일랑의 웃음

단편소설(short story)

by 임용철

일랑은 원장실에서 물이 담긴 유리컵에 발포정 비타민을 하나 넣었다. 비타민의 힘을 빌려 무기력한 오후의 진료를 마무리하고 싶어서였다. 비타민은 찻잔 속의 태풍처럼 유리컵 안에서 뱅글뱅글 돌며 수많은 기포를 불러일으키며 끓어올랐다. 그는 그것이 주어진 물성에 충실하게 물에 용해되며 사라져 가는 모습을 응시하고 있었다. 발포정은 물에 용해돼 자취를 감췄고 투명한 물은 어느새 노란빛의 생명력을 품고 있었다. 카페인 같은 강렬한 각성은 아닐지라도 마셔두면 정신을 집중시키는 데 한결 도움이 됐다. 점심을 먹고 찾아오는 나른한 피로감은 전기온돌 바닥에 누워 쉬었다 가라고 그를 불러 세우기 일쑤였다.

마지막 예약 환자는 오늘이 네 번째 방문인 손시아라는 여성이었다. 환자의 위턱 왼쪽에 두 개의 작은 어금니와 두 개의 큰 어금니를 충치 치료가 예약돼 있었다. 단골 환자 중에는 먼 거리에서 치과 치료를 위해 내원하는 사람도 있고 시간을 내기가 어려워 여러 번 치료받는 걸 부담스러워하는 분도 계셨다. 드물지만 해외 유학이나 이민을 코앞에 두고 내원해서 치료받고 싶다거나 3일 후에 군대에 입대하는 청년들도 더러 있었다.

입대일이 언제예요라고 물었을 때,

3일 후요.라는 대답을 듣고 나면 당황스럽다.

치과에 올 때까지 환자가 했을 고민과 치과 치료에 대한 두려움을 떠올려보면 그럴 수 있었다. 그러면 간단한 치료만 먼저 권해드리고 해외나 군대에서 형편이 되면 잘 치료받으시라고 상담해 드리곤 했다.


시아 씨는 미용실을 운영하고 계셔서 첫날 상담할 때 한 번에 다 치료해 주길 원했다.

예약제로 운영하긴 하지만, 단골손님 중엔 예약 없이 불쑥 찾아오시는 분들도 계셔서 자주 미용실을 비울 순 없거든요.

하지만 언젠가 한 번 섬에서 치과 치료를 위해 나오셨던 환자분이 사정사정하셔서 여러 개를 치료해 드린 적이 있었다. 다음 날 그 환자는 치과에 전화를 걸어 치료받고 나서 시큰거리고 씹을 수가 없다고 고래고래 소리 지르며 항의했다. 씹는 면의 생리적 마모가 상당히 진행된 치아들은 대부분의 법랑질이 닳아져서 사라지고 그 하방에 상아질이 노출될 수밖에 없다. 이는 치아 내 신경조직과 가까워져 충치가 깊을 경우 치료받은 후에 확률적으로 시큰거릴 수 있었기 때문이었다. 그런 불쾌한 경험한 뒤로 일랑은 '한 번에 다 치료해 달라'는 말에 트라우마가 생겼다.

결국, 환자분께 양해를 구하고 오른쪽 위, 아래 어금니 치료 2번. 왼쪽 위, 아래 어금니 치료 2번으로 총 4회에 걸쳐 진료해서 치료를 마무리하기로 했다. 세 번의 진료가 행해지는 동안 씹는 면의 생리적인 마모가 심했고 충치가 깊이 진행돼 있어 환자분이 매우 시려하셨다. 치료하는 일랑의 마음에도 환자의 불편감이 그대로 전해졌다. 치과용 핸드 피스에 연결된 버(bur)로 우식증 부위를 제거할 때마다 묵직한 압박감이 치아에 전해졌을 게 분명했다.

마취를 좀 해드릴까요?

아직 많이 남았나요? 얼마 안 걸리면 좀 참아볼게요.

당연히 치과용 국소마취 주삿바늘이 점막이나 잇몸을 관통할 때 아프다. 그래서 경험해 본 환자들은 두려워할 수밖에 없다. 환자가 고통스러워하거나 얼굴을 찡그리는 모습을 보면 의사의 마음도 덩달아 예민해졌다. 물론 국소마취 전에 도포 마취제를 미리 발라두면 약간의 통증을 줄일 수 있었다.


일랑은 평소처럼 글러브를 끼면서 환자의 5시 방향에서 말하는 중이었다.

환자분 치료받는 도중에 너무 힘드시면 참지 말고, 꼭 말씀해 주세요.

그리고 체어가 뒤로 천천히 움직이기 시작하자, 환자는 유쾌한 웃음소리 너머로 이렇게 대답했다.

말할 기회도 안 주시고 치료하시던데요.

일랑은 환자가 한 얘기를 듣고 시쳇말로 빵 터졌다. 웃으면 안 될 상황인데, 예기치 못한 순간에 말랑말랑한 펀치로 급소를 얻어맞은 느낌이었다. 평소에도 웃을 일이 없다지만, 환자를 치료하면서 웃는 일은 흔하지 않았다. 오히려 긴장의 연속이었다. 고속으로 회전하는 치아 절삭 기구인 치과용 핸드 피스가 신경 쓰였다. 수시로 입안을 들락거리는 기구들에 환자의 입술에 생채기를 낼까? 염려됐다.

어느 날인가 점심시간을 20분 앞두고 치료한 여자환자가 떠올랐다. 치경부레진 환자. 치료하는데 윗입술에서 피가 흘렀다. 연신 머리를 조아리며 죄송하다고 말했다. 환자는 잘못을 인정하지 않는 의사에게는 더 이상 치료받을 수 없노라 단호하게 말했다. 상상만으로도 끔찍하지만, 뭔가가 입안에 떨어져 삼킴 사고로 이어질까 봐 주의를 기울여야 했다.

일랑은 환자의 말을 듣고 웃어 보는 게 얼마 만인지. 그만큼 귀했다. 웃음은 사람의 긴장과 피로도를 일순간에 낮춰주는 효과가 있었다. 나른해진 집중력도 피곤했던 체력도 한 번의 웃음으로 최상의 컨디션으로 회복되었다.


다음날 금요일 아침 일이었다. 첫 예약 환자는 최근에 교정 치료를 시작한 2급 부정교합 환자였다. 위턱에 좌, 우측 첫 번째 작은 어금니 두 개를, 교정 발치하기 위해 교정치과에서 우리 치과로 의뢰된 환자였다. 당연히 일랑의 치과에 다니던 구환이 아니었으므로 환자와 치과의사와는 라포르가 형성돼 있지 않았기 때문이었다. 치과용 유닛 체어에 앉아 있는 20대 여자 환자는 교정 발치에 대한 두려움이 매우 큰 듯했다. 내 몸에서 뭔가가 사라져야 하고 그게 위턱에 두 개의 작은 어금니였기 때문이었다. 심한 잇몸 질환이나 충치 때문에 빼는 치아가 아니라 치아를 가지런하게 하기 위한 공간을 얻기 위해 하는 발치였으므로 환자에게는 더 큰 상실의 아픔으로 다가올 수 있는 상황이었다.

환자에게 발치 동의서를 설명하던 일랑은 자기도 모르게 이렇게 말하고 있었다.

환자분 긴장은 제가 할 테니 마음을 편하게 하세요. 제가 긴장해야만 정확하고 안전하게 치료해 드릴 수 있습니다. 몸을 힘들게 긴장하는 건 제가 할게요.

그는 방금 자신의 입으로 흘러나온 얘기가 믿기지 않았다. 그가 30년 동안 치과 진료를 해오면서 한 번도 환자에게 말해본 적이 없는 응대 멘트였다.

어, 방금 내가 무슨 말을 한 거지?

그는 자신도 모르게 환자에게 내뱉은 말에 진심 만족하고 있었다. 어쩌다 이런 근사한 말이 내 입을 통해서 나왔을까.

이런 말을 환자에게 해줄 수 있을 정도면 나도 꽤 근사한 치과의사가 된 게 아닌가 생각했다. 곰곰이 생각해 보니, 어제 충치 치료를 받던 시아 씨의 재치 있는 말 때문이었다.

말할 기회도 안 주시고 치료하시던데요.

일랑에게는 발포정 비타민처럼 분명 힘이 되어주는 목소리였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