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완결) 엄마~하고 부르면

A short story

by 임용철

1화. 동창의 초대


하루라도 좋으니 온전히 나라는 사람으로, 이기적으로 살고 싶은 시절이었다. 동사무소 동장의 아내도 아니고, 자기 엄마에게 괴롭힘 당하며 자란 외계인이 너도 당해보라고 외계 행성에서 보내온 것이 분명한 사춘기 두 아들의 엄마도 아닌, 온전히 손진영으로 말이다. 하늘에서 그런 나의 소망을 들어주기라도 하려는 것일까. 현충일 점심에 전주에 사는 초등학교 동창 현섭이로부터 카톡이 왔다. 그는 프로필에 올려놓은 드라이버 티샷 영상을 보았다고 말했다. 스윙 자세가 예사롭지 않다며 비행기를 태우더니 머리 올린 지 얼마나 되었냐고 캐물었다.

'라운딩 나가는 멤버는 있어? 주로 어느 골프장에 다녀?'

'골프를 시작한 지는 일 년 됐어. 남편이 라운딩 나갈 때 가끔 같이 나가.'

딱히 정해놓고 다니는 단골 골프장은 없노라 말했다.

'재윤이, 태훈이한테 네 얘기하니까 다들 보고 싶대. 김제에 공치러 한 번 내려와라."

'나 혼자 골프 치러 내려간다고 하면 우리 남편 삐져서 안 돼.'

여성 멤버가 한 명 더 있으면 모를까 초등학교 동창이라도 해도 십여 년 만에 얼굴을 대하는 세 명의 남자와 라운딩 하는 건 아무래도 부담스러웠다. 키가 작달막한 방앗간 집 아들 재윤이, 어릴 때부터 우유를 입에 달고 살아서 그런지 중학교에 들어가서는 골리앗처럼 기골이 장대해진 이장댁 아들 태훈이, 그리고 자칭 김제 꽃미남이라는 현섭이랑 나는 김제에서 깨복쟁이 친구로 자랐다. 친구들 소식은 초등학교 밴드에 올라오는 소식을 통해 어느 정도 알고 있었다. 현섭이는 전주에서 골프 의류점을 운영하고, 재윤이는 화성에서 화학 제품을 생산하는 중소기업에서 부장 직함을 달고 있었다. 공으로 하는 운동은 뭐든 잘하는 태훈이는 익산 시청 도시계획과에서 근무했다. 나는 아이들이 다섯 살, 네 살일 때 화학공학과 박사과정에 들어갔고 경기권 대학에 시간강사로 출강 중이었다. 과 지도교수는 대학에 남고 싶다면 박사과정을 마치자마자 해외 유학을 다녀와야 한다고 못을 박았다. 남편은 내가 유학 얘길 꺼내자, 곤란한 기색을 내비치며 마지못해 하는 데까진 해보라고 말했다. 연년생의 두 아들과 6급 공무원인 남편을 두고 혼자 해외 유학을 감행할 만큼 나는 그 당시 이기적이지 못했다. 나는 결국 박사과정 2년 차에 중도하차하고 말았다. 남편과 두 아이 때문에 박사과정을 끝내 마치지 못했다는 내 못난 열등감이 시간을 두고 천천히 자존감을 갉아먹었다. 그러다 보니 가족들은 엄마의 밑도 끝도 없는 짜증에 당황해했다. 나는 나대로 내 경력 단절의 이유가 남편과 두 아이 때문이라고 합리화하며 가족에게 몰래 애꿎은 화살을 쏘아댔다.


현섭이의 초대로 단톡방에 들어온 재윤이, 태훈이도 얼굴 본 지 오래됐으니 한번 내려오라고 성화였다. 초등학교 동창 모임 밴드가 처음 만들어지고 오프라인 모임을 몇 번 했고 다른 여자 동창들이 모임에 소극적이어서 그때 보고는 본 적이 없으니, 그들 말이 틀린 말은 아니었다.

'네가 골프 치는 줄 알았으면 우리가 진즉 연락했지.'

서글서글하고 입담이 좋은 태훈이가 제일 단톡방에서 적극적으로 댓글을 달았다.

내가 이렇게 동네 친구들 사이에서 인기가 있었다니. 세상 오래 살고 볼 일이었다.

'알았어. 그렇게 내가 보고 싶다면야. 이 몸이 한 번 김제에 행차해 줘야지.'

한 번 더 튕기려다가 마지못해 나는 동창들의 초대에 응했다. 엄마도 뵐 겸 오랜만에 콧바람도 쐬고 싶은 생각에 못 이기는 척 내려가기로 했다. 서울시민인 나와 화성에 사는 재윤이가 김제에 내려가게 됐다.


요즘 남편의 잔소리는 시어머니의 그것을 뛰어넘었다. 어쩌면 그는 머리에 새치가 늘어나는 속도보다 더 빠르게 쉬지 않고 잔소리가 늘었다. 갱년기 때문에 잔소리가 는 게 아니라면 나는 그의 입에 지퍼라도 달아 잠가두고 싶었다. 어느 여름밤 열대야로 푹푹 찌던 밤이었다.

"전기세 많이 나온다니까. 이 정도 더위는 선풍기로도 충분해."

내가 에어컨을 켜면 그가 끄고, 나는 다시 켜고 남편은 다시 끄기를 반복했다. 나는 남편이 출근하고 나면 오기로라도 에어컨 바람이 제일 시원한 소파에서 낮잠을 한 시간씩 잤다. 남편은 전기요금 고지서를 받아 들고 고개를 갸웃거렸다.

"어디서 도둑 전기라도 쓰나? 에어컨도 잘 안 켜는 데, 전기세가 생각보다 많이 나오네."

나는 그때마다 모르쇠로 딴청을 피웠다. 1절만 하면 좋으련만, 그는 눈치까지 김치 콩나물국에 말아 드셨는지 내 화를 돋우는 발언을 서슴지 않았다.

"설거지는 초파리 꾀니까 모아 두지 말고 바로바로 하라고."

"어떻게 매번 그때그때 해. 바쁘고 피곤할 땐 좀 쌓아뒀다가 몰아서 해도 되지."

그러면 이 화상은 집에서 살림만 하는 사람이 바쁘고 피곤할 일 뭐가 있느냐고 이해할 수 없다는 듯한 표정을 지었다. 한번 발동이 걸린 잔소리는 끝없이 이어졌다.

"화장실 쓰고 나면 바로바로 물기 닦고 선풍기 돌려. 종량제 봉투는 발로 꽉꽉 눌러서 봉투가 숨이 막혀 헉헉댈 때까지 담아서 버리라고. 빨래는 진한 색과 밝은 색은 같은 색끼리 나눠서 돌리라고 했잖아. 흰색이나 연한 베이지색은 얼룩이 생긴단 말이야."

나는 더 이상 참지 못하고 남편에게 빽 소리를 질렀다.

"그렇게 잘하면 똑똑하고 잘난 당신이 다 해. 난 이제 더는 당신 비유 못 맞추겠어. 나 다음 주 수요일에 김제 내려갈 거니까 죽이 되든 밥이 되든 애들은 당신이 알아서 챙겨."

정확히 그렇게 또박또박 말하고 나는 뒤도 돌아보지 않고 집 밖으로 나가버렸다. 남편의 그 황당하고 어이없어하는 표정을 사진으로 찍어서 박제해둬야 하는 건데.

"십 년 묵은 체증이 다 내려갈 정도로 속이 다 후련하다."

나는 아파트 단지 산책로를 걸으며 블루투스 이어폰으로 백예린의 '산책'을 따라 부르며 흥얼거렸다. 노래를 흥얼거리다 말고 입가에서 피식피식 웃음이 새어 나왔다.



2화. 왜, 하필 지금이야!


재수가 없으려니 고향 친구들과 골프 약속을 5일 앞두고 코로나19 판정을 받았다. 감기 증상이 나타난 건 7월 15일 월요일 초복 날부터였다. 소 잃고 외양간 고치는 격이지만, 이럴 줄 알았더라면 다음 주 라운딩 약속을 고려해서라도 정오에 잡혀 있던 브런치 모임은 가지 말아야 했다. 이 브런치 모임은 둘째 아들 민성이가 초등학생 때부터 다니던 돌핀 수영반 엄마들 모임이었다. 내게 코로나19 바이러스를 얄밉게도 선물해 준 사람은 내 앞자리에 앉은 영서 엄마였다. 감기에 걸렸다면 알아서 모임에 나오지 말아야 하는 게 매너인데... 그녀는 상식을 냉장고에라도 넣어두고 모임에 나온 게 분명했다. 영서 엄마 뒤에 자리한 스탠드형 에어컨에서 나오는 바람이 거슬렸다. 전교 1등 하는 아들을 둔 현성이 엄마 옆에 찰싹 달라붙어서 아들이 다니는 학원을 물어보느라 다른 사람은 안중에 없는 눈치였다. 베이지색 반바지에 모달 소재의 하늘색 반팔 니트 차림으로 정보수집에 열을 올리느라 브런치 모임 내내 비비드 오렌지 립스틱을 입술보다 넓게 바른 그 조동아리를 놀려댔다. 기침하고 재채기하고 코 풀고, 다시 재채기하고 코 풀고 기침을 해댔다. 마음씨 착하기로 소문난 현성이 엄마조차도 부담스럽다는 얼굴을 하고 있었다. 세상에 민폐도, 그런 민폐가 따로 있을까. KF94 마스크를 약국에서 사다가 말 입에 씌우는 사료 먹이통처럼 마스크 안에 음식을 잔뜩 넣어서 먹으라고 말해주고 싶은 걸 꾹 참았다. 나는 영서 엄마 앞에 자리를 잡은 걸 앉자마자 후회했다. 되도록 멀리 떨어진 자리로 옮기고 싶은 마음이 굴뚝같았지만, 식사자리에 늦게 도착하는 바람에 영서엄마 맞은편 자리 하나만 남아있어 옮길 수조차 없었다. 자신들의 아이가 감기라도 걸리면 학교며 학원 수업에 지장을 줄 게 뻔하니까 말이다. 영서 엄마가 기침하고 재채기하고 코를 푸는 동안 주변의 의자들은 조금씩 뒷걸음질하며 바닥에 불협화음을 냈다. 쉬지 않고 돌아가는 감기 바이러스 제조공장을 통해 날아든 기침과 재채기 비말을 뒤집어쓴 채 집으로 돌아가는 발걸음을 재촉했다. 차를 몰고 집으로 오는 내내 찝찝한 기분을 지울 수 없었다.

집에 돌아오자마자 나는 욕실에서 샤워 후 양치하고도 안심할 수 없어서 가글까지 하고 나왔다. 하지만 이미 내 몸 안으로 침투한 바이러스의 진격을 차단하진 못했다. 다음 날 저녁부터 콧물이 흐르고 재채기를 해댔다. 약상자 안에 있던 종합감기약을 먹어봤지만 소용없었다. 목이 따끔거리고 침 삼키기가 불편하더니 슬금슬금 참을 수 없는 기침이 나를 괴롭히기 시작했다. 어려서부터 목감기를 달고 살아서 목감기라면 지긋지긋한 나인데.

'왜 하필 지금이야!'

밤이 깊어질수록 사랑과 감기는 숨길 수 없었다.

"나, 다음 주 김제 내려가야 하는데, 독감에 걸렸나 봐."

퇴근한 남편에게 하소연했더니,

'몸은 좀 괜찮아?'란 말 한마디 없이 인정머리 없는 남자는 화들짝 놀라며 빛의 속도로 마스크를 꺼내 입에 바리케이드부터 쳤다. 혀를 끌끌 차며 아예 대놓고 싫은 티를 냈다.

"애들 핑계 대고 아줌마들이랑 몰려 싸돌아다닐 때부터 내 알아봤지."

악어의 눈물이라도 기대했던 내가 순진했다는 생각이 들었다. 그는 애꿎은 가족들 독감 걸리지 않게 얼른 마스크부터 쓰라고 소리를 지른 후 두 아이가 있는 방으로 내뺐다. 나는 주방 수납장에서 KF94 마스크를 꺼내 쓰고는 저녁 식탁을 차리기 시작했다. 조금이라도 아내의 건강을 염려하는 남편이었다면 한 끼 저녁식사정도는 차려줄 법도 한데. 식탁에 남편과 두 아이의 저녁을 차려두고 나는 우렁각시처럼 안방으로 들어갔다. 남편은 안방에서 내일 입을 양복과 셔츠와 속옷을 꺼내 들고 오늘부터 민성이 방에서 지내겠다고 선언했다. 혼자 안방 화장대에 앉아 쟁반에 차려온 저녁을 먹으면서, 이제 더는 남편의 코골이 소리에 새벽잠을 설치지 않아도 되겠다는 생각에 기분이 나아졌다. 목이 부어서 음식을 삼키기가 힘들 줄 알았는데, 의외로 저녁 밥맛은 좋았다. 각방 쓰는 게 이렇게 홀가분한 일일 줄이야.

'사람들이 나이 들면서 각방 쓰는 데는 다 그럴만한 이유가 있었구나.'

나는 침대에 기댄 채로 TV 전원을 켰다.


수요일 아침, 나는 시장통 도로변에 있는 다정한 이비인후과를 방문했다. 우리 동네에는 두 군데의 이비인후과 병원이 있었다. 우리 가족이 단골로 다니는 다정한 병원은 원장님이 인상도 좋고 친절한 병원이라고 동네에 입소문이 난 곳이었다.

"안녕하세요. 사모님. 어디가 불편하세요?"

내 얼굴을 알아보고 마스크를 쓴 접수대 송 간호사가 먼저 인사를 건넸다.

"독감인가 봐요. 열은 안 나는데 콧물, 재채기에 침 삼킬 때 목이 불편하면서 기침이 계속 나와요."

"가래, 오한 같은 다른 증상은 없어요?"

"네 없어요."

송 간호사는 체온계를 꺼내 들었다.

" 체온 재볼게요."

나는 간호사가 체온을 잴 수 있도록 귀를 가져가 댔다.

"미열이 있네요. 접수해 드릴게요."

접수대에서 내 이름이 호명되자 나는 문을 열고 진료실 내부로 들어갔다. 이 원장님은 머리에 쓰고 계신 헤드 미러를 얼굴 쪽으로 내려서 내 입안을 살펴보더니 인후와 편도가 부어있다며 사진을 찍어서 보여주셨다. 진료실 의자 옆에 달린 시린지를 입안에 넣고 '칙칙'하고 구강소독제 스프레이를 뿌렸다. 다음에는 코를 벌리는 기구를 넣고 살펴보셨다. 기구로 코가 벌어지는 기분은 별로였지만 코점막 수축제 스프레이로 촉촉해진 코의 느낌은 나쁘지 않았다. 의사는 귓속도 들여다보고 나서야 헤드 미러를 원래 있던 자리로 밀어 올렸다.

"따뜻한 물 많이 드세요. 미열이 있지만 심하지 않고 노란색 가래가 끓진 않아서 아직 항생제를 드실 정도는 아니네요. 진통소염제를 드시고 좀 지켜보겠습니다."


3화. 남의 편이 남편


남의 편이 남편이라더니, 이분은 부인이 자길빼고 즐겁게 노는 건 못 참는 성미인지라, 이번에도 그냥 넘어갈리 만무했다.

"동창들에게 민폐 끼치지 말고, 집에서 몸조리나 해. 친구들이야 괜찮다 쳐. 김제 가서 연로하신 장모님 감기라도 옮기면 오빠들한테 무슨 봉변을 당할려고 그래?"

"엄마한테는 내려간다고 말 안 할 거야."

그는 내가 고향 친구들과 라운딩 하는 게 심중에 못마땅했던 게 분명했다.

"그러니까 집에서 얌전히 몸조리나 하라고."

남편말을 계속 듣고 있으면 동사무소 출근 전까지 '손진영이 고향에 내려가지 말아야 할 101가지 이유'라도 늘어놓을 것 같아서 나는 소고기 무국과 시금치나물, 계란말이를 식탁에 차려놓고 그의 잔소리를 피해 서둘러 집을 나섰다.


친구들과의 약속이 코앞에 다가왔으므로 나는 조바심이 났다. 컨디션이 좋아야 골프연습장에도 가고 내려가서 라운딩도 할 수 있을 텐데 이런 컨디션으로는 체력이 약한 내가 장거리 운전에다가 라운딩까지 할 자신이 없었다. 연습장에서 스윙을 몇 번 하고 나면 터져 나오는 기침과 흘러내리는 콧물에 의욕이 꺾였다. 미열 탓인지 묵직한 피로감까지 내 몸을 베일처럼 두르고 있었다.

'그이 말대로 집안에서 격리해야 하나?'

다정 이비인후과에서 처방해 준 5일분의 감기약을 다 먹었지만, 기침은 더 잦아졌고 가래도 끓기 시작했다. 나는 감기약을 더 처방받으려고 7월 22일 다정한 이비인후과에 방문했다.

"증상이 좀 어떠세요?"

"콧물, 재채기는 좀 줄었는데, 약을 먹었는데도 잔기침이 계속 나와요. 주말부터는 가래도 조금씩 나와요. 색깔도 노란색으로 바뀌었어요."

코로나19가 온 나라를 휩쓸고 창궐할 때, 나도 코로나에 걸린 적이 있었다. 병원이나 보건소에서 확진 판정을 따로 받지 않았지만 왠지 느낌이 싸한 게 분명 증상으로 봐선 코로나일 거 같은 기분이 들었다. 코로나에 걸린 사람에게 나라를 팔아먹은 대역죄인처럼 수형 번호가 부여되고 이 잡듯 동선이 까발려졌다. 뉴스에선 연일 여러 사람에게 코로나바이러스를 전파한 슈퍼전파자라며 조리돌림을 했다. 나는 코로나바이러스 전파자로 낙인찍힐까 봐 겁났다. 더군다나 공무원인 남편에게 누가 될까 봐 병원에 가지 않는 게 상책이라고 판단했다. 다정 병원에 전화를 걸었을 때 평소 친분이 있는 김 간호사는 코로나일 확률이 있으니, 병원이나 보건소를 빨리 방문해 보라고 말했다. 코로나에 걸렸다고 해서 무슨 대단한 잘못을 저지른 것도 아닌데 말이다. 나로 인해 우리 가족, 특히 공무원인 남편이 사람들 입방아에 오르내리게 하고 싶지 않았다.

"원장님, 제가 이번 주 주말에 골프 라운딩 약속이 있는데 괜찮을까요?"

"코로나19도 감기와 증상이 유사해서 증상이 심해지는 걸로 봐서는 코로나일 확률도 있어요."


원장님은 잠시 생각에 잠기더니, 코로나19 검사를 해보자고 하셨다. 그는 의자에 앉은 채로 벽 쪽으로 이동해서 익숙한 손놀림으로 신속항원검사(RAT) 키트를 하나 꺼내 들었다. 나는 간호사의 안내에 따라 마스크를 내리고 고개를 약간 뒤로 젖혔다. 잠시 후 눈앞에 나타난 기다란 면봉은 원래 다니던 익숙한 길인 것처럼 콧구멍 깊숙이 쑥 들어와 흩고 다녔다. 코가 시큰해지면서 미간이 살짝 찌푸려졌다. 코를 빠져나온 면봉은 어느새 밖으로 나와 시약이 담긴 추출용 튜브 안에서 여러 차례 몸을 비벼대고 있었다. 원장님은 면봉을 제거 후 노즐 뚜껑을 덮고는 튜브를 거꾸로 들어 시약과 섞인 검체를 검체 용기 위에 3~4 방울 떨어뜨렸다. 나는 진료실에서 나와 대기실에서 결과를 듣기 위해 기다렸다.

'제발 코로나만 아니기를, 단순한 감기였으면.' 이런 간절한 마음은 아니었다. 그냥 뭐든 상관없이 좀 멍했다. 그 사이 두 명의 환자가 진료실을 들락거렸다. 그리고 간호사가 진료실 안으로 들어가라는 말을 듣고 진료실에 들어가 체어에 앉았다. 의사는 키트를 보여주면서 간단한 설명을 덧붙였다.

"C가 대조선이고 T가 시험선입니다. 지금 보시면 C와 T 모두 선홍색 라인이 나타났죠."

"하."

내 입에서는 단말마의 비명이 흘러나왔다.

"코로나 양성 판정이 나오셨네요. 5일간 격리하시는 게 좋겠어요. 혹시 직장 다니시면 신속항원검사 양성 확인서나 진단서 필요하시면 말씀해 주세요."

"진단서는 필요 없는데. 그럼, 주말에 예정된 골프 약속은 취소해야 할까요?"

"뭐라 말씀드릴 순 없지만, 그래도 증상이 남아있으니 다른 게스트를 빨리 찾아보는 게 낫겠네요."

코로나19에 걸린 환자들이 병원에서 확진 진단을 받았을 때 어떤 기분이었을지 알 것 같았다.

'동네 친구들에게 뭐라고 해야 하나'

남편 말로는 본인 상 말고는 골프 라운딩 약속은 지키는 게 매너라고 했다. 불과 1주일을 앞두고 친구들에게 코로나에 걸려서 못 내려가겠다는 말은 차마 할 수가 없었다. 그래도 미루면 미룰수록 게스트를 초빙할 수 있는 시간도 줄 테니 한시라도 빨리 알려야 했다. 나는 이비인후과 병원을 나서며 고향 친구들 단톡방에 글을 남겼다.

'나 지금 이비인후과 다녀가는 길인데, 코로나19 확진 판정받았어. 미안한데, 이번 주 라운딩 못 내려갈 거 같아. 지금이라도 게스트를 구해봐.'

나의 글에 제일 먼저 댓글을 단 건 현섭이 었다.

'요새 코로나는 감기 축에도 못 낀다. 우린 아무렇지도 않으니까, 신경 쓰지 말고 내려와.'

뒤이어 재윤이와 태훈이도 숟가락 들 힘만 있으면 내려오라고 말했다. 나도 동네 친구들이 보고 싶었지만, 코로나 걸린 상태로 골프를 치고 싶진 않았다. 김제까지 내려가서 친정엄마를 만나지 않고 올라오는 것도 도리가 아니었다. 한편으론 나로 인해 팔순이 넘은 엄마가 코로나라도 걸렸다가는 상대하고 싶지 않은 오빠들에게 욕을 한 바가지 얻어먹을 게 뻔했다. 성격이 불같은 큰오빠의 목소리와 비아냥거리기 좋아하는 둘째 오빠의 목소리가 교대로 귓가에 들려오는 듯했다.

"너 미쳤어? 엄마 몸도 약하신데, 코로나19라도 걸려서 병원에 입원하시기라도 하면 네가 간병해 줄 거야?"

"쯧쯧, 석사학위까지 받은 얘가 머리가 고 따위로밖에 안 돌아가냐? 대학원에 쏟아부은 등록금이 아깝다."

나는 두 오빠의 목소리를, 있는 힘껏 밀어내야만 했다.

'그래, 병원에서 5일 동안 격리하라고 했으니, 약을 잘 챙겨 먹고 격리기간이 종료된 다음 날 라운딩은 괜찮겠지.'

그런데 김제 친정집을 방문하는 게 문제였다.

'내가 KF94 마스크 계속 쓰고, 엄마와는 식사만 같이하지 않으면 돼.'

마스크를 착용한 채 엄마 집에 가서 용돈 드리고 곧장 서울로 올라가면 그만이었다. 남편은 내가 코로나19에 걸렸는데도 자기 말을 무시하고 1박 2 라운딩을 강행하는 게 불만이었다.

"당신이 슈퍼전파자여서 친구들한테 옮기고 그럼 그 가족들은 또 무슨 죄야. 당신 김제까지 내려가서 장모님 얼굴도 안 뵙고 올 거야."

나는 슈퍼전파자로 몰아가는 남편에게 근거를 대보라고 따져 물었다.

"라운딩 하는 날은 5일 격리 기간이 끝나는 목요일이고 엄마는 라운딩 끝나고 잠깐 들러 인사만 드리고 올라올 거야. 그럼 문제없는 거지?"

남편은 기어이 내려가겠다는 내 말에 고개를 절레절레 흔들며 아들 방으로 들어갔다. 그러고는 방 안에서 나 들으라고 중얼거렸다.

"하여튼, 어떻게 지는 법이 없어. 나이 들수록 똥고집을 부리네."


4화. 친정엄마


남편에겐 목요일에 잠깐 들러 친정엄마를 만나고 오겠다고 했지만, 나는 7월 24일 수요일 아침 일찍 엄마 집에 내려가기로 마음을 먹었다. 서두르면 엄마 아침 드시기 전에 도착해서 마트에서 어제 사 온 대구탕 밀키트를 끓이고 밥을 갓 지어서 소박한 밥상을 차려 엄마와 나눌 요량이었다. 대구탕 밀키트라니... 세상 정말 편해졌다. 나처럼 요리하기 싫어하는 전업주부에게 밀키트의 등장은 신세계였다. 서울시만 하더라도 1인 가구 비율이 39.3%를 차지한다고 했다. 밀키트는 보통 2인 기준이니 혼자 사 먹기엔 다소 비싸고 양이 많다고 할 수도 있지만 무엇보다 편의성에서 밀키트를 따라갈 물건이 없었다. 나같이 요리하기 싫어하는 전업주부에게는 목공의 짜맞춤 사개 물림처럼 더할 나위 없이 잘 들어맞았다. 요리할 땐 마스크를 쓰고 나는 마당 그늘에서 따로 먹을 생각이었다. 아이스박스 안에 냉동실에 얼려둔 아이스 팩 서너 개를 바닥에 깔고 대구탕 밀키트와 미리 손질해 둔 미나리, 쑥갓, 양파, 느타리버섯을 챙겼다.

김제 엄마 집에 도착한 시각은 아침 8시 30분. 시골집 대문은 활짝 열려있었다. 백미러를 봐가며 좁은 대문 안으로 차를 운전하는 일은 여전히 식은땀이 날 정도로 힘들었다. 다행히 오늘은 아무런 사고도 치지 않았다. 엄마가 마당을 돌아다니기 쉽게 차를 오른쪽 화단 쪽에 붙이기 위해 천천히 뒤로 후진했다. 차에 후진기어를 넣자, 후방카메라 모니터 화면이 흔들리더니 화면이 일순간 먹통이 돼버렸다. 슬금슬금 뒤로 후진하던 차량은 연두색 칠을 한 철창으로 만든 개집의 기둥을 들이받고 말았다. 내려서 보니 차량의 후방 범퍼가 움푹 찌그러지고 연두색 칠이 묻어 있었다. 남편에게 후방카메라를 고쳐 달라고 몇 번이나 말했었는데.

"이건, 내 잘못이 아니야. 나는 분명 몇 번이나 후방카메라 이상하다고 고쳐 달라고 말했으니까."

이렇게 범퍼가 움푹 들어간 정도라면 남편 성격에 한 달은 잔소리를 퍼부을 텐데. 그 구시렁거리는 소릴 들을 생각에 살짝 현기증이 몰려왔다. 나는 트렁크에 두 손을 얹고는 하늘을 향해 남편이 모르고 넘어가달라는 염원을 담아 긴 숨을 내뱉었다. 타들어 가는 나의 속도 모르고 소심한 성격의 복순이가 왈~왈 짖어댄다. 나에겐 '그러니까, 룸미러로 뒤를 확인하면서 운전하시라니까.'라고 말하는 것처럼 들렸다. 복순이는 분명 MBTI가 T(Thinking, 사고형) 일 게 분명해 보였다. 엄마 집에는 고양이 삼대가 모여 살았다. 이민 1세대 '샬럿'은 큰오빠네 공장 직원들이 키우던 고양이였고, 공장을 방문하는 투자자들 눈에 거슬린다는 이유로 엄마 집으로 유배됐다. 인정머리 없는 큰 오빠가 고양이를 마뜩잖아할 리 없는 건 당연했다. 샬럿은 우리 엄마 집이 편했는지 그 뒤로 아들, 딸 고양이를 여러 마리 낳았고, 그리고 그 아들, 딸 고양이가 손녀, 손자 고양이까지 낳았다. 개중에는 집을 가출한 애들, 혹은 동네 개들에게 납치를 당해 죽임을 당한 이들도 있어서 현재 시골집에 있는 고양이 개체수는 할머니고양이 샬럿을 포함해 총 8마리가 살고 있었다. 샬럿은 사람을 경계하지 않았지만, 그녀의 후손들은 밥을 달라고 문 앞에 서성거릴 때조차도 사람에 대한 경계를 푸는 법이 없었다. 사람과 조금 떨어진 거리에서 그루밍할 때조차 나를 투명 인간 취급하기 일쑤였다.


엄마가 평소 계실만한 텃밭이나 장독대로 돌아가 찾아봤지만, 엄마의 모습은 보이지 않았다.

"이른 아침부터 어딜 가신 거지?"

두 번이나 전화를 걸어봤지만, 신호만 가고 받지 않았다. 나는 엄마를 찾는 걸 단념하고 싱크대 위에 놓여 있는 식기들, 숟가락 그리고 젓가락을 설거지하고 물이 끓는 냄비에 넣어 소독했다. 그리고 냄비에 물을 올리고 아이스박스에서 대구탕 밀키트를 꺼내 아침 식사 준비를 시작했다. 먼저 포장돼 있던 콩나물, 미나리, 고추, 대파와 추가로 챙겨 온 채소를 씻어 체에 밭쳐 놓고 소스를 풀어 끓이기 시작했다. 육수가 끓기 시작하자, 씻어 놓은 대구를 넣어 끓이기 시작했다. 엄마가 쓰는 밥솥을 열어보니 찰기 없는 마른밥 위에 쑥떡이 얹혀 있었다. 그냥 먹었다가는 얹힐 것 같은 마른밥과 쑥떡을 비닐 팩에 담아 내 가방에 넣었다. 서울로 올라가는 대로 버릴 예정이었다. 전기밥솥 뚜껑을 보니 눈이 어두우셔서 밥 지을 때 달라붙어 생긴 노란 찌꺼기가 있는데도 모르고 계속 밥을 지어 드셨던 거였다.

엄마는 나와 전화 통화할 때마다 오빠들이 주말에 시원한 물메기탕을 사줘서 맛있게 먹었다거나 김치찜, 보리새우 매운탕을 실컷 드셨다고 자랑을 늘어놓으시며 걱정하지 말라고 나를 안심시켰다.

그러나 막상 이렇게 한번 엄마 집에 내려와 냉장고 문을 열어보면 사정은 달랐다. 냉장고 안에는 엄마가 요리해서 드시다 남은 음식, 오빠들이 사다 준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과 음료수 그리고 오빠들과 외식하고 포장해 온 음식들에 곰팡이가 피어있거나 눈으로 딱 봐도 신선도가 떨어진 상한 음식투성이었다.

'눈까지 어두우셔서 그런 음식을 함부로 먹고 배탈이라도 나시면...'이라는 생각이 들자, 나는 그만 속이 상해서 누군지 모를 대상을 향해 혼자서 부아를 냈다. 서울에 산다는 핑계로 엄마를 편하게 외면하고 살다가 이렇게 실제 엄마가 지내는 모습을 볼 때마다, 내 마음은 무너져 내렸다. 결국, 올 6월 초에, 엄마는 상한 음식을 드시고 장염에 걸려 병원에 3일 동안이나 입원하셨다. 오늘도 나는 냉장고 문을 열고 유통기한이 지난 식품과 상태가 좋지 않은 음식들을 전부 정리해서 빈 아이스박스에 넣어 엄마가 보기 전에 미리 트렁크 안쪽에 넣어 두었다.

'엄마 혼자 먹으려고 짓는 밥은 얼마나 맛있을까?'

나는 백설 공주와 함께 사는 일곱 난쟁이 집에나 있을 법한 1인용 미니 밥솥에 쌀을 씻어 밥을 안치며 엄마를 생각했다.


밥이 다 돼가는데도 엄마는 대문으로 들어오지 않으셨다. 나는 안방에 깔아놓은 요와 이불들을 가져다 대문 밖에서 먼지를 털어 개켜서 낡은 체리 색 장롱에 넣었다. 허리가 'ㄱ'자 형태로 굽으셔서 무거운 요와 이불을 털 수 없어 계속 펴 놓으셨던 모양이었다. 무선 청소기에 집진 통에는 먼지가 가득 차 있었다. 오래된 필터는 그 자체가 쓰레기 덩어리였다. 나는 먼지 통을 비우며 새 필터로 교체했다. 긴 빗자루로 안방과 거실, 주방을 거치며 거미줄을 제거하고 있자니 복순이가 꼬리를 흔들어댔다. 밖을 내다보니, 엄마가 구부러진 허리로 실버 카를 밀며 대문으로 들어오고 계셨다.

"엄마"

"너는 내려올 거면 미리 연락이라도 주지."

"텃밭에 안 계시던데. 여태 어디 있다가 오는 거야?"

엄마는 재윤이네 텃밭에 심어놓은 시금치와 상추를 캐왔다고 하셨다. 재윤이가 혼자되신 엄마를 아파트로 모시고 가면서 시골집은 비어 있었다. 엄마가 가져온 연한 상추를 씻어서 간장양념에 무치고 시금치는 소금 한 숟갈 넣고 팔팔 끓인 물에 10초 정도 데쳐서 다진 대파, 국간장, 참기름 넣고 조물조물 무친 다음 통깨를 뿌려 상에 올려놓았다. 건넌방에서 작은 소반을 꺼내 와 김이 모락모락 나는 쌀밥과 대구탕과 상추 무침, 시금치나물을 차린 밥상을 엄마에게 차려 드렸다.

"네 밥은 어딨어?"

나는 마스크를 쓴 채 엄마에게 말했다.

"코로나래. 혹시 엄마에게 코로나 옮기고 가면 안 되니까. 나는 평상에서 먹을게."

"괜찮아. 엄마 코로나 주사도 다 맞아서."

나는 쟁반에 밥과 음식을 담아 밖으로 나갔다.

"어서 이리 오래도. 거기 더워."

엄마는 밥상을 들고 평상 가까운 거실에 자리를 잡았다. 방충망이 쳐진 채로 베란다 문을 열고는 선풍기 바람이 평상을 향하도록 틀어놓으셨다. 그러고는 대구탕을 곁들여 밥 한 그릇을 천천히 비우셨다. 나는 그늘진 평상에 앉아 거실에서 엄마가 음식을 드시는 모습을 바라보았다. 의지하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나서 온기 없는 많은 낮과 밤에 혼자 밥을 드셨을 텐데.

'잘 잤어? 혹은 밥은 먹었어?'라는 따뜻한 말 한마디, 인정 어린 시선도 없이 말이다.

"오랜만에 우리 딸이 아침을 차려주니 꿀맛이네."

"자주 못 내려와서 미안해 엄마."

"괜찮아. 민우, 민성이는 잘 크지?"

"둘 다 사춘기가 왔는지 요샌 방에 들어가서 숫제 나오려고 하질 않아요. 어디 데리고 가려도 해도 가기 싫다고 말하고. 지들이 혼자 큰 줄 알아."
엄마는 딸의 푸념을 듣고 웃고만 계셨다. 이제 결혼해서 살아보니 '너도 엄마 심정을 조금은 이해하겠니?' 이런 표정이었다

"이 서방은 요새 바쁘지."

"엄마, 이 서방 갱년기인가 봐. 잔소리를 어찌나 해대는지 몰라."

남편의 잔소리는 한 번 시동이 걸렸다 하면 소련이 개발한 스커드 전술 탄도미사일처럼 목표 지점인 내 귀에 오차 없이 연속해서 내리 꽂혔다.

'지저분한 싱크대 안에 요리할 식재료를 내려놓지 마라. 밥 지을 때 쌀은 5번 이상은 씻어야 깨끗하다. 계란말이 할 때 통후추 좀 뿌리지 마라. 후추 알갱이 씹히면 비릿해서 못 먹겠다. 식탁에서 밥 먹을 때 제발 교양 없게 '쩝쩝' 소리 좀 내지 마.' 등등 지금 바로 떠올릴 수 있는 것만 세도 열 손가락으로 모자랐다. 동사무소에서 동장을 하며 받는 스트레스를 집에 와서 나에게 해대는 잔소리로 다 푸는 거 같았다.

한 번은 베란다에 빨래를 노느라 남편에게 인덕션 위 프라이팬 안에 돼지고기 고추장불고기를 뒤집어 달라고 부탁한 적이 있었다. 빨래를 다 널고 와 보니 레인지 상판에 돼지고기 불고기가 한 조각 떨어져 있길래 나는 습관처럼 손으로 집어서 팬에 넣었다. 그러자 시어서커 원단으로 만든 흰색 바탕에 초록색 나뭇잎이 프린팅 된 여름 잠옷을 입고 있던 남편은 내가 집어넣은 불고기가 프라이팬 바닥에 닿기도 전에 빠른 나무 주걱 손놀림으로 팬 바깥으로 튕겨냈다. 어찌나 반사 속도가 빠르든지 배구 중계에서나 보던 A속공을 그날 남편에게서 직관할 줄이야. 나는 남편의 재빠른 행동에 혀를 내둘렀다. 전생에 맑은 물에서만 놀던 선비였던 게 분명했다.


5화. 어디로 가지?


설거지를 마치고 엄마랑 믹스커피를 마시는 중이었다. 남편은 시위하듯이 내게 사진을 보내왔다. 첫 번째 사진은 아침 식사로 김치를 앞에 두고 라면을 끓여서 두 아들과 먹고 있는 사진이었다. 사진 속 잠이 덜 깬 듯한 두 아들의 머리는 까치집을 한 꾀죄죄한 상태로 눈 밑에 종이로 만든 눈물을 붙이고 있었다. 두 번째 사진은 좀 더 행복해 보였는데, 식탁에는 배달로 주문한 피자와 1.5L 콜라를 앞에 두고 민우, 민성이가 각각 알라딘과 램프의 요정 지니로 분해 연출한 사진이었다. 나는 남편에게 점심은 애들을 데리고 나가서 제대로 된 음식을 사 먹이라고 답장을 보냈다. 남편은 아무런 대답이 없었다. 토라져 있는 게 분명했다. 남편은 평소에 자신에게 삐졌다거나 토라졌다는 말을 다른 사람에게, 특히 내게 듣는 걸 극도로 자존심 상해했다.

"마음에 상처를 입은 거야? 기분이 상했나 보네. 이렇게 점잖게 말하면 되잖아. 사람들은 왜 자존심 상하게 남자에게 삐졌느니 밴댕이 소갈딱지같이 속이 좁다느니 하며 한 번 더 상처를 긁는지 모르겠어."

그러면 나는 이렇게 대답했다.

"우리가 뭐 이십 대 선남선녀라도 돼. 그냥 삐진 걸 삐졌다고 직관적으로 얘기하는 거지. 뭘 돌려 말해."

"그래서 당신이 공감 능력 제로란 얘길 듣는 거야."

남편은 이렇게 문자를 보내주길 원할 것이었다.

'고마워, 당신이 애들 챙겨줘서 맘 편히 엄마도 보고 내일 재밌게 골프도 칠 수 있겠다. 정말, 당신은 최고의 남편감이야. 당신이랑 결혼하길 참 잘했어.'

내 눈엔 정답이 보였는데 그걸 굳이 지금 맞추고 싶진 않았다. 그럴 때마다 나는 일부러 오답을 맞춰 남편의 표정을 붉으락푸르락 짓게 했다.


엄마는 아침 일찍부터 밭에서 일을 하고 오셔서인지 식곤증이 몰려와서인지 한숨 주무시겠다고 안방에 이부자리를 깔고 누우시더니 금세 코를 골며 잠드셨다. 방 안의 온도가 가파르게 올라서, 나는 에어컨 실외기를 점령한 채 시위를 벌이는 종이상자들을 치우고 나서야 스탠드형 에어컨을 작동시켰다. 그렇게 엄마 옆에 누워 한낮의 무더위를 피해 30분가량 눈을 붙였다. 엄마는 입을 살짝 벌린 채로 아직 세상모르게 주무시고 계셨다. 김제 중앙시장 방향으로 차를 몰고 가다가 빠삐용 이란 이름의 카페를 발견하고는 급히 차를 세웠다.

'카페 빠삐용 cafe papillon'

빠삐용이란 이름을 보니 소설가인 친구 클라라가 한 말이 떠올랐다.

"한글에는 나비와 나방을 부르는 단어가 다르듯이 프랑스어에서는 나비를 papillon, 나방을 papillon de nuit(밤의 나비)라고 시적이며 비유적으로 부른대."

"밤의 나비? 나방보다는 훨씬 문학적으로 들리는데."

클라라로부터 나비와 나방 얘기를 들으면서 나는 같이 석사과정을 밟고 있는 후배 미희 생각을 했다. 논문 지도교수인 유 현명 교수에게 적극적으로 자신이 지닌 유무형의 실력을 어필하는 그녀가 밝고 선명한 색을 표현하는 화려한 나비라면 나는 나무껍질, 벽, 땅 색과 비슷한 보호색을 지닌, 평범하고 조용한 회갈색 나방이었다.


카페 빠삐용에서 아이스 아메리카노 한 잔과 아이스 레몬 홍차를 컵 캐리어에 담아와서 주무시고 계신 엄마를 깨워 아이스 레몬 홍차를 건네드렸다. 그늘이라곤 찾아볼 수 없는 시골 농가에서 하루 종일 버티기엔 너무 습하고 무더운 여름 날씨였다. 서울에서 차를 몰고 내려올 때만 해도 원래 계획엔 없었지만, 이런 날씨에 하루 종일 집 안에 있다가는 건강한 사람도 열사병에 걸릴지 모를 일이었다. 그래서 바람이라도 쐬러 나가고 싶었다.

"엄마, 날씨 더우니까 우리 밖에 나가서 시원한 물냉면이나 먹을까?"

엄마는 뙤약볕에 어딜 나가냐며 집에서 간단히 김치말이 국수나 해 먹자고 하셨다.

'그런데 어디로 가지?'

변산 해수욕장까지는 30분 정도 소요되는 거리였고 군산 새만금 방조제를 거쳐 장자도 선착장까지 가는 코스는 1시간이 걸렸다. 변산 해수욕장은 큰오빠 가족들이랑 많이 가보셨다고 해서 나는 엄마를 태우고 장자도 선착장에 가기로 했다. 장자도 선착장은 나도 처음이었다. 엄마는 검정 바탕에 흰 꽃무늬가 촘촘하게 들어간 몸빼 바지와 바닷속에 던져놓으면 옷에서 작은 물고기 떼가 살아나서 빠져나갈 거 같은 모달 소재의 시스루 카디건을 걸치셨다. 상의는 흰색 바탕에 검정 가로 스트라이프가 있고, 셔츠 깃 둘레에 빨간 라인 포인트가 들어간 반소매 상의를 입으셨다. 신발은 블랙 버튼 장식의 베이지 샌들을 신고 여름 한낮의 외출에 따라나섰다.


박말숙 냉면집은 발 디딜 틈이 없이 만석이었다. 엄마를 식당 입구에 내려드리고 나서 김제중앙시장 인근 공영주차장에 차를 주차하려는데 빈자리가 없어 주차장 안으로 들어가지 못하고 기다리느라 진땀을 빼야 했다. 엄마와 나는 집에서 다투고 나온 모녀 사이처럼 멀찍이 떨어져 앉아서 냉면을 먹었다. 나는 아무렇지 않게 행동했지만, 나와 떨어져 앉은 테이블에서 혼자 물냉면을 먹는 엄마의 표정은 몹시 불편해 보였다. 시원한 동치미를 곁들인 물냉면은 한 시간씩 기다려 먹는 방송에 소개된 유명 냉면 맛집보다 담백한 맛이 일품이었다. 계산대에서 엄마와 내가 나란히 섰을 때, 여사장님은 모녀지간처럼 보이는 두 사람이 떨어져 먹은 이유를 묻고 싶은 눈치였지만 엄마나 나나 그 질문엔 대답할 기미를 주지 않고 식당을 나와버렸다.


식당에서 냉면과 감기약을 먹는 시간을 제외하고 나는 줄곧 마스크를 쓰고 있었다. 에어컨을 틀고 창문을 열어 환기한 다음 차 안이 시원해지길 기다렸다가 엄마에게 KF 마스크를 씌워드리고 뒷좌석 안전띠를 채워드렸다. 조수석의 창문은 바람이 잘 통하도록 조금 열어두었다.

"엄마, 마스크 써서 답답하더라도 조금만 참아요."

새만금방조제를 지나가다 보니 양옆으로 탁 트인 바다가 눈앞에 펼쳐졌다. 차 안은 이미 에어컨 바람으로 시원해진 터라 밖에 보이는 바다의 풍경 또한 시원스레 스치며 지나갔다. 예전에는 군산에서 배를 타야 갈 수 있었던 섬들이 다리로 연결되면서 이제는 멋진 드라이브 코스가 되었다. 신시도를 지나 선유도, 그리고 장자도까지 섬과 섬을 이은 다리를 건널 때마다 엄마와 내 마음도 하나로 이어졌다. 끝이 없이 이어지는 도로를 달려 바다의 수평선이 하늘에 닿을 때쯤 엄마와 나는 장자도 선착장에 도착해 있었다.


6화. 우리는 언제부터 사랑을 잃어버렸을까?


여름휴가 시즌이라 그런지 장자도 선착장으로 꾸준히 차들의 행렬이 이어졌다. 다리를 지나 회전 교차로에 진입했을 때 바로 눈앞에 지대가 높은 곳에 전망 좋은 3층 건물에 입점한 카페가 눈에 들어왔다.

"엄마, 저기 가면 좋겠다. 근데 저기를 어떻게 가는 줄 모르겠네."

나는 회전 교차로를 두 번이나 회전하고도 카페로 통하는 길을 찾지 못했다. 교차로에 세 번째 진입하자마자 곧바로 우측으로 내려가는 차량의 꽁무니를 보고 나서야 아리아드네가 건네준 실타래를 쫓아 나온 테세우스처럼 미로의 출구를 빠져나올 수 있었다. 선착장으로 향하는 좁은 길을 따라가다 좌회전하니 눈앞에 탁 트인 바다와 선착장 그리고 배들이 보였다. 3층 건물 앞에는 넓은 주차장이 갖추어져 있었다. 카페에 들어서서 2층 창가 자리를 맡아두고 음료를 주문한 후에 지팡이를 짚고 있는 엄마를 부축해 올라왔다. 계단을 오르지 않아도 돼서 1층이 편하긴 했지만, 엄마에게 2층에서 내려다보이는 탁 트인 바다 전경을 보여주고 싶은 욕심에서였다. 주문한 아이스 딸기 라테와 엄마가 주문한 수제 청귤 차를 들고 올라와 자리에 앉았다. 유리 머그잔을 들고 있는 엄마의 손이 떨릴 때마다 내 마음도 같이 움찔거렸다. 아빠 기일이 있던 오월 가족 모임 때보다 떨리는 증상이 심해졌다. 나는 다시 1층으로 내려가 가장 큰 굵기의 빨대를 가지고 올라왔다.

"엄마, 빨대로 드세요. 유리 머그잔이 미끄러워 불편하시겠다."

나는 마스크를 쓴 채로 엄마가 청귤 차를 빨대로 마시는 모습을 지켜보았다.

"집에서 에어컨 바람 밑에서 한숨 푹 쉬다가 올라가지. 날도 더운데."

"내일 동네 친구들이랑 골프 하기로 했어. 재윤이, 태훈이, 현섭이랑."

엄마를 보러 내려와서 자기들에게 전화 한 통도 안 하고 올라갔다고 서운해하는 오빠들 심리를 나는 모르겠다. 조용히 내려와서 엄마를 만나서 식사하고 올라가는 게 뭐가 본인들을 무시했다는 건지. 내가 엄마 집에서 뭐라도 챙겨갈까 봐 노심초사라도 하는 모양이었다. 내일 골프를 쳐야 하는 컨디션만 놓고 보면 당연히 장거리 운전을 피하고 집에서 쉬는 게 맞다. 그러나 그러고 싶지 않았다. 아니나 다를까, 연락도 없이 불쑥 내려왔다고 두 오빠에게 교대로 전화가 걸려 왔다. 아마도 내가 엄마 시야에서 사라지는 틈틈이 엄마는 두 오빠에게 서울서 진영이 왔다고 전화하셨을 게 뻔했다. 두 오빠에게 교대로 전화가 걸려 올 때마다 폴더블폰을 건네받은 나는 이렇게 구구절절 변명을 늘어놓았다.

"오빠들 일하느라 바쁘잖아. 신경 쓰게 하고 싶지 않아서. 오빠들은 번갈아 가면서 주중이고 주말이고 와서 엄마 밥도 사주고 차로 모시고 바람도 씌워주는 걸 뭐. 나야 늘 그렇지. 조용히 내려왔다가 올라가려고 그랬지."


엄마는 두 오빠와 통화하는 나를 우두커니 바라만 보고 계셨다.

"더운데 마스크 좀 벗어라. 답답하지 않니?"

"나, 마스크 벗으면 엄마 코로나 걸려서 안 돼."

나는 엄마와 내외하는 사이처럼 사선으로 한 테이블 떨어져 앉아 있었다. 엄마가 통창으로 시선을 돌려 바다를 바라보고 있는 사이 마스크를 얼른 내리고 아이스 딸기 라테를 마셨다. 시원하고 달콤한 청량감이 장자도까지 달려온 피로감을 보상해 주었다.

"근데, 엄마 밤에 혼자 자면 무섭지 않아?"

"문 다 걸어 잠그고 자는데 뭐."

"전주 큰 오빠 아파트에 같이 들어가서 사시면 편하고 좋잖아. 힘들게 밭일할 일도 없고."

"그건, 내가 답답해서 싫어."

엄마에게 안부 전화를 드릴 때면, 엄마는 우리 집이나 재윤이네 텃밭 아니면 집 앞 논둑 밭에서 이른 아침부터 저녁까지 일하셨다. 어떻게 아냐고? 엄마와 통화하다 보면 호미질 소리며 들판을 맘대로 휘젓고 다니는 바람 소리가 배경음으로, 자동으로 재생됐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있는 땅을 아깝게 놀리시냐고 말하셨다. 뭐라도 심으면, 그게 생강이 될 수도 있고 감자나 콩, 깨가 될 수도 있었다.

"지난번 창고에 도둑이 들었다며?"

엄마 혼자 사시는 집에 뭐 훔쳐 갈 게 있다고 창고에 도둑이 들었는지. 엄마 말대로 별것도 없는 창고를 쑥대밭으로 만들었다고 놀라서 내게 전화하셨다. 둘째 오빠는 엄마에게 창고에 따로 숨겨 놓은 현금이 있었는지 득달같이 캐묻고 나서야 사람을 불러서 낡은 창고 문을 새 함석 문으로 교체했다.

"엄마 혼자서 밥 먹으면 입맛 없겠다."

"동네 회관에 가서 수시로 같이 음식 해 먹으니까 괜찮아."

엄마와 내가 이층 창가 자리에 앉을 때만 해도 사람이 별로 없어 조용했는데, 어느새 북적이는 사람들로 소란스러워졌다. 4인용 탁자를 찾아 두리번거리던 여자들 일행 중 머리에 선글라스를 걸쳐 쓰고 얼굴엔 선크림을 덕지덕지 바른 한 명이 엄마와 나를 번갈아 바라보며 은근히 알아서 자리를 비켜달라는 듯 내 앞을 서성거렸다.

"진영아, 저 사람들 앉을자리가 없나 보다. 네가 이리로 와."

"괜찮아. 우리도 앉은 지 얼마 안 됐잖아. 1층에 내려가면 빈자리 있을 거야."

내가 무시하고 버티고 있자, 그녀는 한 번 째려보더니 모두 자리를 찾아 1층으로 다시 계단을 내려갔다.

"누가 보면 시어머니하고 며느리가 같이 놀러 온 줄 알겠네."

나는 엄마 말에 웃음이 터져 나와서 기침을 해대느라 의자에서 몸을 들썩이다가 음료를 바닥에 쏟았다. 지금처럼 미열이 있을 때는 아이스 딸기 라테 같은 차가운 음료를 마셔야 하는지, 아니면 미지근한 물을 마시는 게 좋을지 혼자 궁금해했다. 웃음기가 가시면서 미열로 인한 몽롱한 불쾌감이 밀려왔다.

"그렇게 토라진 사람처럼 돌아앉지나 말든지."

"안돼, 가뜩이나 나 혼자 내려온 거 경계하는데. 엄마 코로나 옮기면 오빠들한테 무슨 소릴 들으려고."


우리 집이 처음부터 가세가 기울진 않았다. '부자 삼대 못 간다.'란 속담이 일리가 있는 게 우리 집만 해도 여덟 필지나 되는 논을 두 오빠가 다 해 먹었다. 큰오빠가 하는 건설사가 부도나는 바람에 담보로 잡혀있던 논 세 필지가 날아갔다. 사이좋게 둘째 오빠는 세 필지를 가져다가 주식으로 탕진했다. 엄마 말대로 돈이 봄날 눈 녹듯 녹아내렸다. 엄마는 아빠가 오빠들에게 사업 자금 명목으로 논을 파는 걸 극구 반대하셨지만, 아빠는 사내대장부들이 뜻을 세우고 펼치려면 그깟 논이 대수냐며 두 오빠가 손을 벌릴 때마다 싫은 내색 없이 내어주셨다. 그때마다 나도 자식이라고 아빠 앞에서 항변해 봤지만 내 손에 쥐어진 건 아무것도 없었다. 결국 열 필지의 논이 손바뀜 했다.

"시집간 딸은 자식이 아닌가요? 민우, 민성이는 아빠 손주 아니에요?"

아빠는 농약 통을 짊어지려다 말고 나를 노려보았다. 엄마가 옆에서 나를 그만하라며 뜯어말렸다.

아빠는 당당하게 말씀하셨다.

"내가 피땀 흘려 일군 내 땅인데, 내 맘대로도 못 하냐? 어디 다 큰 계집애 목소리가 담장을 넘어가."

그리고 내 대답은 안중에도 없다는 듯이 말할 틈도 주지 않고 대문 밖으로 걸어 나가시며 중얼거렸다.

"에이, 이놈의 은행나무 잘라버리든가 해야지. 지저분해서야 원."

샛노란 은행잎들을 떨구고 있는 나무는 바닥에 은행잎과 은행들이 뒤엉켜있었다. 파란색 대문 오른쪽에 심은 은행나무는 민우가 태어난 해 첫 외손주를 봤다고 엄마가 심은 나무였다. 나는 아빠의 호통 소리를 듣고 나서 절대로 우는 모습을 보이지 않겠다며 앞마당에 주렁주렁 매달려 있는 감나무를 바라보며 입술을 깨물었다. 그리고 저녁을 먹고 가라고 팔을 잡아끄는 엄마의 애원도 뿌리치고 대문 밖을 나섰다. 아빠는 내 뒤통수에 대고 보란 듯이 큰소리로 소리를 질렀다.

"싹퉁머리 없는 년, 제 아비한테 인사도 안 하고 가네. 내가 너 그러라고 대학교 등록금 대준 줄 알아?"

햇빛에 까맣게 그을린 데다 각진 사각턱을 앙다문 모습의 아빠를 바라보며 나는 마지못해 고개를 숙였다. 운전석 문을 열다가 발 앞에 놓여 있는 녹슨 열쇠가 눈에 들어왔다. 집으로 가져가 정성스레 녹을 제거 한들 맞는 열쇠 통을 찾을 수 없으니 무용지물인 열쇠. 딱 내 신세처럼 느껴졌다.


아빠가 피땀 흘려 일궜다는 말은 반은 맞고 반은 틀렸다. 왜냐하면 열세 필지가 전답 중에 외할아버지가 엄마에게 물려주신 게 다섯 필지가 포함돼 있었기 때문이었다. 엄마는 세 필지만큼은 진영이 몫으로 넘겨주자고 아빠에게 사정해 봤지만, 씨알도 먹히지 않았다.

"남아 있는 세 필지는 내 목숨값이에요. 당신 가고 나면 나는 뭐 먹고살라고. 애들한테 다 퍼주면 나는 이 집 저 집 전전하며 천덕꾸러기 신세로 살란 말이에요?"

그때만큼은 엄마도 물러서지 않으셨다. 엄마가 1주일째 식음을 전폐하고 결국 실신해서 구급차에 실려 가고 나서야 아빠는 물러났다. 고래 심줄 같은 아빠의 고집을 엄마가 처음 꺾었을 때가 내가 대학에 합격하고 등록금을 내지 못해 발을 동동 구를 때였다.

아빠는 뉴욕 맨해튼 볼링 그린 공원 근처에 있다는 월스트리트 황소처럼, 본인은 한 번도 본 적이 없겠지만, 자기 생각을 굽히는 분이 아니었다. 오죽했으면 동네에서도 별명이 노빠꾸이셨을까.


마지막 남은 세 필지의 논도 농협에 오빠들이 엄마 앞으로 대출받은 상태였다. 엄마는 오빠들이 대출금 이자를 잘 내고 있고 대출도 곧 갚을 거라고 말했지만, 나는 두 오빠의 공수표를 절대 믿지 않았다. 그래서 오빠들에게 엄마를 위해서라도 대출을 갚으라고 말하면 그때마다 너는 그럴 자격이 없다고 무시했다. 출가외인이 말이 많다나. 큰오빠는 나를 을러대며 말했다.

"엄마가 가만히 계시는데 네까짓 게 뭐라고 껴들어 껴들긴."

두 오빠는 아빠의 유전자를 고스란히 물려받은 게 분명했다. 우리 집 남자들의 가훈을 누가 묻는다면 나는 주저 없이 이렇게 대답할 것이다.

'일은 저지르되 책임은 절대 지지 않기'




7화. 엄마~하고 부르면


혼자 있고 싶어서 내려온 여행길이었다. 늘 혼자서 묵묵히 삶을 살아내는 우리 엄마는 혼자 사는 외로움을 내색하는 법이 없으셨다. 하지만, 이 동네에 같은 해에 시집오셔서 줄곧 말동무로 지내오신 동갑내기 정 권사님이 밤사이 돌아가셨던 날에는 통화 끝에 흐느끼셨다.

"아들이 밤에 괜찮은지 한번 구다만 봤어도.... 이렇게 허망하게 가진 않았을 텐데."

그녀는 구급대원들의 들것에 실려 하얀 천으로 덮인 오랜 말동무에게 잘 가란 인사말도 못 건네고 그렇게 허무하게 떠나보내셨다.

나는 아이스 딸기 라테를 다 마신 후 빈 잔을 들고 엄마 맞은편에 앉았다. 엄마는 어젯밤 꿈에 아빠가 나오더니 오늘 착한 딸이 서울서 내려와 아침, 점심도 해결해 주고 이렇게 바다가 내려다보이는 시원한 카페에서 청귤 차까지 마시는 호사를 누린다며 좋아하셨다.

"너희 아버지가 살아생전에 뭔 일로 생색내고 싶을 때면 당신은 별로 못 누려보고 나만 좋은 일 시키다 가신다고 하셨었는데. 그 말이 틀린 말은 아니네."

엄마는 돌아가신 아버지 생각이 나시는 모양이었다.

"엄마, 나이를 먹어도 사는 건 익숙해지는 법이 없는 거 같아. 늘 흔들리고 넘어지고...."

"사는 게, 어디 쉽니."

나는 맞다고 고개를 주억거렸다. 엄마가 내 왼손을 끌어다 엄마의 오른손으로 말없이 다독거려 주셨다. 가끔 혼자 사는 엄마를 떠올릴 때면 이렇게 내가 누리고 사는 문화생활이란 걸 모르고 사셔도 되는 걸까 안타까운 생각이 들었다. 그런 내 생각을 내처 꺼내 말하면,

"지금 네 나이였을 때쯤엔 동네 계 모임에서 많이 놀러 다녔지."

농한기에 잠깐 짬 내서 가신 곳이 얼마나 되셨을까. 나는 애들 방학 때면 남편과 아이들과 워터파크나 에버랜드도 가고 짬짬이 해외여행도 다니는데, 엄마는 괜찮다는데 딸인 내가 왜 억울하고 서러운 기분이 드는지 모르겠다

카페에서 더 앉아 있기 지루해진 엄마와 나는 밖으로 나왔다. 찌는 듯한 무더위의 기세는 바다에서 선착장 길목을 타고 불어오는 바람에 한풀 꺾여 있었다. 오른손에 지팡이를 쥔 엄마를 부축하며 선착장 끝까지 걸어갔다. 작은 어선들이 밀물에 맞춰 채비를 서두르고 있었다.

"어휴, 하루 종일 날이 그렇게 사납더니만."

"이젠 시원해져서 밖에서 걸을 만하다 엄마."

엄마와 나는 선착장 끝에 서 있었다. 발아래에서 물이 철렁거릴 때마다 아래를 내려다보면 바닷물 속으로 뛰어들 듯 아찔한 기분이 들었다. 등 뒤에 보이지 않는 손길이 엄마와 나를 금방이라도 바닷물 속으로 확 밀어버릴 것 같아 자꾸 뒤를 돌아다봤다.

"진영아, 엄마가 미안하다."

나는 엄마가 미안하다고 하는 말뜻을 금세 알아차렸다. 나는 목이 메어와 잠시 입을 떼지 못했다.

"이젠 괜찮아 엄마. 원래 내 것도 아닌 걸 뭐."

"오빠들이 대출 다 갚고 나면...."

엄마는 무슨 말인가를 이어서 더 하시려다가 말을 삼켰다.

"엄마, 나 어렸을 때 무더운 여름날이었는데, 집에는 아무도 없고 작은 방에서 혼자 자다가 가위에 눌린 적이 있었거든."

"그랬어?"

"너무 무섭고 죽는 것처럼 힘들었을 때, 내가 나오지 않는 목소리를 쥐어짜서 '엄마~'하고 불렀는데, 그때 엄마가 내 옆에 달려오셨어. 그래서 가위에서 풀려났는데. 눈을 뜨고 보니까 엄마는 옆에 없었어. 그런데도 뭔가 마음에 안심이 됐어."

"네가 낮잠을 길게 잤나 보다. 그때 엄마가 네 곁에 있었으면 더 좋았을 것을."

머리가 희끗한 중년 부부가 엄마와 내가 서 있는 쪽으로 걸어오길래 내 휴대폰을 건네며 사진을 찍어달라고 부탁했다. 두 분은 챙이 넓은 모자를 쓰고 얼굴에 선크림을 바른 채로 다정하게 손을 잡고 있었다.

"엄마 우리 오랜만에 같이 사진 찍을까?"

"네, 두 분 따라 해 보세요. 충~치이~"

사진을 찍기 위해 허리가 굽은 채로 지팡이에 의지해 바람 부는 선착장에 서 있는 엄마가 힘들어 보였다. 나는 차에 엄마의 실버 카를 싣고 오지 않은 걸 후회했다. 다정하게 걷는 두 분을 바라보는 엄마의 눈에서 나는 외로움을 엿보았다.


어느새 카페 앞 주차장을 가득 메우고 있던 차들도 듬성듬성 젖니가 빠진 아이의 입안처럼 빈자리를 만들며 사라졌다. 나는 차에 시동을 켜고 뒷좌석에 앉은 엄마의 안전띠를 착용해 드렸다. 집으로 돌아오자마자 엄마는 내일 개학을 앞둔 초등학생처럼 밀린 숙제를 하듯 쉬지도 않고 바삐 몸을 움직이셨다. 민우, 민성이가 좋아한다며 볶은 땅콩을 넣고 오징어채를 두 봉지나 볶으셨다. 젊은 남자도 김치통을 넣고 빼내기 힘든 뚜껑형 김치냉장고에서 묵은지 한 통을 꺼내시려는 엄마를 내가 말려야 했다.

"이 나박김치는 이번에 담갔다. 택배로 보내주려고 했는데 내려온 김에 가져가라."

묵은지 옆에 나란히 나박김치를 내놓으셨다. 그리곤 내가 화장실에 다녀온 사이, 어디로 사라졌나 싶었는데, 밭에서 상추와 시금치, 그리고 파를 캐서 종이 상자에 담아 내어놓으셨다. 나는 자동차 트렁크를 열고 우리 엄마가 딸에게 내어준 선물들을 차곡차곡 넣었다.


늦은 오후 무렵, 이마를 짚어보니 열이 오르기 시작했다. 갯벌에 사는 민꽃게가 지나가는 고둥이나 조개를 잡아먹으려고 힘센 집게발을 치켜들고 스멀스멀 올라오는 것처럼 나빠진 컨디션이 존재감을 드러냈다. 엄마는 재차 자고 가라고 떠나려는 나를 붙잡으셨지만 이제 작전상 후퇴를 해야 할 상황이었다. 복순이는 앞마당 복숭아나무 아래에 멀찍하게 떨어져 앉아 꼬리를 연신 흔들어댔다. 그러나 잠시 후 차 시동 소리에도 깜짝 놀라 혼비백산하는 녀석을 보니 보기만 해도 웃음이 나왔다. 저렇게 강단이 약해서야 밤손님을 어떻게 상대하나, 그러니 지난번 창고에 든 도둑 앞에서도 꼬리를 내렸겠지.

"복순아, 할머니 잘 지켜드려."

엄마는 내 차가 후진으로 대문을 빠져나와 출발할 때까지 지켜보고 계셨다. 나는 차에서 내려 얼른 엄마를 안아드렸다.

"사랑해요. 엄마. 내일 서울 올라갈 때 전화할게."

"그래, 운전 조심해서 올라가고. 내일 대근하다 싶으면 휴게소에서 꼭 한숨 붙이고 가."

차가 마을 앞다리를 건너 신작로로 좌회전할 때까지 엄마는 대문 앞에서 복순이와 나란히 서 계셨다.


8화. 부모의 임종을 지켜보는 사주

2012년의 봄, 나는 대학원 석사 2년 차 과정을 시작했다. 2010년까지만 해도 세 필지 남은 논농사를 거뜬히 지으셨던 아빠는 그해 겨울 기침, 가래로 감기인 줄 알았던 증상이 호흡곤란으로 이어지면서 폐렴으로 입원하셨다. 엄마 말로는 겨울철에 들어서 아빠가 요즘 기운이 없다며 식사량도 줄고 끼니를 거르기도 하셨다고 말했다. 밥을 두 공기씩 드시던 아빠였는데. 담당 의사는 고령인 데다가 오랜 흡연으로 인한 폐 기능 저하로 인한 만성폐쇄성폐질환 합병증 폐렴이라고 진단했다. 2011년, 폐렴을 털고 일어나 병원을 퇴원해서 농사일을 시작하겠다고 벼르시던 아빠의 바람과는 달리, 퇴원했던 아빠는 입, 퇴원을 반복하셨다. 한 번 병원에 다녀올 때마다 아빠의 기력은 눈에 띄게 떨어졌고, 살이 10kg이나 빠지면서 그 혈색 좋은 얼굴도 검붉은 빛으로 변해갔다.

2012년 1월 20일 설 연휴를 앞두고 아빠는 만성 폐쇄성 폐질환(COPD)이 심해져 전주에 있는 대학병원에 입원하셨다. 더 이상 몸에 붙이는 마약성 진통제 패치로는 통증이 줄어들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내가 의식이 있는 상태의 아빠의 마지막 모습을 본 건 작은 오빠와 교대해 주려고 병실에 막 문을 열고 들어선 순간이었다. 2명의 의사와 간호사가 아빠 머리맡에 서 있었다. 한 명의 의사가 아빠의 머리가 좌우로 움직이지 않게 붙잡고 나머지 의사는 입안에 금속으로 된 기구를 넣으려고 할 때 아빠의 두 눈은 공포로 흔들렸다. 말하지 못하는 상태에서 몸부림치는 표정은 두려움으로 일그러져갔다. 아빠 스스로 호흡하는 게 어렵다는 의료진의 판단이었다. 의사가 후두경 날을 이용하여 혀를 왼쪽으로 밀어젖히고 성문을 확인하고는 그 틈으로 기관 내 튜브를 삽입했다. 튜브를 의료용 테이프로 X자 형태로 입 주변에 고정하고는 인공호흡기를 연결했다. 병실에 들어서서 아빠하고 인사를 나눌 사이도 없이 이 모든 과정이 불과 몇 분 만에 이루어졌다. 그리고 일반 병실에 입원해 있던 아빠는 병실 침대에 누운 채로 중환자실로 이송됐다.


그날 아침, 나는 대학원 석사과정 2년 차 3학기 수업을 듣기 위해 전주역 안에 서울행 KTX 열차를 기다리고 있었다. 열차 탑승 시간까지는 아직 30분 정도 여유가 있었다. 서울로 올라가야 하는 길은 마음이 편치 않았다. 다음날이 어린이날 연휴라 기차역에는 가족 단위 여행객이 많았다. 아이 엄마가 가만히 좀 의자에 앉아 있으라고 말했는데도, 고라니처럼 날뛰는 아이들을 의자에 붙들어 둘 순 없었다. 서로의 품에 안겨 전주로 여행을 온 건지 아니면 다른 곳으로 여행을 떠나는 건지 알 수 없는 젊은 연인들의 얼굴은 설렘과 기대감으로 충만한 얼굴이었다. 나는 의자에 앉아 대학원 수업 교재 H. Scott Fogler의 저서 <화학반응공학(Elements of Chemical Reaction Engineering)>의 비등온 반응기 설계에 관한 내용을 눈으로 흩고 있었다. 분명 눈으로 따라가며 읽어가는데 운전면허를 따고 처음 도로로 차를 몰고 나왔을 때처럼 두려움이 밀려왔다. 한 문장과 다른 문장 사이 거리가 저만치 멀어져서 좁혀지질 않았다. 영어 문해력이 문제인 초등학생 같았다. 속으로는 대학원 수업 핑계를 대고 잠시라도 중환자실에서 벗어날 수 있어 그나마 숨통이 트인다는 철부지 같은 생각을 스스로 나무라는 중이었다. 그때 중환자실을 지키고 있던 큰 오빠에게서 전화가 걸려 왔다.

"진영아..."

나를 부르는 오빠의 목소리를 듣자마자 가슴이 철렁 내려앉았다. 중환자실에 들어가던 날 의사들이 와서 기관지 삽관하려고 했을 때 고개를 저으며 두려워하던 아버지의 눈빛이 떠올랐다. 중환자실에 들어가 면회할 때마다 나는 무서웠다. 내가 중환자실을 지킬 때 아버지가 갑자기 돌아가시면 어쩌나. 그때를 맞이하면 어떻게 해야 하나. 아버지가 돌아가시고 더 이상, 이 세상에 존재하지 않는 순간을 떠올릴 때마다, 상실이 빚어낸 두려움은 엄청난 중력으로 나를 붙들어서 단단한 콘크리트 바닥에 거꾸로 내던지곤 했었다.

"아버지 방금 돌아가셨다."

큰오빠의 목소리를 듣고 나는 아무 말도 할 수 없었다. 80 데시벨(dB)쯤 되는 사람들이 떠들어대는 유색 소음이 가득한 역사 안이 진공상태가 된 것처럼 순간 귀가 먹먹해지면서 아무 소리도 들리질 않았다.

'올 것이 왔구나.'

나는 솜사탕 하나를 서로 먹겠다고 울고불고하는 두 남자아이와 충돌을 피해 술 취한 사람처럼 비틀거리며 역사 밖으로 나갔다. 숨을 쉴 수가 없어서였다.


장례식장에 빈소를 차리고, 장례 일정을 상담하면서 어머니는 아버지가 중환자실에 들어가고 나서 미리 준비해 두었던 안동포(삼베)를 큰오빠에게 시골집에서 가져오게 했다.

"어머니가 정성껏 준비하신 겁니다."

큰오빠는 장례지도사에게 수의가 담긴 붉은색 보자기를 건넸다. 지도사는 보자기를 풀자 옅은 황금색 수의가 모습을 드러냈다.


장례 둘째 날 오후 네 시쯤 돼서 이종사촌 경수가 큰 이모를 모시고 빈소를 방문했다.

조문을 마친 큰 이모가 흐느끼고 계신 엄마의 손을 잡고 말씀하셨다.

"부모가 돌아가실 때 임종을 지켜보는 자식의 사주는 정해져 있다. 임종을 지켜보는 자식이 효자야."

아빠의 임종을 지키지 못했다는 죄책감이 밀려들었다.

"울면서 보내드리지 마라. 영혼이 돌아보며 떠나지 못한다."

큰 이모는 손수건으로 눈물을 훔치는 엄마의 등을 토닥이셨다.



9화. 진영이는 운이 좋아


골프장 근처에 숙소를 검색하면 편할 것을, 일을 거꾸로 하려고 그랬는지 평점이 괜찮은 모텔을 찾아 도착해 보니 골프장과 정반대에 자리 잡고 있었다. 그걸 도착하고 나서야 알아채다니.... 내가 예약한 곳은 인터넷에 올라온 말끔한 외양과는 다르게 연식이 돼 보이는 무인텔이었다. 이미 결제까지 해버렸고 지쳐있어서 취소하고 골프장 초입의 모텔로 숙소를 옮기는 건 애초에 포기해 버렸다. 무인텔 왼쪽에 소불고기 식당과 맞은편에 편의점이 하나 보였고, 오른편에는 삼겹살집이 있었다. 저녁 식당은 소불고기 집으로 정했다. 오후 5시로 아직 저녁 먹기에는 이른 시간이라 홀 안에는 두 테이블만 손님이 들어 있었다. 소불고기 1인분을 주문하고 나서 떠오른 고민은 이른 저녁을 먹고 인도어 연습장을 찾아가서 연습해야 하느냐였다. 어차피 평소 실력대로 쳐야겠지만 그래도 내일 경기를 위해서 한 시간 정도는 연습해야 망신을 면할 거 같았다. 소불고기는 생각만큼 부드럽지도, 집 나간 며느리가 돌아올 만큼 맛도 아니었다. 그리고 외지인, 그것도 여자 혼자 식사를 하니 주변 테이블에서 술을 마시는 남자들의 힐끔거리는 시선이 느껴져 불편했다. 날이 무더운 데다가 코로나로 인한 두통과 미열이 있어서 감기약을 먹기 위해 속이 쓰리지 않을 정도만 대충 먹고 얼른 침대에 돌아가 쉬고 싶은 생각뿐이었다. 하지만 두통과 미열보다도 내일 라운딩이었다. 모텔로 오는 경로에 눈에 스치고 지나갔던 인도어 연습장이 눈앞에 아른거렸다.

'차라리 배고픈걸 좀 참고, 미열과 두통이 나는 몸을 타박해서라도, 거길 들려 연습하고 숙소로 왔다면 좋았을 텐데.'

집중력과 판단력이 저하된 게 코로나바이러스 때문인 게 분명했다. 숙소 예약도 그렇고 인도어 연습장에 들르는 일만 해도 그랬다. 그러나 금세 가까운 거리에 연습장이 있을 수도 있지 않을까 하는 생각이 밀려들었다. 나는 오늘의 운세를 믿어보기로 하고 연습장을 검색해 봤다.

'그러면 그렇지. 역시 진영이는 운이 좋아.'

마침 20분 거리에 연습장이 하나 있었다. 무인텔에서 차를 빼서 내비게이션 앱을 열고 연습장을 찾아 출발했다. 연습장으로 가는 길은 저수지를 따라 구불구불하게 이어진 길이었다. 차를 타고 드라이브를 나선 연인들이 이 길을 달린다면 분명 둘 다 탄성을 지를 만큼 흡족한 풍경이 한적한 저수지 둘레길 도로를 따라 펼쳐져 있었다. 차량 통행이 적고 무엇보다 오른쪽으로 보이는 탁 트인 저수지가 한껏 마음을 들뜨게 했다.

'김제에 이런 멋진 장소가 있었나?'

내가 지금 차를 타고 달리는 이곳이 내가 태어나서 자라면 줄곧 알고 있던 곳이 맞나 싶을 정도였다. 파울루 코엘류가 말했다.

"길을 잃는다는 것은 곧 새로운 길을 발견한다는 뜻이다."

여행의 묘미는 낯선 여행지 골목길에서 길을 잃어버리는 순간 시작된다는 말이겠지.

호숫가 길을 따라 달리다 보니 왼쪽에 예쁜 카페가 한눈에 들어왔다. 속도를 줄이며 뒤따라오는 차가 있는지 살폈다. 나는 카페 이름을 보고 나도 모르게 '아'하고 단말마의 비명을 질렀다. 차 안에 어차피 나 혼자뿐이니. 내가 판소리 춘향가를 완창 한다고 한들 누가 나무라겠는가.

'카페 오디세이아'

오디세이아라면 그 호메로스가 쓴 오디세이아를 말하는 거겠지? 평소의 호기심 많은 나라면 가던 길을 멈추고 카페 안으로 들어갔을 것이었다. 카페 사장님이 공을 들인 내부 인테리어에 감탄하면서 살아온 날들의 회한을 반추하며 뜨거운 뱅쇼의 향기에 취해 있을 터였다. 나와 다르게 남편은 카페라면 칠색 팔색을 했다. 그 이유는 사람들이 시끄럽게 제 할 말만 지껄이면서 공기도 좋지 않은 곳에 모여 돈을 쓰느냐였다. 이렇게 생각도 다르고 삶의 방식도 다른 두 남녀가 아들을 둘씩이나 낳고 15년 넘게 한 이불 덮고 살고 있다니. 이렇게 탄식하듯 뱉는 소리를 누가 듣는다면, "그렇게 다르니까 15년 넘게 버티고 사셨네요."라고 말할지도 모르겠다.

해는 뉘엿뉘엿 기울고 아직 연습장까지는 10분을 더 달려야 했다. 막다른 골목길로 끊어졌다가도 다시 집요하게 이어지는 낯선 동네의 좁은 골목길을 내비게이션은 평소에 산책을 시키는 데 인색했던 주인에게 불만이 많았던 보더 콜리(Border Collie) 견종처럼 자기 꼬리를 물려고 뱅뱅 돌게 만들었다. 결국 세 번째 같은 길을 헤매다가 내비게이션 안내에 따라 도착한 곳은 인도어 연습장이 아니라 한 펜션이었다. 펜션을 지나쳐 좀 더 위쪽으로 올라가니 넓은 동그란 회랑을 따라 동그랗게 원형으로 늘어선 인디언 텐트가 여럿 보였다. 좀 더 오른쪽으로 시선을 넓히자, 비거리가 짧은 인도어 골프 연습장이 하나 보였다. 내비게이션이 고심 끝에 안내해 준 골프 연습장이었다.

"네가 꼭 오늘 저녁에 골프 연습을 기어이 하겠다면 여기서라도 한번 해볼래?"라는 내비게이션의 목소리가 에코로 들려왔다. 거리가 30미터나 될법했다. 펜션에서 숙박하는 가족 단위의 손님들이 이용하는 편의시설이었다.

세 번이나 내비게이션 말만 믿고 빙빙 돌아 찾은 곳인데, 너무나 허망한 결과에 나는 헛웃음만 나왔다. 결국 숙소에 일찍 들어가 쉬지도 못하고 시간만 낭비한 셈이었다.

'엄마가 집에서 쉬고 가라고 그렇게 말렸는데도 뿌리치고 나오더라니.'

쉬라고 보내온 몸의 신호를 무시한 벌을 받는구나 싶어 나는 가쁜 숨을 한번 몰아쉬고 미련 없이 차에 올라탔다.


숙소로 들어와 TV를 켰다. 잠을 자기엔 이른 시간이었다. 창문을 열어 환기하고 영화 채널을 찾다가 골프 채널을 틀었다가 드라마를 잠시 봤다. 시간은 재깍재깍 약속된 자정을 향해 달려가고 있었다. 자정이 넘어 사라질 호박 마차나 드레스, 그리고 잃어버릴 유리구두가 없어서 유감이었다. 가족이 없이 오롯이 혼자 보내는 밤의 시간은 특별할 거란 기대는 그걸로 끝이었다. 마스크 쓰고 엄마 옆에서 자다가 내일 일어나서 골프 치러 가도 되는데. 괜히 싸구려 감성에 젖어 무인텔에서 혼자 자나 싶어 스스로 한심하다는 생각도 들었다. 그때, 동창 현섭에게서 전화가 연속 걸려 왔다. 나는 만사가 귀찮아져 '몇 번 울리다 말겠지.'라며 외면했다. 그러나 휴대전화의 사운드 케틀 벨 소리는 지지 않고 집요하게 주인을 불러 세웠다.

"응, 현섭아. 전화했었네. 잠깐 내가 잠들었었나 봐."

"지금 뭐 해? 나랑 맥주나 한잔할래? 내가 너 있는 곳으로 갈게."

나는 맥주를 마시러 이곳으로 나온다는 현섭에게 뭐라 말해야 할지 머릿속이 멍해져서 적당한 할 말을 떠올리지 못했다.

"진영아?"

"내가 감기약만 먹었다 하면 정신을 못 차려서. 지금 비몽사몽이야. 미안해."

"아직 코로나 증상이 남았나 보네. 그럼, 내일 골프장에서 봐."

"그래, 이른 아침 라운딩이라 너도 얼른 쉬어."

남자의 심리를 모르는 게 아니었다. 왜 아니겠는가? 나는 대학교 1학년 때 현섭이와 잠깐 사귄 적이 있었다. 이루어지지 못한 사랑의 여주인공이 눈앞에 나타났으니 자기 혼자 북 치고 장구치고 설렜겠지. 그래, 옛 생각에 설레서 술이라도 한잔 같이하고 싶은 마음이 들었을 것이다.

'그때 왜 헤어졌었지. 현섭이랑?"

대학 신입생 때의 나를 떠올리다 보니 나랑 친했던 후배 경아의 얼굴이 제일 먼저 떠올랐다. 그리고 경아와 팔짱을 끼고 걷던 현섭이의 난감한 표정도 어렴풋이 생각났다. 현섭이는 나랑 사귈 때 경아와 양다리를 걸친 걸 내게 들켰기 때문이었다. 사람은 바뀌는 법이 없다는 게 내 지론이다. 당시 현섭이가 잘못했다고 매달렸지만, 한 번이 쉽지, 두 번 세 번 양다리 걸치지 못할 이유가 없었다. 그리고 결정적인 이유는 그 양다리의 상대가 후배 경아였기 때문이었는지 모른다. 두 사람 다 내가 좋아했던 사람이어서 배신감은 두 배로 나에게 생채기를 내버렸다. 그리고 그는 현영이 와도 1년 사귀다가 헤어졌다고 들었다. 역시 내 생각이 맞았다.



10화. 홀로 잠들어야 한다면


밤 11시가 넘어서 코로나 감기약을 추가로 한 봉지 더 먹은 후 씻기가 귀찮아 잠시 누워있었다. 내일 아침 티업시간은 7시 15분이라 아침에 씻으려면 좀 빠듯한 시간대였다. 나는 정말 딱 5분만 눈을 감았다가 일어나 씻기로 마음먹었다. 나는 묵직한 눈가가 갑자기 가렵고 따갑기까지 해서 항생제 점안액을 챙겨 오지 않은 걸 후회하고 있었다. 엄마 무릎을 베개 삼아 누워 있는 기분이 들었다. 지금 내 옆에 엄마가 앉아 있는 것 같은 기분이었다.

"엄마, 딱 5분만 있다가 씻을게."

눈을 감고 있으려니, 몸이 침대 매트리스 아래로 아무런 저항 없이 가라앉으며 스며드는 느낌이 들었다. 그건 마치 학교에 다녀왔을 때 집에 아무도 없는데, 장독대에 놓인 주황색 다라이안에 담겨 있는 물에, 한낮의 열기로 뜨뜻미지근하게 데워진, 얼굴을 담그고 얼마나 숨을 오래 참을 수 있는지 시험해 보았다. 주위의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 세상과는 다른 차원인 공간 속에 숨을 참고 잠시 머무는 듯한 기분이었다.


나와 미희의 화학공학과 석사 논문 심사가 있던 날이었다. 우리는 제2공학관 5층 엘리베이터에서 내렸는데, 복도 끝에 바로 우리의 지도교수인 유 교수의 연구실이 있었다. 4층에 학생들의 실험실(Lab)이 있어서 계단을 오르내리며 웃고 떠드는 학생들의 목소리가 간헐적으로 들려왔다가 사라졌다. 미희의 손에는 교수님께 드릴 따뜻한 아메리카노가 들려있었고, 나의 손에는 학교 앞 일식집 츠키요미에서 예약해 놓은 세 분 교수님의 점심인 고급 일식 도시락이 들려있었다. 연구실로 들어가 심사 위원단의 자리에 점심 도시락과 커피를 가지런하게 세팅해 놓았다. 각각의 자리엔 논문 심사본과 함께 과일 도시락과 피로 해소제 음료와 다과가 준비돼 있었다. 발표할 대학원생의 자리엔 석사 논문 심사를 받을 발표 자료(PPT)가 담긴 USB와 레이저 포인터 그리고 실험 데이터 원본이 놓여있었다. 이제 교수님이 들어와 점심을 드시면 곧이어 논문 심사가 시작될 예정이었다. 모든 준비는 끝났다. 상기된 나의 표정과는 달리 미희는 파티에 초대된 게스트와 같이 들떠있었다. 느긋하고 여유로운, 그래서 오늘 논문 심사는 나 혼자 받는 착각이 들 정도였다.


우리가 유 교수의 연구실에서 논문 심사 준비를 마치고 밖으로 나왔을 때 복도 중간쯤에 세 명의 남자가 연구실 쪽으로 다가오는 게 보였다. 이번 논문 심사를 맡은 심사 위원단이었다. 키가 껑충하니 큰 남자가 심사 위원장을 맡은 이 교수님이셨고, 오른쪽에 서 있는 약간 호리호리한 남자가 지도 교수 유 교수 그리고 세 명의 교수님 중에서 키가 제일 작은 분이 부심 교수를 맡고 있으며 유 교수가 아끼는 후배 교수인 민 교수님이었다

미희는 한치의 머뭇거림도 없이 약속 장소에서 남자 친구를 알아보고 얼굴이 환해진 소녀처럼 교수진을 향해 가벼운 몸놀림으로 다가갔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대학원 석사과정 2년 차 손미희입니다. 오늘 논문 심사 잘 부탁드립니다."

'너무 당돌한 거 아닌가?'

나는 여태 화학공학과 선배들 심사받는 걸 지켜봤지만 심사받는 사람치고 저렇게 자신감이 넘치는 사람은 미희가 처음이었다. 그녀는 흰색 블라우스에 검정 재킷과 같은 색 미니스커트를 단정하게 차려입은 상태로 깍듯하게 허리를 숙여 인사를 했다. 평소 간드러진 목소리의 미희와는 또 다른 모습이었다. 평소에 나라면 절대로 할 수 없는 행동을 그녀는 아무렇지 않은 듯 소화해 냈다. 세 남자 중에 제일 먼저 뒤를 돌아본 남자는 백발의 유 교수였다. 쉿 넷의 나이에 백발의 유 교수가 미희를 돌아보고 왼손으로 안경을 만지작거리며 반가워하는 표정을 짓는 게 보였다. 뒤에서 머뭇거리던 나도 심사 위원단 교수들에게 인사하기 위해 그녀가 있는 곳으로 빠른 걸음으로 움직였다.

"안녕하세요, 교수님. 석사과정 한 진영입니다."

나는 심사 위원장인 이 교수와 유 교수님, 부심인 민 교수님에게 차례로 고개를 숙여 인사를 드렸다.


발표순서는 내가 먼저였다. 미희는 복도에 놓여있는 의자에 앉아 자신의 차례를 기다렸다. 미용실에서 파마를 받기 위해 잡지를 의미 없이 뒤적거리며 자신의 차례가 되길 기다리는 사람의 표정이었다. 천하 태평한 모습의 미희를 뒤로하고 나는 연구실 문을 열고 들어섰다. 준비된 논문 발표를 마치자, 심사 위원장인 이 교수님이 <하이브리드 나노 촉매를 이용한 고효율 수소 생산 및 안정성 향상에 관한 연구> 주제에 관한 질문을 던졌다.

"수고 많았어요. 데이터를 보니 재현성 확인을 위해 많은 실험을 반복해야 했을 거 같은데.... 오차 범위가 클 수밖에 없었던 변수를 특정하고 그 원인에 대해 설명해 봐요."

"네, 교수님. 오차 범위가 클 수밖에 없었던 변수는 세척과 건조과정에서 습도와 온도였고 그 원인은 일정하게 통제하기가 어려웠기 때문입니다.

"고생 많았어요."

심사 위원장인 이 교수의 얼굴에 그 정도면 됐다는 고개의 주억거림이 있었다. 그러자 부임 교수인 민 교수님의 유 교수를 한 번 바라본 후 질문을 이어 나갔다.

"본 논문에서는 촉매의 비표면적 측정이 핵심이라고 봐요. 기공 구조가 수소 탈착 속도에 미치는 영향을 나한테 쉽게 설명해 봐요.

민 교수님의 질문은 예상 질문으로 준비해 둔 거라서 나는 막힘없이 대답을 이어갔다.

"제가 실험을 하면서 비표면적이 넓다고 해서 탈착 속도가 무조건 빨라지는 건 아니라는 사실을 발견했습니다. 오히려 기공이 너무 깊고 미세할수록 수소가 갇혀서.... 고심 끝에 기공의 입구를 깔때기 모양으로 넓히면 어떨지 생각했습니다. 제 생각대로 기존 촉매 대비 탈착 속도가 20% 이상 잘 나왔고 이 사실을 근거로 고효율 수술 생산이 가능한 실질적인 토대가 마련됐다고 판단했습니다."

"음, 실험 데이터를 기반으로 좋은 깨달음을 얻었군요. 훌륭합니다."

민 교수님이 유 교수님을 바라보며 고개를 끄덕였다. 이제 주임 교수님인 유 교수님이 질문을 던질 차례였다. 평소에 유 교수님의 성격이라면 대답하기 만만한 질문을 던지실 분이 아니셨다. 나는 앞선 두 분 교수님과는 달리 긴장이 되며 마른침을 삼켰다. 민 교수님이 그런 나를 바라보고 탁자 위에 놓은 생수를 마시라는 손짓을 보냈다. 나는 유 교수님의 얼굴에서 눈을 떼지 않은 채, 생수병을 들어 얼른 한 모금 마셨다. 너무 급하게 마시느라 그만 사레들려 재채기가 연이어 터져 나왔다. 유 교수는 그런 나를 바라보며 안경을 벗어 안경닦이로 안경을 닦더니 못마땅하다는 듯이 안경을 탁자에 던지며 얼굴을 찡그렸다. 나는 얼굴이 빨갛게 달아올랐고 내가 숨을 고르기도 전에 유 교수님이 질문을 시작했다.

"자네가 설계한 이 반응기 말이야. Fogler의 저서 비등온 반응기 설계 시 에너지 밸런스 관점에서 보자면, 이 논문의 그래프를 보면 '상부 정지점' 근처에서 헐떡거리면서 작동하고 있는데, 냉매 온도가 2도 떨어지면 반응기가 꺼져버릴 텐데. 자네 논문에서는 불안정성에 대한 언급이 전혀 없어. 이걸 어떻게 설명할 텐가?"

유 교수님 다운 질문이라는 생각은 개뿔, 머릿속이 순간 하얘져 말을 버벅대고 있는 나를 발견했다.

"저는 이 논문에서 촉매의 선택성에 초점을 맞춰서..."

유 교수님이 얼버무리듯 하는 내 대답을 참지 못하고 말을 끊고 가소롭다는 듯이 질문을 이어갔다.

"선택성이라.... 아니, 반응기가 꺼져 공정이 끝나버린 상태에서 선택성이 도대체 무슨 의미가 있다는 건가?"

유 교수님의 질문은 살을 베이듯 날카로운 질문이어서 '툭'하고 나 스스로 논문에 대해 자신했던 믿음의 확신이 끊어져 버렸다. 실험 중에 몇 번 온도가 갑자기 떨어지며 반응이 멈추고 했었지만, 나는 촉매의 일시적인 비활성화로 판단하고 아무 생각 없이 데이터에서 제외한 게 사실이었다.

그때, 젊은 민 교수님이 심사장의 얼어붙은 분위기를 녹이는 말을 던지셨다.

"역시, 유 교수님께서 비등온 반응기 설계에서 중요한 열적 안정성을 짚어 주셨네요. 한 가지 생각해 볼 점은 이 논문에 사용한 촉매는 일반 촉매가 아니라 하이브리드 나노 촉매라서 높은 열 전도성을 가진 메조 기공 구조가 열역학적 불안정성을 상쇄해 줬을 법도 한데. 송진영 선생님 생각은 어때요?"

민 교수님은 촉매가 가진 물리적 특성이 시스템의 안정에 일조했다는 힌트를 넌지시 들려주는 물음이었다.

"네, 제가 합성한 하이브리드 나노 구조는 일반 벌크 촉매가 아니라 열전도율이 3배 이상 높아서 그 온도 구간에서 시스템이 셧다운 되거나 폭주하지 않습니다. 따라서 반응기 내부에서 발생하는 열이 촉매 입자 내에 갇히지 않고 외부로 즉시 열을 방출하게 됩니다. 이 기전을 에너지 수지 수식에 반영하여 논문을 보완하도록 하겠습니다."

아끼는 후배 민 교수의 개입에 유 교수는 화를 누그러뜨리는 듯 보였다.

"자네, 다음 주까지 시뮬레이션 데이터를 다시 뽑아서 제출하게."

"네, 바로 준비해서 데이터 제출하겠습니다."

심사 위원장인 이 교수님이 유 교수님과 민 교수님의 얼굴을 바라보며 추가 질문이 있는지를 확인 후 내게 말했다.

"고생했어요. 송진영 선생은 그만 나가보고 이 미희 선생 들어오라고 하세요."

“네, 감사합니다. 교수님.”

나는 90도로 상체를 숙여 세 분의 교수님께 인사를 드렸다. 문을 열고 나오면서 손수건으로 이마에 맺힌 땀을 닦으니, 이제야 심사가 끝났음이 실감이 났다. 심사장으로 들어가려고 일어서는 미희를 붙들고 나는 귓속말로 이렇게 말했다.

"유 교수님 질문이 송곳 같으셔. 미희야, 너도 마음 단단히 먹어."

오후 3시 40분쯤에 미희의 발표가 마쳤다. 생각보다 이른 시간에 끝났다. 문을 열고 나오는 미희의 표정에 긴장이나 주눅 같은 표정은 찾아볼 수 없었다. 심사 전 미희를 붙들고 경고한 내 말이 무색해졌다.


미희 단골집이라는 일식집 무율담에 들어서자 옅은 하늘색 한복을 곱게 차려입은 여자가 우리 일행을 맞이했다. 속옷이 보일 듯 말 듯한 시스루 풍의 한복이어서 심사 위원장인 이명석 교수는 헛기침했고, 지도교수인 유 현명 교수는 괜히 안경을 벗어 닦으며 힐끔거리는 듯 보였다.

미희와 여인은 일면식이 있는 듯 별말 없이 눈짓으로 인사를 나눴는데, 옆에서 보기엔 서로 격식을 차리지 않을 정도의 허물없는 사이처럼 보였다. 어쩌면 중견 건설사의 전무라는 미희 아빠의 단골집인지도 몰랐다.

"제 지도교수님들이세요. 잘 부탁드려요. 매니저님."

종업원이 두 분의 교수님을 예약된 룸으로 모시고 가자, 미희는 재킷에서 봉투 하나를 꺼내 매니저에게 건넸다. 봉투에서 기분 좋은 라벤더 향이 올라왔다. 한지에 말린 라벤더꽃의 보랏빛 색감이 조명 아래서 은은한 자태를 드러냈다.

예약된 룸은 4인 실 룸 두 개의 파티션을 터서 8인실로 5명이 저녁 식사하기는 넉넉해 보였다. 지도교수인 유 교수님 옆에 미희가 앉고 나는 맞은편에 이 교수님 왼쪽에 자리를 잡았다. 나는 회식 장소로 오기 전에 무릎 정도 길이의 브라운 H 스커트와 위에는 흰색 리본 타이 블라우스로 갈아입은 상태였다. 멜란지 그레이 트위드 재킷은 입고 있기에 갑갑해서 벗어서 옷걸이에 걸어두었다. 민 성하 교수님은 차를 가져왔다며 술을 자제하는 듯 보였고 두 분의 교수님은 서로의 잔을 채워주는 걸 마다하지 않았다. 민 교수님이 오늘 결혼기념일이라며 두 분 교수님께 양해를 구하고 자리에서 일어난 시간이 저녁 7시경이었다.


내가 유 교수의 옆자리 앉아 무릎을 꿇고 도쿠리를 들어 따라 주었을 때 유 교수가 입가를 티슈로 닦아내며 내게 한 말이었다.

" 송 선생은 머리도 좋고 성실한데.... 미희 같은 센스가 없어."

"더 열심히 하겠습니다. 교수님."

그리고는 술에 취해 약간 눈동자가 풀려 게슴츠레해진 눈으로 나를 보며 말했다.

"열심히만 한다고 해서...."

그리고 왼손으로 내 오른쪽 허벅지 안쪽으로 교수의 손이 쓱 들어왔다. 나는 너무 놀라서 소리도 지르지 못하고 마치 얼음 놀이하는 아이처럼 얼어붙어 버렸다.

내 눈을 바라보며 얘기하는 유 교수의 오른손이 탁자 위에 쏟아진 물이 평면을 따라 호리타다미 아래에 놓인 내 허벅지 위에 나비처럼 사뿐히 내려앉았다. 허벅지를 가벼운 손놀림으로 두어 번 두드리며 내 반응을 살피던 손은 미끄럼틀을 내려오는 아이처럼 사타구니 근처의 허벅지 안쪽으로 미끄러졌다. 흡사 눈 깜짝할 사이에 일어난 일이었다. 내가 얼음땡을 당한 사람처럼 반사적으로 몸을 움츠러들자, 유 교수의 오른손은 탁자 위로 슬그머니 올라갔다. 처음부터 제자리가 거기였던 것처럼. 내가 당황한 기색이 역력해지자, 유 교수는 내 어깨를 손으로 감싸면서 기어이 한마디를 더 보탰다.

“자네, 내가 아껴서 하는 얘긴데, 대학원 박사과정 마치면 바로 포닥을 다녀오는 게 좋아. 그래야 국내 대학에서 교수 자리 나 국책 연구소로 갈 수 있으니까 하는 얘기야. "

”네 알겠습니다. 교수님"

난 비명도 내지 못하고 온몸에 돋은 소름을 감당하기 위해 치마를 움켜줬다. 진정하려고 하면 할수록 내 말을 듣지 않는 몸은 제 스스로 비명이라도 지르는 듯 부들부들 떨었다. 나는 치욕적인 상황을 감당할 수 없어서 떨리는 눈으로 이 교수님과 미희가 앉은 쪽을 바라보았다. 이 교수가 탁자 위에 미희의 손을 잡으려 하자, 오히려 미희가 이 교수의 그 손을 덥석 잡고 흔들며 천연덕스럽게 웃으며 말했다.

“아이, 이 교수님 오늘 기분 좋으신가 봐. 사모님이 보시면 저 질투하시겠어요."

당황한 표정으로 미희를 보자, 미희는 그냥 넘어가라는 사인을 눈으로 보냈다.

이 교수는 세상 행복한 표정을 지으면서 몸에 달라붙은 미니스커트를 입은 그녀의 엉덩이를 쓰다듬었다.

"아이, 왜 이러세요. 교수님."

미희는 몸을 살짝 뒤로 빼면서 웃음을 흘리며 말했다.

"우리 교수님, 술을 많이 드셨나 봐요?"

유 교수는 나를 보고 뭔가 말을 하려다가 그만두었다. 지금은 때가 아니라고 판단한 모양이었다. 그제야 나는 화장실에 다녀오겠다고 유 교수에게 양해를 구하며 자리에서 일어날 수 있었다. 화장실에 가려고 자리에서 일어나 트위드 재킷을 걸칠 때, 두 분의 교수는 미희의 말에 무엇이 그리 즐거운지 박장대소하면서 나자빠지기 직전이었다. 미희는 연륜이 지긋한 두 노교수를 놀이터 모래밭에서 놀다가 유치원에 들어가기 싫다는 어린아이를 달래는 노련한 유치원 교사처럼 손바닥 위에 놓고 어르고 있었다.


복도를 지나 왼쪽으로 돌자, 우측 편에 여자 화장실이 보였다. 화장실 문을 열고 들어갔을 때 갑자기 '철컥' 소리를 내며 뒤에서 문이 자동으로 잠기는 소리가 들렸다. 이상한 점은 화장실 내부 공간이 유 교수의 연구실과 똑같았다는 사실이었다. 지도교수의 붉은색 마호가니 책상이 화장실 한가운데 버티고 있었고 책상을 중심으로 디귿 자 형태로 오래된 종이에서 나는 곰팡내를 피우는 책장이 둘러싸고 있었다. 친누나에게 생일 선물로 받아서 유 교수가 애지중지 아끼는 옥스블러드 가죽으로 만들어져 있으며 등받이에 단추가 촘촘히 박힌 체스터필드 스타일의 의자도 보였다. 문제는 연구실 온도가 사우나실처럼 뜨거웠다. 겁에 질린 나는 뒤돌아 닫혀 있는 문을 손으로 있는 힘껏 두드리며 소리를 질렀다. 분명 들어올 때 있었던 손잡이가 안에서 밖으로 나갈 수 있는 손잡이가 없는 구조였다.

"미희야~ 교수님~"

룸 안에서는 못 듣는다 쳐도 무율담의 직원들이 달려올 법도 한데 복도에서는 이상하리만치 아무런 인기척도 들리지 않았다. 이제 방 안의 온도는 금방이라도 숨이 끊어질 듯 끓어올랐고 지옥 불에 막 내던져진 듯한 열기가 온몸을 덮쳐서 숨을 쉴 수조차 없었다. 하필이면 석사논문 심사가 끝나는 시각에 이렇게 허무하게 연구실에 갇혀 비명횡사한다는 공포에 사로잡혀 비명을 지르기 시작했다. 더 이상 목에서 아무런 소리도 내지르지 못하는 순간 나는 잠에서 깼다. 꿈이었다. 십 년이나 지났는데도 스트레스받거나 컨디션이 좋지 않을 때 꼭 똑같이 유 교수의 연구실에 갇혀서 비명을 지르거나 울다가 깨는 꿈이 반복되었다. 살아있으니 그나마 다행이었다. 꿈이었다는 사실에 안도하며 잠을 청하려고 눈을 감았다.

무슨 연유인지 길바닥에 한 노부인이 쓰러져 있었다. 지나가는 사람들은 쓰러진 할머니를 외면하며 바삐 자기들의 길을 재촉해서 걸어갔다. 나는 의식을 잃고 바닥에 엎드러진 채 쓰러진 할머니를 보고 놀라서 얼른 뛰어가서 할머니를 일으켜 세웠다. 쓰러져 있던 할머니는 바로 내 엄마였다. 엄마를 안아서 일으켜드릴 때까지 한 젊은 여자와 그녀의 딸로 보이는 초등학생 여자애가 무표정하게 바라만 보고 서 있었다. 한마디의 말도 없이 무표정하게 내려다보는 두 모녀를 향해 나는 눈물을 흘리면서 소리를 질렀다. 한참을 소리를 지르다 말고 두 모녀를 바라보니 젊은 여자와 소녀는 바로 젊은 시절의 엄마와 나였다.


눈을 뜬 나는 비로소 내 몸에서 약발이 듣지 않고 열이 오르고 있다는 걸 실감했다. 분명 저녁을 먹은 후에도 약을 먹었고, 좀 전에도 분명 약을 먹었는데,

'해열제를 먹는데도 왜 열이 떨어지질 않는 거지?'


나는 바뀐 잠자리가 불편한 것도 잊어버리고 덜컥 겁부터 났다.

'이러다가 혹시 혼자 자다가 잘못되는 거 아니야?'

우리 두 아들 생각이 먼저 났고, 다음에 잔소리꾼 남편의 얼굴이 떠올랐다. 남편에게 얼른 전화를 해볼까도 생각했다. 남편 동창이 전북대 종합병원 내과 과장님인데 전화로 상담이라도 받아볼 수 있는지 부탁하려다가 이 시간에 전화하면 또 처가 놔두고 왜 돈 아깝게 무인텔이냐고 한 소리 할 게 뻔했다. 그러다가 출입문 통로 쪽에 설치돼 있는 천정형 에어컨이 눈에 들어왔다.

'앗, 여태 에어컨을 안 틀었구나.'

무더운 한여름에 에어컨도 켜지 않고 이불을 덮고 자려고 누워있었으니. 멀쩡한 사람도 열병에 걸릴 만한 날씨였다.

"오늘같이 무더운 한 여름에 에어컨 틀어놓는 걸 깜빡 잊다니. 너도 어지간하다."

나는 열이 나 아픈 와중에도 어이없어 웃음이 나오기도 하고 한편으론 열이 나는 이유가 짐작돼서 적이 마음이 놓였다. 열이 떨어질 것 같은 기대감으로 나는 리모컨을 눌러 에어컨을 켰다. 에어컨의 실내 온도는 22도로 맞췄다. 잠시 후 방 안의 공기가 시원해졌다. 이제야 잠을 잘 잘 것만 같았다. 조금만 기다렸다가 더 시원해지면 25도 정도로 맞추고 잠들어야지 나는 생각했다. 혼자 자다가 청소하는 분에게 발견될지도 모른다는 두려움은 이내 사라졌다. 방안이 어둠에 잠기고, 두려움으로 가득했던 공간은 엄마에 대한 그리움으로 바뀌었다.

'엄마는 매일 밤 혼자 잠들기 전에 무슨 생각을 하실까.'

노빠꾸 황소고집 아빠였지만 엄마의 든든한 울타리가 되어주셨던 아빠가 돌아가시고 울 엄마는 혼자일 수밖에 없는 일상을 묵묵히 견디어 내고 계셨다. 아버지는 엄마에게 본인은 엄마만 좋은 일 시키고 떠나신다고 하셨지만, 남아 있을 엄마의 외로움과 쓸쓸함에 대해서는 알지 못하셨다. 홀로 있고 싶어 떠난 여행에서 나는 홀로 서 있을 수밖에 없는 엄마의 존재를 다시금 바라보게 되었다. 나는 어둠 속에서 눈을 뜨고 나지막하게 '엄마'~하고 불러보았다. 잠시 후, 이마에 서늘한 기운이 느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