 초록 잎의 벼들이 일정한 간격으로 자라고 있었다. 선생님은 손수건을 꺼내 아이들이 앉을자리를 닦았다. 희수가 천장 중앙에 매달린 선풍기 줄을 잡아당겼다. 선풍기는 천천히 회전을 시작했다. 선풍기가 선생님 쪽으로 회전할 때마다 향긋한 아카시아 향이 바람을 따라 움직였다. 아카시아 향은 선생님의 엄마가 생전에 좋아하시던 향수라고 말했다.
미영이는 선생님의 왼편에 찰싹 붙어 앉았다. 그 옆에 서준이가 앉고 나머지 아이들이 둥글게 둘러앉아 성경책을 펼쳤다.
ㅡ구약에는 핍박당하고 고통받은 선지자들이 있습니다. 어떤 선지자들이 있죠? 누가 말해볼까? 희수가 손을 들었다. 희수의 아빠는 강대 교회 시무 장로님이셨다. 희수의 장래 희망은 목사님이었다.
ㅡ예레미야, 엘리야, 다니엘, 아모스 선지자가 있습니다. 희수의 대답에 아이들의 입에서 '와'하는 탄성이 흘러나왔다. 선생님도 생각지도 못한 희수의 대답에 놀란 표정이었다.
ㅡ오늘 분반 공부가 끝나면 이번 여름성경학교 퀴즈왕을 뽑을 거야. 선생님은 우리 반에서 일 등이 나왔으면 좋겠다. 오늘 공과 말씀에서도 퀴즈가 나올 거니까. 우리 돌아가면서 한 절씩 읽어보자.
ㅡ열왕기상 19장 4절~8절 말씀이지. 준필이부터.
ㅡ4 자기 자신은 광야로 들어가 하룻길쯤 가서 한 로뎀 나무 아래에 앉아서 자기가 죽기를 원하여 이르되 여호와여 넉넉하오니 지금 내 생명을 거두시옵소서 나는 내 조상들보다 낫지 못하니이다 하고
ㅡ5 로뎀 나무 아래에 누워 자더니 천사가 그를 어루만지며 그에게 이르되 일어나서 먹으라 하는지라
ㅡ6 본즉 머리맡에 숯불에 구운 떡과 한 병 물이 있더라 이에 먹고 마시고 다시 누웠더니
ㅡ7 여호와의 천사가 또다시 와서 어루만지며 이르되 일어나 먹으라 네가 갈 길을 다 가지 못할까 하노라 하는지라
ㅡ8 이에 일어나 먹고 마시고 그 음식물의 힘을 의지하여 사십 주 사십 야를 가서 하나님의 산 호렙에 이르니라
ㅡ열왕기상 18장에는 엘리야가 갈멜산에서 아합의 왕후 이세벨이 섬기는 바알선지자 450명을 기손 시내로 내려다가 죽이고 왕후 이세벨은 아합으로부터 그 얘기를 듣고 내일 이맘때에 엘리야의 죽이겠다고 말하지. 그러자 그 말을 전해 들은 엘리야는 도망하여 유다에 속한 브엘세바에 이르게 되었어.
ㅡ엘리야는 바알 선지자를 혼자서 450명이나 죽여놓고 왜 도망갔어요? 나는 슈퍼 파워를 가진 엘리야가 도망했다는 말에 그 이유가 궁금했다. 공과시간이 따분한 미영이는 선생님에게 아이스크림을 사달라고 졸랐다.
ㅡ막상 나와보니 정자가 좀 덥네. 선생님은 지갑에서 오천 원을 꺼내 미영이에게 내밀었다.
ㅡ바보야, 살려면 도망가야지. 엘리야라고 별 수 있어. 미영이 오천 원을 냉큼 낚아채며 말했다. 미영이를 짝사랑하는 서준이도 덩달아 따라 일어섰다.
선생님은 예수님께 감사기도를 하고 미영이와 서준이가 사 온 아이스크림을 아이들에게 나눠줬다.
ㅡ엘리야가 바알 선지자 450명을 죽이고 영적인 승리를 거둘 수 있었던 건 여호와 하나님을 의지하여 나갔기 때문이야. 하지만 이전에 많은 여호와의 선지자들을 죽인 이세벨의 협박에 두려움을 느끼고 무너져 내린 것 같아. 고난이 닥치면 우리가 아주 작고 연약한 존재란 걸 깨닫게 돼. 그때가 바로 겁을 집어먹고 두려워져서 스스로 움츠러드는 순간이야. 용감했던 엘리야 선지자도 그랬던 거 같아. 미영이, 인영이 서준이, 준필이, 희수도 그런 때가 오면 엘리야처럼 예수님께 담대하게 나아가 기도하는 용사가 되었으면 좋겠다. 오늘의 공과 말씀은 이걸로 끝.
미영이는 막대 아이스크림을 다 먹자마자 앞으로 꾸벅꾸벅 졸기 시작했다. 그러다 제풀에 놀라 눈을 크게 떴다. 율이 선생님은 졸린 미영이를 체크무늬 치마 위로 눕혔다. 교회 앞마당은 소나무, 벚나무에 매달린 매미들이 짝짓기 하느라 소란스러웠다. 준필이는 콩밭에 내려가 사마귀 두 마리를 붙잡아 돌아왔다. 준필이의 손에 잡힌 사마귀를 보고 서준이와 희수가 신나서 다가갔다. 세 아이는 정자 한쪽 구석에서 사마귀 두 마리를 싸움시키고 있었다.
율이 선생님은 다리가 저린지 잠들어 있는 미영의 머리를 조심스레 들어 정자나무 바닥에 개켜 놓은 카디건 위에 내려놓았다. 나는 선생님의 맞은편에 앉아 있었는데, 선생님은 아이들이 버린 아이스크림 비닐포장지와 아이스크림 막대를 주워 담고 있었다. 헐렁한 오렌지색 반팔 티셔츠 너머 가슴골이 보이고, 잡티 하나 없이 하얀 살결의 젖가슴이 보였다. 그녀는 브래지어를 하고 있지 않았다. 선생님의 가슴을 훔쳐보았다는 죄책감이 밀려왔다. 그녀는 사마귀를 갖고 노는 아이들에게 이제 예배당으로 돌아가자고 말하며 잠든 미영이를 흔들어 깨웠다. 미영이가 깨어날 기미가 없자 등에 업혀달라고 말했다. 희수와 나는 미영이를 부축하여 선생님 등에 업혀줬다.
5화 성경학교 퀴즈대회
예배당 본당에 아이들과 선생님들이 모여들었다. 아이들에게 여름 성경학교의 하이라이트일 수 있는 성경 퀴즈대회의 막이 올랐다. 나는 말씀 카드를 외우는 중이었다.
'퀴즈대회에서 일 등 하면 선생님이 좋아할 텐데.'
말씀 카드를 다 외우기에는 시간이 너무 부족했다. 어제 성경학교가 끝나고 용택이의 꼬드김에 넘어가 낚시를 따라간 게 실수였다.
초등부 부장님이신 오금란 선생님이 마이크를 들고 성경 퀴즈대회의 진행을 맡으셨다.
ㅡ첫 문제는 O, X 퀴즈입니다. 선생님의 말씀이 맞다고 생각하면 오른쪽으로 모이고, 틀렸다고 판단되면 왼쪽으로 모이면 됩니다. 정답을 틀린 학생들은 뒤쪽으로 이동합니다. 문제 나갑니다.
'사도행전을 쓴 사람은 바울이다.' 바울이 썼다고 생각하면 오른쪽, 틀렸다고 판단되면 왼쪽으로 모이세요. 선생님들은 정답을 알려주시면 안 됩니다.
몇 명의 아이들이 갈팡질팡하다가 오른쪽에 모였고 대부분의 아이는 왼쪽에 남아있었다.
ㅡ셋, 둘, 하나. 자, 정답은 X입니다. 사도행전과 누가복음을 쓴 사람은 누가입니다. 오른쪽에 서 있는 학생들은 탈락입니다.
말씀 괄호 넣기 문제가 다 끝나자 열 명 남짓한 아이들이 퀴즈에서 살아남았다.
ㅡ여섯 번째 문제도 O, X 퀴즈입니다. 어, 이 문제는 아이들에게 좀 어려울 거 같은데. 부장 선생님은 퀴즈 문제를 출제한 김광현 선생님을 불러 잠시 이야기를 나눴다.
ㅡ주일학교어린이들에겐 좀 어려울 수 있는 문제인데, 어제 초등부 최상철 목사님 설교 말씀을 잘 들은 친구들은 정답을 맞힐 수 있다고 하네요. 자, 문제 나갑니다.
ㅡ유대인들은 하나님이 세상을 6일 동안 창조하고 일곱째 날(토요일)을 안식하신 날 (사밭, Sabbath)로 기념합니다. 하나님이 모세에게 내린 십계명에도 안식일을 기억하여 거룩하게 지키라고 하셨습니다. 그래서 우리가 드리는 주일 예배는 유대인들이 지키는 토요일 안식일이 그대로 일요일로 옮겨온 날입니다. 이 말이 맞으면 오른쪽, 틀렸다고 판단되면 왼쪽에 서주세요.
내가 먼저 왼쪽에 가서 섰다. 잠시 고민하던 희수도 왼쪽으로 건너왔다. 희수를 따라 왼쪽으로 얼떨결에 이동했던 서준이는 오른편에 서 있는 미영이가 건너오라며 손짓하자 다시 오른쪽으로 펄쩍 뛰어서 넘어갔다.
ㅡ자, 이제 다들 마음의 결정을 내린 거죠. 오른편에 서 있던 서준이와 미영이가 나와 희수를 보며 어서 넘어오라며 발을 동동 굴렀다.
ㅡ정답은.... 부장 선생님은 잠시 뜸을 들였다. 선생님들과 아이들이 한목소리로 '두구두구' 소리를 내며 기대감을 높였다.
ㅡ정답은 X입니다. 여기저기서 탄성과 비명이 들려왔다. 공과를 담당한 선생님들 사이에서도 수군거리는 소리가 쏟아졌다.
ㅡ정말 헷갈리기 쉬운 문제입니다. 유대인들의 안식일은 토요일로 하나님의 창조를 기념하는 날입니다. 주의 날인 주일은 안식 후 첫날 부활하신 예수님을 기념하기 위해 초대교회는 주일을 예배의 날로 거룩하게 구별하여 지켰다고 합니다. 따라서 유대인들이 지키는 토요일 안식일이 그대로 일요일로 옮겨왔다는 말은 틀린 말입니다. 정답을 맞힌 희수는 두 손을 번쩍 들고 기뻐했다.
부장 선생님은 희수와 나에게 스케치북과 유성펜을 각각 나눠 주었다.
ㅡ 다음은 두 개의 문제 정답을 스케치북에 적어 주세요. 첫 문제는 이스라엘 왕 아합이 결혼한 이방인 아내는 어느 나라의 누구였습니까? 두 번째 문제는 북왕국 아합왕의 아내 이세벨이 엘리야를 죽이려 하자 엘리야는 브엘세바의 광야로 피신하였습니다. 그곳에 있던 엘리야에게 천사가 나타나 음식을 먹인 후, 이곳으로 가게 했습니다. 엘리야가 40일을 걸어서 도착한 이곳은 어디입니까?
자, 두 어린이. 다 적었으면 스케치북을 들어 정답을 보여주세요.
희수와 나는 스케치북을 머리 위로 높이 들었다.
ㅡ정답은 시돈의 이세벨 그리고 호렙 산입니다. 두 친구 모두 정답입니다.
자, 이제 마지막 스피드 성경 구절 암송 시간입니다. 먼저 손을 들고 나와 정확하게 암송한 사람이 강대 교회 성경 퀴즈왕이 됩니다. 이제 문제 나갑니다. 로마서 12장 1절에서 2절 말씀을 암송해 주세요.
퀴즈대회 시작 전에 마지막 외웠던 암송 구절이었다. 나는 일단 손부터 번쩍 들었다. 예배당 출입문 쪽에 율이 선생님과 아이들이 모여 있는 게 보였다. 입안이 바싹 타들어 가서 물 한 모금이 간절했다. 마른침을 꿀꺽 삼켰다.
ㅡ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 마음을.... 그다음 구절부터는 머릿속에서만 맴돌고 끝내 떠오르지 않았다.
ㅡ 셋, 두울, 하아나. 부장님은 천천히 숫자를 셌다. 결국 나는 2절 말씀을 암송하지 못했다.
ㅡ안타깝네요. 나는 당황한 표정으로 율이 선생님과 희수를 번갈아 바라봤다. 청바지에 여름성경학교 티셔츠를 단정하게 넣어 입은 희수가 손을 들었다. 나는 쥐구멍이라도 숨고 싶은 심정이었다. 희수가 강대상 앞으로 걸어 나오자, 나는 풀이 죽어 원래 앉아 있던 자리로 돌아갔다.
ㅡ그러므로 형제들아 내가 하나님의 모든 자비하심으로 너희를 권하노니 너희 몸을 하나님이 기뻐하시는 거룩한 산 제물로 드리라 이는 너희가 드릴 영적 예배니라. 너희는 이 세대를 본받지 말고 오직 마음을 새롭게 함으로 변화를 받아 하나님의 선하시고 기뻐하시고 온전하신 뜻이 무엇인지 분별하도록 하라. 희수는 청산유수처럼 성경 구절을 암송해 나갔다. 희수의 목소리에 작은 떨림조차 담겨있지 않았다. 종일 로마서 12장 1, 2절만 암송한 사람처럼 막힘이 없었다.
ㅡ올 여름성경학교 성경 퀴즈왕은 5학년 조희수 학생입니다. 축하합니다. 마지막까지 열심히 퀴즈를 푼 희수와 인영이를 위해 모두 박수. 두 친구 모두 잘했어요. 이것으로 여름성경학교 퀴즈대회를 마칩니다. 배율이 선생님, 앞으로 나오셔서 아이들 퀴즈 선물 받아 가세요.
주일학교를 담당하는 최상철 목사님께서 이번 여름성경학교를 위해 수고하신 주일학교 선생님들과 아이들의 먹거리와 잠자리를 살펴주신 장로님 이하 교회 직분자들 그리고 초등부 아이들을 위해 축복기도를 해주셨다.
초등부 아이들은 자기 반 선생님과 모여 아쉬운 작별 인사를 나눴다. 분반모임하느라 예배당 안이 어수선한 가운데 예배당 출입문이 열렸다. 강대 교회 집사님과 권사님들이 아이들이 간식으로 먹을 수박과 치킨을 손에 들고 계셨다. 간식은 희수의 아빠이신 조 장로님이 후원하신 거라고 오금란 부장님이 말씀해 주셨다. 희수는 아빠에게 달려갔다. 장로님이 희수의 머리를 쓰다듬으며 안아주셨다. 수박과 치킨을 먹느라 여기저기서 웃음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입맛이 없어서 먹는 둥 마는 둥 시큰둥해했다. 얼른 용택이 집에 놀러 가고 싶었다.
주일학교 아이들이 모두 돌아가고 나는 목사님 사택 앞에 세워져 있는 빨간색 스쿠터 옆에서 애꿎은 돌멩이를 걷어차고 있었다. 율이 누나의 다급한 목소리가 뒤에서 들려왔다.
ㅡ인영아, 지금 선생님 좀 대야까지 태워다 줄 수 있니?
6화 용택이의 스쿠터
대야면까지 오토바이로 10분이 좀 넘게 걸리는 거리였다. 지금 오후 4시 10분이니까 늦어도 4시 15분이면 도착할 수 있었다. 용택이에게는 성경학교 끝나자마자 오토바이를 가져다주겠다고 약속하고 간신히 빌려온 거였다. 그런데 지금은 율이 누나 사정이 더 급해 보였다. 그녀는 스쿠터 뒤에 불안한 표정으로 앉아 있었다. 이때, 누나의 휴대 전화가 울렸다.
ㅡ네, 기백이 삼촌. 저예요.
ㅡ율아, 아빠가 내 전화는 이제 안 받는다. 지금 시장통 슈퍼에 모여 도박하는 거 같은데. 네가 좀 가봐야 안 쓰겠나. 저러다 밑천 떨어졌다고 또 음주 운전하다 걸리면... 지난번엔 파출소 장 순경이 한번 봐주고 넘어갔다만.
ㅡ죄송해요. 삼촌. 제가 아빠 찾아가 볼게요. 통화를 마친 누나의 표정이 더 어두워졌다.
ㅡ출발하자. 인영아. 근데, 너 집에 가봐야 하는 거 아냐?
ㅡ괜찮아요. 부모님은 형 자취방에 들렸다가 늦게 온다고 했어요.
스쿠터를 타고 가는 길에 집으로 걸어가는 준필이를 지나쳤다. 준필이는 어디 가냐고 뒤에서 소리쳤지만, 나는 말할 기분이 아니었다.
바람 한 줄기 불지 않는 날씨였다. 아니, 바람의 흔적조차 찾을 수 없다는 표현이 어울렸다. 아스팔트 위로 복사열이 뜨거웠다. 찜통 같은 더위에 아스팔트 위를 달리는 느낌은 대형 사우나 안에서 오토바이를 타고 출구를 못 찾아 빙빙 돌고 있는 느낌이었다.
멀리서 트랙터 한 대가 다가왔다. 용택이 아빠가 모는 트랙터였다. 짐칸을 보니 용택이가 놀란 눈을 하고 쳐다봤다.
ㅡ안녕하세요. 나는 스쿠터를 멈추고 용택이 아빠에게 고개 숙여 인사를 드렸다. 용택이가 말소리 없이 입 모양으로만 '어디 가'라고 물었다. 용택이 아빠의 표정을 살피며 똑같이 입 모양으로 '대야'라고 말해줬다.
ㅡ인영이구나. 어디 가니? 아저씨가 내가 타고 있는 빨간색 스쿠터와 율이 누나를 번갈아 쳐다보며 물으셨다.
ㅡ율이도 있었구나. 아빠는 잘 계시니? 요새 통 얼굴을 못 봤네. 안부 전해주렴.
ㅡ네, 지금 아빠 만나러 가려고요.
ㅡ그래 차 조심하고. 트랙터 운전석에 앉은 용택이 아빠가 고개를 돌려 용택이를 째려보셨다. 용택이가 트랙터 운전석 후면 유리를 힘차게 두드렸다.
ㅡ아빠, 오라이. 트랙터가 다시 출발하자 짐칸에 앉은 용택이가 이제 아빠한테 죽었다며 손 들고 벌서는 흉내를 냈다. 용택이에게 미안하게 됐다. 율이 누나 앞에서 폼나게 보이고 싶어 빌려 온 건데. 용택이 아빠 입장에서는 혹시라도 본인 소유의 스쿠터를 타다가 무슨 사고라도 날까 싶어 언짢은 표정이었다. 용택이는 집에 가면 아빠에게 혼이 날지도 모른다.
지평선 멀리까지 아스팔트 도로를 따라 좌우로 늘어서 있는 논은 초록색 물감으로 균형과 질서가 어떤 의미인지 보여주고 있었다. 차량 통행이 많은 4차선 도로로 진입했을 때 과적 차량의 클랙슨 소리 사이로 누나의 흐느끼는 소리가 귓가에 들려왔다. 나는 스쿠터의 악셀러레이터를 아래로 힘껏 잡아당길 수밖에 없었다.
7화 대박슈퍼
철길 건너 오른쪽으로 돌면 대야 재래시장 골목이었다. 누나는 전에도 이 시장 골목에 배 씨 아저씨를 데리러 온 적이 여러 번 있었다. 아빠가 픽업트럭에 누나를 태우고 나가 술에 취한 배 씨 아저씨와 돌아온 적도 있었기 때문이다. 우리 엄마는 가끔 아빠와 얘길 나누다가, 엄마 잃은 율이 누나도 불쌍하고 병으로 아내를 잃은 배 씨 아저씨도 불쌍하다며 한숨을 쉬셨다.
ㅡ얼마나 상심이 크면 저러겠냐면서도. 그래도 이제 산 사람은 살아야 하는데.
ㅡ율이를 봐서라도 배 씨가 정신을 차려야 하는데 말이야. 아버지도 동료 기사였던 배 씨 아저씨를 측은하게 여기셨다.
재래시장 골목이 끝날 즈음, 으뜸 떡방앗간 맞은편에 아모르 미장원이 보였다. 미장원과 서해 바지락 칼국수 집 사이에 슈퍼와 로또 판매점을 겸하고 있는 대박슈퍼가 보였다.
술에 떡이 된 배 씨 아저씨를 태우고 온 날 밤에 아빠는 대박슈퍼 얘길 해주셨다. 아빠 말대로라면, 거기 '대박슈퍼'는 이름대로 된다고 믿는 사람들이 담뱃진이 찌든 냄새와 여름 장맛비로 핀 곰팡내, 홀아비 냄새를 참아가며 수컷 들끼리 서로의 것을 빼앗아 먹겠다고 으르렁거리는 장소였다. 누나는 슈퍼 오른쪽 샛골목에 내려달라고 말했다.
ㅡ인영아, 누나가 들어가서 아빠를 모시고 나올게. 너는 안으로 따라 들어오지 말고 여기 기다려줄래. 그녀는 대박슈퍼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액막이 명태가 달린 출입문 종이 '딸랑'하고 울렸다. 나는 잠시 틈을 두고 조용히 가게 문을 열고 안으로 들어갔다. 대박 슈퍼 사장님 입장에서는 도박꾼들에게 골방을 빌려주는 게 화투 용어를 빌어 말하자면 일타쌍피 이득이었다. 슈퍼 손님을 받다가 골방에서 술이나 담배 주전부리 안주 그리고 라면이나 계란말이 등 간단한 식사거리 비용을 받을 수 있으니까. 방을 빌려주는 비용은 덤이었다.
슈퍼 사장님 눈치가 보여 과자를 고르는 시늉을 하며 진열대를 오갔다. 누나가 슈퍼 안쪽에 미닫이문을 열자, 안에서 메케한 담배 연기가 선풍기 바람을 타고 슈퍼로 새어 나왔다.
ㅡ이봐, 배 씨. 문 앞에 자네 딸 왔어. 어서 나가봐. 골방 안에 누나를 알아보는 사람이 있었다.
ㅡ안녕하세요. 누나는 방안의 남자들에게 고개를 숙여 인사했다.
ㅡ아, 한참 끗발 오르는데... 아저씨는 작은 체구로 까맣게 탄 얼굴에 짧은 스포츠머리를 하고 있었다. 방에서 뭉그적거리며 나오더니 바닥에 있는 슬리퍼를 짝짝이로 신었다.
배 씨 아저씨는 화신 택시 회사명이 새겨진 남색 망사 조끼 밑으로 손을 넣어 배를 북북 긁다가 문 쪽으로 비틀거리며 누나에게 걸어 나왔다.
ㅡ아빠, 한참 택시 일할 시간에 여기서 이러고 계시면 어떡해. 기백이 삼촌이 걱정된다고 전화하셨어.
ㅡ기백이 그 친구는 쓸데없이. 사람 쉬는데 스토커처럼 못살게 구네. 아빠 여태 일하다가 잠시 커피값이나 벌어볼까 하고 노는 거야. 한낮엔 더워서 택시 손님도 없어. 너는 성경학교인지 뭔지 다 끝났니? 다 끝났으면 어서 짐 싸서 익산 자취방으로 가.
ㅡ내일 오후에 갈 거예요. 아빠 여기 계속 이러고 계실 거면 택시 키 저한테 주세요.
ㅡ무슨 키를 달라는 거야. 간드러지던 아저씨의 목소리가 갑자기 거칠고 굵어졌다.
ㅡ지난번처럼 또 술 드시고 택시 운전하실 거잖아요. 누나의 목소리도 덩달아 커졌다.
ㅡ어디 딸년이 버릇없이 아빠한테 자동차 키를 내놔라 마라야. 술에 취한 아저씨가 누나의 뺨을 때렸다. '짝'하고 땀에 전 손이 뺨에 달라붙는 소리나 났다. 율이 누나의 고개가 돌아갈 정도로 큰 소리였다.
ㅡ배 씨, 왜 그래. 딸이 걱정돼서 아빠 보러 온 건데. 따님이 참아요. 참아. 아빠가 술을 좀 과하게 드셔서 그래. 슈퍼 아주머니가 배 씨 아저씨 팔을 뒤쪽으로 잡아끌었다.
ㅡ어미 없이 자란 거 동네방네 자랑이라도 하는 거냐. 계집애가 여기가 어디라고 와서 훈계질이야 훈계질이. 이제 다 컸다는 거냐. 에이, 오늘 아주 제대로 망신살이 뻗쳤네.
술주정하는 아저씨의 앞니 사이는 군데군데 까맣게 썩어 있었다. 치과에서 충치 치료받은 곳이 오히려 하얗게 도드라져 볼썽사나웠다. 놀라서 동그랗게 눈을 뜬 누나를 슈퍼 문 앞에 세워둔 채, 아저씨는 바지춤을 올리며 뒤돌아섰다. 골망 미닫이문을 열다가 넋이 나간 얼굴로 서 있는 나를 발견했다.
ㅡ어, 이게 누구야. 우리 태성이 형님 막내 도련님 아냐. 아저씨는 주머니에서 꼬깃거리는 천 원짜리 몇 장을 손에 들려주고는 들어가 버렸다. 누나의 오른쪽 뺨이 빨갛게 부풀어 올랐다. 얼굴에 빨갛게 도드라진 손자국이 보였다. 모멸감인지 서러움인지 모를 눈물이 뺨을 타고 흘러내렸다.
그녀는 아랫입술을 깨물더니 슈퍼 문을 나섰다. 나는 아이스크림 통을 열고 고드름 아이스크림 두 개를 사 들고 스쿠터로 돌아갔다. 누나는 스쿠터 옆에 쪼그리고 앉아 있었다. 나는 다가가 고드름 하나를 내밀었다.
ㅡ누나 이걸 뺨에 좀 대봐. 그녀는 말없이 고드름을 건네받아 오른쪽 뺨에 문질렀다.
ㅡ그만 집으로 가자 인영아. 스쿠터의 시동을 켜자, 누나는 오토바이 뒷자리에 앉아 고드름을 꺼내 씹어 먹었다.
오후 다섯 시가 다 돼가는데 더위는 수그러들지 않았다. 스쿠터의 시동을 켜자, 머플러에서 타다만 휘발유 냄새와 함께 검은 매연이 뿜어져 나왔다. 다시 철길을 건너 4차선 도로를 미끄러지듯 내달렸다. 돌아가는 길엔 희미한 바람의 흔적이 느껴졌다.
율이 누나는 내 등에 몸을 밀착시켜 허리를 안았다. 아카시아 향기와 땀 냄새가 한 공간에 자리를 잡았다. 내 등에 전에 없던 손과 눈, 그리고 코가 생겨났다. 내 몸의 모든 세포가 일하느라 바쁘게 움직였다.
8화 등목
율이 누나는 더위에 지쳤는지 집 안으로 들어가지도 못하고 평상에 걸터앉았다. 오히려 찜통 같은 방안보다 평상이 더 나아 보이긴 했다.
ㅡ용택이 집에서 놀다 올 게 누나. 스쿠터도 돌려줘야 하고.
ㅡ그래, 더운데 대야까지 태워다 줘서 고마워. 오늘 성경 퀴즈대회도 잘했어.
누나가 방문을 열고 들어가는 걸 보고 나는 스쿠터를 돌려 용택이 집으로 향했다. 다리 건너 파란색 슬레이트 지붕이 용택이네 집이었다. 대문이 열려 있었다. 복순이 복실이 모녀가 알아보고는 꼬리를 살래살래 흔들어댔다.
ㅡ용택아. 스쿠터 가져왔다. 큰 소리로 불렀는데도 아무런 인기척이 없었다.
'용택이 녀석 함께 놀기로 해놓고서 어디를 간 거야.' 용택이 방인 문간방을 열어보았지만, 방안에는 통기타와 기타 교본만 덩그러니 펼쳐진 채 있었다. 하는 수 없이 스쿠터를 개집 옆에 세워두고 대문을 나섰다.
다리 밑을 지나 수문 쪽으로 개울물이 흰 거품을 일으키며 콸콸 쏟아져 흘러갔다. 늦은 오후 바람이 불기 시작하면, 여름은 새로운 얼굴을 하고 나타났다. 나는 그 얼굴을 마주하고 있으면 아무런 이유 없이 이대로 집을 나가 버릴까 싶었다. 아직 해가 지기까지 두 시간 정도 남아있는 한가로운 시간을, 무얼 하며 보낼까 궁리했다. 자전거를 타고 만경강까지 가서 참게나 잡아볼까도 싶었다. 그것도 귀찮으면 어제 사 온 민물낚싯대로 손바닥만 한 크기의 떡붕어 여럿을 잡아볼까도 생각해 봤다.
우리 집 대문은 안에서 잠겨 있었다. 나는 목걸이에 매달린 열쇠를 꺼내 대문을 열고 들어갔다. 집안에 혼자 있을 율이 누나가 대문을 잠갔을 것이었다. 대문을 열고 들어가면 왼편에 우리 가족이 사는 안채가 있고 안채를 중심으로 기역 모양으로 창고와 바깥채가 나란히 붙어 있었다. 누나와 아저씨는 방 2개짜리 바깥채에서 살았다.
손재주가 있는 아빠는 바깥채 옆으로 별채를 손수 지으셨다. 별채는 아빠가 편백을 사다가 지은 것으로 여름엔 샤워장으로 겨울이면 사우나로 사용되는 건물이었다. 안채 화장실보다 넓어서 목욕하기엔 그만이었다. 특히나, 부모님이 논일이나 밭일하고 와서 더러워진 옷이나 양말, 장화를 벗고 씻은 후에 집 안으로 들어올 수 있어서 편리했다. 매년 초등학교 신체검사를 앞두고 누나는 씻기 싫어하는 나를 달래서 그곳에서 목욕시켜 주곤 했었다.
앞마당에 들어서자, 별채에서 샤워기를 틀어놓은 소리가 들려왔다. 부모님은 형 자취방에 들러 청소며 찬거리를 마련해 주시고 저녁을 먹고 늦은 밤이 돼서야 돌아오실 터였다. 배 씨 아저씨는 오늘도 도박판을 기웃거리다가 술에 취해 기사들이 쉬는 휴게실에서 잠을 잘 것이다. 집안에는 율이 누나와 나 말고는 아무도 없다는 사실에 묘한 안도감과 흥분이 밀려들었다. 나는 안채 현관문으로 다가가려다가 마당에서 길을 잃고 말았다. 발걸음을 어느 방향으로 향해야 할지 몰라 망설였다. 발끝은 현관이 아닌 엉뚱한 길로 방향을 틀었다. 나는 시골 농가에 몰래 들어와 말린 고추나 쌀, 개를 훔치러 온 좀도둑처럼 발소리를 내지 않기 위해 숨죽여 걸었다. 소리를 내지 않으려고 조바심을 낼수록 몸의 균형을 잡기가 어려웠다. 노란색 개나리꽃에 앉아 있는 배추흰나비를 잡을 때처럼 별채로 살금살금 다가갔다.
'맙소사, 너 지금....'
샤워장으로 향하는 발걸음을 하나 뗄 때마다 신경은 온통 별채 출입문에 닿아 있었다.
'닐 암스트롱이 달 표면을 걸을 때 이런 기분이었을까'
말도 안 되는 상상을 하며 한 걸음 또 한 걸음 내딛다 보니 어느새 별채 앞이었다.
자세를 낮추고 몸을 숙이자 노송나무의 피톤치드 향이 코를 자극했다. 나는 노송나무 널빤지의 옹이가 떨어져 나간 작은 구멍을 발견했다. 그 작은 구멍은 우주를 유영하고 있는 율이 누나를 바라볼 수 있는 창문이었다. 밤하늘에 고고하게 떠 있는 둥근 보름달을 볼 때 느꼈던 기분과도 흡사했다. 밝게 빛나는 달이란 구멍을 통과하면 우주선을 타고 우주여행을 떠날 수 있을 것 같았다.
두 개의 샤워기가 보였고 누나는 왼쪽 벽면에 설치돼 있는 샤워기를 사용 중이었다. 어깨선까지 자라있는 머리를 샴푸로 감은 후 씻어내고 린스로 다시 헹구고 있었다. 그리고 바디워시 거품을 품은 망사타월로 목과 젖가슴과 겨드랑이 팔과 배를 순서대로 문질렀다. 이어서 사타구니와 다리, 발등에도 거품 옷을 입혔다. 샤워기에서 쏟아지는 물줄기가 거품 옷을 벗겨내자, 주광색 조명 아래 누나의 탄력 있는 하얀 엉덩이와 젖가슴이 드러났다. 나는 만화경에서 눈을 뗄 수 없었다.
길고 하얀 손가락에 들린 수건으로 젖은 머리를 말리고 몸의 물기를 닦아 나갔다. 나는 몸을 돌려 이번엔 노련한 경보 선수가 되어 잰걸음으로 현관 출입문 앞에 섰다. 누나가 샤워실 문을 열고 나왔을 때 현관 출입문으로 막 들어가려던 참이었다.
ㅡ일찍 왔네? 누나는 수건을 머리에 두른 채 큰 샤워 타월로 몸을 감싸고 있었다.
ㅡ택이가 아빠 일 도와드리려 나가야 한대서... 나는 말을 얼버무렸다.
ㅡ인영아. 오랜만에 누나가 시원하게 등목해 줄 게. 한낮에 돌아다녀서 땀 냄새 많이 날 거야.
샤워장 안에 아직 샴푸와 바디워시 향이 남아 있었다. 시원하고 상쾌한 기운이 감돌았다. 벽면 유리와 바닥 타일에는 물기가 깨끗이 제거돼 있었다. 나는 흰색 교회학교 단체 티를 벗어서 세탁 바구니에 던져 넣었다. 편백나무 벽채에 나 있는 구멍으로 빛이 희미하게 새어 들어왔다. 그녀는 손바닥에 샴푸를 덜어 내 거품을 내고는 머리를 북북 문질렀다.
ㅡ누나가 너 초등학교 들어갈 때부터 목욕시켜 준 거 기억하니? 나는 부끄러워서 말없이 고개만 끄덕였다.
누나의 엄마가 뇌출혈로 병원에 입원해 계셔서 보호자인 배 씨 아저씨는 주로 버스 일이 끝나면 병원에서 지내는 시간이 많았다. 주말에는 누나가 교대로 병원에 다녀왔다. 우리 엄마는 누나를 친딸처럼 편하게 대해주셨다. 누나는 우리 엄마를 이모라고 부르며 잘 따랐다.
ㅡ등목까지 하니까 시원하지. 씻고 누나 방으로 들어와. 머리 말려줄게.
잠시 후 누나의 방에서 헤어드라이어를 사용하는 요란한 소리가 들려왔다. 나는 속옷을 벗고 샤워기를 틀었다. 등목을 했는데도, 금세 몸에 열이 달아올랐다. 샤워기 물을 틀어놓은 채 눈을 감았다. 조금 전까지 이 자리에서 샤워하던 누나의 모습이 눈앞에 떠올랐다. 물방울이 돼서 누나의 목덜미를 타고 가슴과 잘록한 허리를 지나 엉덩이 위로 흘러내리고 싶었다. 하얗고 가느다란 손등에 입맞춤하고 나서 누나를 꼭 안아 위로해 주고 싶었다.
9화 소년의 항해
누나는 익산에서 올 때 들고 왔던 캐리어를 챙겨 방에서 나왔다. 하루 앞당겨 익산으로 돌아갈 모양이었다. 카키색 반바지에 검정 글씨로 레터링 된 회색 라운드 반팔 티셔츠를 입고 있었다.
ㅡ인영아 누나 간다. 나는 엄마가 만들어 놓은 밑반찬을 냉장고에서 꺼내 식탁에 차려놓는 중이었다.
ㅡ누나 내일 갈 거라며....
ㅡ그냥 오늘 밤에 가려고.
ㅡ다음에 익산에 오면 누나 다니는 학교 구경시켜 줄게. 그녀는 캐리어를 끌고 나가려다 걸음을 멈췄다. 대문 밖에서 자동차 한 대가 멈추는 소리가 들렸다.
ㅡ이리 와 인영아. 누나가 돌아서서 팔을 벌렸다. 나는 누나 앞으로 곧장 걸어갔다. 나를 안아주고는 뺨에 입을 맞추었다. 나도 모르게 내 입술은 어느 순간 누나의 입술에 닿아 있었다. 그녀는 내가 입술을 뗄 때까지 조용히 기다려주었다.
버스 정류장까지 배웅해 주려고 누나의 캐리어를 끌고 대문 밖으로 나갔을 때 뒷집 정민이네 공터에 경찰차가 주차돼 있었다. 운전석에서 내린 사람은 파출소 장 순경이었다. 3년 전에 아빠를 따라 그의 결혼식에 간 기억이 있었다.
ㅡ안녕하세요. 장 순경님. 여긴 어쩐 일이세요? 누나는 옆에 서 있는 내 어깨를 감싸 안았다.
ㅡ아빠가 오늘 또 낮술 드시고 택시를 몰다가 적발됐지 뭐야. 마땅히 연락할 보호자가 있어야 말이지.
ㅡ아빠가요? 누나의 목소리가 떨렸다.
ㅡ남동생이 있었나?
ㅡ아니요. 강 이장님 막내예요.
ㅡ안녕하세요. 나는 적황색 선글라스를 낀 채 바짝 다가서는 장 순경이 불편했다.
ㅡ또래에 비하면 키가 좀 작네. 우유 좀 많이 마셔야겠다.
'그렇게 말하는 본인도 난쟁이 똥자루처럼 작으면서.' 나는 키 작다고 얘기하는 사람이 세상에서 제일 싫었다.
경찰차 운전석에 오른 장 순경이 운전석 창문 밖으로 고개를 내밀었다.
ㅡ버스 타러 가는 길이면 내가 대야까지 태워다 줄게. 아빠 문제로 상의할 것도 있고.
ㅡ지금 어디 계시는데요?
ㅡ차 타고 나가면서 얘기해 줄 게.
누나는 내 얼굴을 바라보며 경찰차에 오를지 말지 머뭇거렸다.
ㅡ인영아, 익산에 도착하는 대로 누나가 전화할게. 나는 그녀가 경찰차를 타지 않기를 진심으로 빌었다. 경찰차를 그냥 보내고, 이대로 버스 정류장까지 함께 걸어가서 좌석에 앉은 누나의 웃는 얼굴을 향해 손을 흔들어 주고 싶었다.
ㅡ내일 아침 누나 만나러 갈게. 나는 경찰차 조수석에서 뒤돌아보는 누나를 향해 소리쳤다.
경찰차가 시야에서 멀어질 때까지 공터에 그대로 서 있었다. 나는 집으로 들어가 대문을 힘껏 닫았다. 금속끼리 부딪치는 소리가 시끄러웠다. 마음이 불안했다. 책상 서랍 맨 아래 칸 깊숙이 넣어놓은 선데이 서울을 꺼냈다. 창고에 쌓아놓은 장난감을 찾다가 구석에 종이상자 안에 삐져나와 있는 잡지를 발견하고 서랍에 감춰 두었다. 발간한 지 십 년도 더 지난 잡지는 표지도 바라고 페이지를 넘길 때마다 종이에 핀 곰팡내가 났다.
나는 아무런 의욕도 없이 방바닥에 배를 깔고 엎드려 선데이 서울 잡지를 넘겼다. 온종일 창문을 통해 들어온 햇빛에 달궈진 장판이 끈적거리며 몸에 달라붙었다. 삼각팬티 속에 성기가 방바닥에 눌렸다. 몸은 나른하고 마음은 울고 싶은데 화가 치밀어 오르는 이상한 기분이 들었다. 두 손을 포개고 턱을 괸 채로 잡지 맨 뒤편에 팔등신 백인 미녀들의 수영복 사진을 보고 있었다. 성기가 방바닥에 눌린 채로 몸을 위, 아래로 그리고 앞뒤로 천천히 활처럼 말고 움직이자 기분이 점점 좋아졌다. 사타구니에 압박감이 전해질수록 그것은 풍선 인형처럼 멋대로 부풀어 올랐다. 아랫배에 더 힘이 들어가고 심장은 사타구니 주변으로 혈액을 펌프질 했다.
항구에 정박해 있던 인영 호는 닻을 올리고 출항을 시작했다. 건조한 지 12년이 지났지만, 범선은 한 번도 항구를 떠나본 적이 없었다. 나는 항해지도와 나침반을 꺼내 들고 타륜을 잡고 바람을 읽어 나갔다.
오렌지색 반팔 티셔츠 너머로 누나의 하얀 젖가슴이 보였다. 스쿠터 뒤에서 밀착하며 전해졌던 부드러운 가슴의 눌림과 촉감을 기억해 냈다. 머리를 감겨주는 누나의 체취는 편백의 피톤치드 향처럼 마음을 진정시켰다. 돛을 펼치고 바람에 몸을 맡기자, 하늘 높이 날아오를 듯한 쾌감이 온몸을 휘감았다. 처음으로 허락된 완전한 쾌락이었다. 출항했던 배는 바람이 잦아들어 돛을 내리고 항구로 돌아왔다. 속옷은 끈적한 정액으로 젖어 있었다. 어떤 냄새일지 궁금했다. 지난 6월에 아빠를 따라 벌초하러 갔을 때 하얗고 복슬복슬한 꼬리 모양으로 흐드러지게 피어 있던 밤꽃 나무 향기였다.
10화 아카시아 향기
누군가 전복된 투싼 차량의 찌그러진 차량 문틈에 쇠지렛대를 넣고 운전석 문을 열려고 시도하는 중이었다. 우그러진 금속끼리 부딪치며 계속 삐걱거리는 소리를 만들어냈지만, 차량 문은 열리지 않았다.
ㅡ배 팀장님, 운전석 문이 심하게 파손돼서 이쪽으로는 환자 이동이 어렵겠는데요.
ㅡ잠깐만 내가 트렁크 쪽으로 진입해 볼게. 정대원은 2차 사고 날 수 있으니 차량 접근 못 하게 도로 통제해 줘.
자동차 후면 유리를 깨는 소리가 들렸다. 깨진 유리 조각을 밟는 소리와 함께 한 사람이 운전석 쪽으로 기어들어 왔다. 그 사람이 다가와 내 어깨를 두드렸다.
ㅡ선생님, 구급대원입니다. 제 목소리 들리세요?
여성 구급대원의 몸에서 동네 어귀에 있던 커다란 아카시아의 달큼한 향기가 났다. 율이 누나를 처음 만난 날에도 만개한 아카시아의 진한 향기가 온 동네를 뒤덮고 있었다. 나는 더 이상 대답할 기운이 남아 있지 않아 간신히 입술을 달싹거렸지만, 목소리가 나오진 않았다. 그리고 여성 구급대원의 다급한 목소리가 귀청을 울렸다.
ㅡ환자 의식 없어.
뒤이어 남자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Jaw thrust, 기도확보완료.
편안한 잠에 빠져들 것 같은 몽롱한 기분이 들었다. 그 와중에도 여성 구급대원의 목소리가 자장가처럼 들려왔다.
ㅡ산소 15리터, 리저버 마스크.
ㅡ연결 완료.
다시 눈을 떴을 때 나는 수술방의 수술대 위에 누워 있었다. 눈부신 백색의 수술등 아래로 푸른색 수술복을 입은 의사들과 간호사들이 보였다. 그리고 마취과 의사의 목소리가 들려왔다.
ㅡ제가 지금부터 하나, 둘, 셋을 세면 잠이 드실 겁니다
ㅡ하나.
ㅡ둘.
ㅡ셋.
셋이란 숫자를 듣는 순간, SF 영화 속에서 주인공이 다른 차원으로의 이동하듯이 내 의식도 훅하고 빨려 들어가 사라져 버렸다.
ㅡ끝ㅡ