윤 원장님은 저녁 8시면 친구들과 와인 모임이 끝날 거라고 말씀하셨다. 하지만 50대 남자 원장들도 아줌마들 못지않게 수다스러웠다.
ㅡ오늘 준비하느라 고생 많았는데, 인영 대리도 한잔해야지.
ㅡ차를 가지고 와서요. 원장님.
ㅡ운전 때문에 맛있는 와인을 포기해서야 쓰나. 여기 있는 원장들도 다 대리운전해서 갈 거야. 크리스마스이브에 한잔 정도는 괜찮아. 건네준 잔에 담긴 와인을 보니 차를 구입하면서 부모님과 했던 약속이 떠올랐지만, 모두의 시선이 쏠려 있어서 와인잔을 비워야 했다.
'차 가지고 다니는 사람은 절대 술을 입에 대서는 못쓴다.' 아버지는 15년 버스 운전을 하시는 동안 술을 일절 입에 대지 않으셨다. 제약회사에 합격하고 투싼 차량을 구입할 때 부모님은 적금을 깨서 2,000만 원을 보태주셨다. 동네 친구들은 새 차를 샀으니 돼지머리에 고사도 지내고 차에 막걸리도 부어야 사고를 면한다고 겁을 줬다. 미신에 휘둘리기 싫어 한 귀로 듣고 한 귀로 흘렸다. 일어날 사고는 어차피 일어날 거란 생각이 들어서였다.
바스 정형외과를 나온 시간은 밤 9시가 다 돼서였다. 병원 미팅룸을 대충 정리하고 쓰레기를 담은 20L 종량제 봉투를 버리기 위해 1층에 내려왔다. 도로 위에 쌓인 눈이 10cm는 돼 보였다. 바람까지 휘몰아쳐서 사람들은 옷깃을 여미고 종종걸음으로 미끄러운 빙판길을 피해 보도 위를 걸어갔다. 정오부터 내린 눈이 얼어서 도로 위는 군데군데 결빙 상태였다. 시청 제설 차량이 염화칼슘을 뿌리며 지나갔고 그 뒤에 연막소독차를 따라 달리는 아이들처럼 차들이 줄지어 달렸다. 휴대전화에 폭설 주의보와 한파주의보 재난 문자가 올라왔다. TBN 한국교통방송에서는 블랙 아이스에 대비해 자동차를 서행운전 하라고 당부했다. 병원 지하 주차장으로 내려와 주희에게 카톡 메시지를 보냈다.
'지금 뭐 해?'
'연남동 경의선 숲길에서 커피 마시고 있어. 이제 끝났구나.'
'병원 주차장이야.'
'이쪽으로 올래? 커피 사줄게.'
그녀만 괜찮다면 크리스마스 아침을 그녀와 함께 맞이하고 싶었다. 눈 내리는 경의선 숲길을 마냥 걷고 싶었다. 같이 커피를 마신 후에 카페를 나서면서,
'우리 집에서 넷플릭스 보고 갈래?' 이렇게 말하면 주희가 뭐라고 말하려나. 혹시 몰라서 방 청소를 하고 나오긴 했다. 벌써 저녁 9시 20분인데, 오늘 밤이 지나기 전에 그녀에게 그런 말을 꺼낼 수나 있을지. 붙잡지 못한 시간은 모래시계의 좁은 통로를 따라 아래로 사라지고 있었다.
송내 IC에서 서울 방향 고속도로 진입로는 이미 차량정체가 시작돼 있었다. 도로 위에 차라도 적던지, 아니면 눈이라도 내리지 말아야 하는데. 영화에 공간 이동 능력자가 단골 소재로 등장하는지 이해가 되는 순간이었다. 지금 웜홀(worm hall)이 눈앞에 열린다면 연남동으로 순간 이동하고 싶어졌다.
차들이 지체되는 걸 보니 분명 앞쪽에서 접촉 사고가 났음이 분명했다. 고속도로로 진입해 보니 도로 보수공사 작업차들이 1차선에 길게 가드레일을 세워놓고 공사 중이었다. 1차선에서, 2차선으로 가드레일의 범위가 넓어지자, 차들은 덜 막히는 차선을 찾아 부지런히 방향지시등을 켜고 오른쪽으로 이동했다.
나는 앞차들을 따라 2차선에서 3차선으로 차선을 변경하려다가 앞차가 멈추는 바람에 어정쩡하게 2차선과 3차선에 걸쳐 있었다. 잠시 후 후미 쪽 2차선을 달려오던 차량이 급브레이크를 밟는 소리가 들렸다. 미러로 보고 있으려니 이건 무조건 들이 받힐 상황이어서 몸이 저절로 움츠러들었다. 간발의 차이로 접촉 사고를 면한 카니발 운전자가 창문을 내리고 소리를 질렀다.
ㅡ야 인마, 너 도로 전세 냈어? 카니발 운전자는 얼굴이 벌겋게 달아올라 씩씩거렸다. 조수석에 앉은 여성이 뜯어말렸지만 소용없었다. 매어놓은 목줄을 풀어줄 주인을 하루 종일 기다린 똥개처럼 튀어나오려고 이쪽을 노려보고 있었다.
ㅡ미안합니다. 나는 운전석 창문을 내리고 살짝 고개를 내밀어 사과했다. 별것 아닌 일에 불같이 화를 내는 남자에게 똑같이 대들었다간 시비가 붙을 확률이 높았기 때문이다.
'일부러 그런 것도 아니고. 차선 변경하는 중에 가로막혀서 있던 건데.'
창밖으로 왼손을 들어 미안하다는 제스처를 보냈다. 앞에 정체돼 있던 차들이 공사 구간을 빠져나가면서 차들은 속도를 내기 시작했다. 나는 3차선으로 차선 변경하고 속도를 높였다. 2차선에서 뒤를 바짝 따라붙은 흰색 카니발이 신경 쓰였다. 카니발 차주는 아직도 분이 안 풀렸는지 액셀러레이터를 급가속하며 앞질렀다가 다시 급브레이크를 밟으며 보복 운전을 반복했다.
ㅡ저 미친놈이. 덜컥 겁이 나서, 가슴이 두근거리고 호흡도 거칠어졌다. 등에 식은땀이 흘렀다. 그렇게 2차선을 달리던 흰색 카니발은 전방에 접촉 사고로 멈춰있던 택시와 BMW 차량을 피하려고 급하게 핸들을 우측으로 꺾었다. 블랙 아이스 위에서 미끄러진 카니발이 팽이처럼 뱅글뱅글 돌더니 3차선으로 미끄러져 들어왔다. 손써볼 틈도 없이 내 차의 좌측 후미를 들이받으며 멈춰 섰다. 카니발 보닛에 연기가 피어오르더니 '펑' 소리와 함께 불길이 치솟았다. 내 차는 무게중심을 잃고 한 바퀴를 구르며 전복되면서 에어백이 터졌다. 추돌하는 순간 공차 중량만 2,100kg이 넘는 카니발의 육중한 무게가 고스란히 느껴졌다. 차체가 우그러지면서 유리창이 깨져서 파편이 날렸다. 선루프가 깨지면서 아스팔트 바닥에 긁히는 소리. 타이어가 마찰하면서 나는 고무 타는 냄새. 유리 파편에 찢어진 이마에서 피가 흘러내렸다. 무엇보다 참을 수 없었던 건 이러다 죽을 수도 있겠구나 싶은 두려움이었다. 외마디 비명이 터져 나왔다.
인간의 뇌는 사고나 죽음을 앞둔 극한의 상황에 놓이면, 살아온 기억들이 주마등처럼 지나간다고 했다. 이런 경험을 하게 되는 이유에 대해 어떤 사람은 뇌가 생존 방법을 찾아내기 위해 수많은 기억을 스캔하는 거라고 말했다. 다른 의견은 공포 상황을 최소화하려고 행복한 기억을 떠올려 뇌의 도파민 분비를 돕기 위한 현상이란 것이었다.
그러고 보니 후배 용택이도 교통사고를 당한 적이 있었다.
ㅡ형, 내가 고등학교 1학년 때 횡단보도 건너다가 음주 운전 뺑소니 당했잖아.
ㅡ그때 한 달간 의식이 없었지. 너희 어머니 우리 집에 와서 아들 식물인간 되면 불쌍해서 어떡하냐고 매일 울다 가셨는데. 왜 갑자기 그 생각이 난 거야?
ㅡ뭐 그냥. 그때 생각이 나네. 정말 거짓말하나 안 보태고, 내가 여태 살아온 인생이 오래된 영화필름처럼 눈앞으로 주르륵 지나가면서 다 보이더라니까. 드라마나 영화 속에서만 일어나는 일이라고 생각했거든. 그런데 그게 나한테 일어나니까 되게 신기했어.
내가 타고 있던 갈색 투싼 차량이 뒤집히던 순간에 까마득히 잊고 있었던 그 기억이 스치듯 먼저 떠올랐다. 초등학교 5학년 여름성경학교 둘째 날, 율이 누나와 함께 보냈던 하루의 기억이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