크리스마스이브인 오늘 일기예보엔 정오 무렵부터 강한 바람을 동반한 눈이 내릴 것으로 예보돼 있었다. 원더풀 제약회사에 입사한 지는 일 년이 됐다. 오늘은 월차로 휴무였다. 웨이브에서 <스즈메의 문단속> 이란 일본 애니메이션을 보고 있는 중이었다. 어제 여사친인 주희가 크리스마스이브에 약속 없으면 같이 퇴근 후 저녁이나 먹자며 연락해 왔다.
ㅡ연남동 경의선 숲길에 있는 일본식 돼지고기 꼬치구이 식당 어때? 그녀는 친구가 추천해 준 맛집이라고 했다.
ㅡ집돌이인 나를 기어이 끄집어내야 네 직성이 풀리지. 주희와의 저녁 약속 생각에 기분이 설렜다. 연말인데 여자 친구가 없어 기분이 우울해지려던 참이었는데. 구원투수처럼 나타난 그녀의 연락이 반가웠다.
오피스텔에서 차를 몰고 오후 5시 반쯤 여유 있게 나갈 생각이었다. 샤워하려고 욕실로 들어가려는데 휴대전화 문자 알림이 울렸다. 송내 북부역 근처 바스(VAS) 정형외과 윤 원장님 메시지였다.
'인영 대리. 이따 저녁에 말이야. 친구들이 와인 한잔하고 싶다는데. 와인이랑 곁들여 먹을 안주 준비해 줄 수 있을까.'
새로 뚫은 거래처 원장님의 부탁이라 대놓고 무시할 수 없었다.
'와인이랑 안주를 사 가는 거야 문제가 안 되는데, 주희와의 저녁 약속은 어떡하지'
화장실 세면대의 물을 틀어놓은 채 잠시 망설였다. 곧바로 대답이 없자, 윤 원장님에게 다시 문자가 왔다.
'바쁘면 그냥 못 들은 걸로 해.'
'안녕하세요. 원장님. 샤워 중이라 메시지 확인이 늦었습니다. 지금 바로 전화드리겠습니다.'
ㅡ원장님 즐겨 드시는 와인 있으면 말씀만 하십시오. 건조한 입술에 각질이 일어났다. 잡아 뜯으려니 입술이 아파 그만두었다.
ㅡ병원 일만 잘하지. 와인에 대해선 자네보다 문외한이야. 그런데 자네 시간 뺏는 거 아냐? 오늘 크리스마스이브라 데이트 약속도 있을 텐데.
ㅡ괜찮습니다. 아직 여자 친구가 없습니다.
'크리스마스이브에 데이트 약속이 있을 걸 그렇게 잘 아시는 분이....'
주희는 할 수 없지 않으냐며 괜찮다고 했다. 쿨한척했지만, 전화 통화하는 목소리는 실망한 눈치였다.
'나만큼 그녀도 저녁 약속을 기다렸나 본데.....' 주희의 목소리에 평소와 달리 서운함이 묻어났다.
스즈메만 문단속을 잘해야 할 게 아니라 나도 뒷문 단속을 잘해야 했다. 오프 하루 전날이라도 카톡 프사에 푸껫에서 찍은 수영복 사진이라도 올려놓았어야 하는 건데. 이미 미미즈는 문을 열고 꿈틀거리면서 솟아올라 나를 향해 거대한 몸뚱이를 드러내며 드러눕고 있었다.
단골세탁소에 전화해 양복 드라이클리닝이 끝났는지 물었다.
ㅡ다됐습니다. 찾아가셔도 됩니다.
ㅡ네. 고맙습니다.
'참, 세탁소 사장님은 부지런하셔.' 입고 갈 양복이 준비돼 있어서 불행 중 다행이었다.
하지만 가고 싶지 않은 자리에 억지로 떠밀려 가야 하는 상황이 영 내키지 않았다.
때마침 연말 이마트와인 클리어런스 행사가 있어서 그나마 다행이었다. 와인에 대해 잘 모를 땐 종류별로 각각 한 병씩, 그리고 가성비갑인 제품을 직원에게 추천받으면 그만이다. 이마트에 들러 코노 소비뇽 블랑 화이트 와인 한 병, 까스텔 로쉐 마제 까베르네 소비뇽 레드 와인 한 병, 셋 중에서 가장 비싼 샴페인 도르 브뤼 한 병과 다회용 플라스틱 와인잔을 구매했다.
ㅡ와인 에어레이터와 와인, 잔은 준비됐고. 와인과 잘 어울리는 안주는 뭘 사면 되나요?
ㅡ취향에 따라 다르긴 한데, 보통 4~5인용 델리스 치즈 플래터 스페셜세트를 보통 추천해 드리긴 해요. 몇 분이 드세요?
경황이 없어서 윤 원장님을 포함해 몇 명의 친구분이 모이는지를 물어보지 않았다.
ㅡ그냥 델리스 세트 하나 주세요. 세트 안에 프레지던트 살구 아몬드 과일 치즈는 몇 번 먹어본 적이 있다. 먹다 보면 살구, 아몬드, 코코넛 과육이 씹혔다. 촉촉하고 고소해서 마음에 들었다.
바스 정형외과에 도착해서 원장님께 몇 분인지 여쭤보고 부족하면 근처 마트에 얼른 다녀올 생각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