율이 누나

by 임용철

2006년 8월 11~12일 사이에 강대 교회 여름성경학교가 열렸다. 초등학교 5학년이었던 나는 동네 후배 용택에게 빨간색 스쿠터를 빌려 타고 강대 교회로 갔다. 5학년이 되었으므로 어린애같이 자전거나 타고 다닐 순 없다는 게 내 생각이었다. 오토바이 면허가 있는 것은 아니었다. 용택이의 장래 희망은 군산 시내에 멋진 오토바이 대리점을 여는 것이었다. 그런 용택이의 원 포인트 레슨이면 충분했다.

ㅡ형, 오른쪽 액셀을 아래 방향으로 돌리며 당기면 앞으로 나가고, 이렇게 브레이크를 잡으면 멈춰 서는 거야.

스쿠터 운전법은 용택이 말마따나 식은 죽 갓 둘러 먹기처럼 쉬웠다.

예전 강대 교회 출입문 안쪽에는 세월의 흔적이 고스란히 담겨 있는 녹슨 철제 탑이 서 있었다. 5m 높이의 꼭대기에 종이 매달려 있었다. 미영이 아빠 방 집사님은 강대 교회 관리 집사님이셨다. 교회 청소, 전기, 수도를 관리하시면서 예배 시간에 맞춰 종을 치셨다.

신축한 강대 교회는 내가 주일학교 4학년이 되던 해에 완공되었다. 전면 중앙에 예배당 출입로와 계단 그리고 낮은 아치형의 둥근 지붕은 대리석으로 마감했다. 양측을 적벽돌로 외벽을 두른 직사각형 형태의 구조물 뒤로 본관이 이어졌다. 가운데 지붕 위에 하나, 그리고 두 개의 전면부 직사각형 위로 솟아 있는 원추형 첨탑 끝에 두 개의 십자가가 달려 있었다. 교회 앞마당을 지나 뒤쪽으로 걸어가면 왼편에 목사관과 오른쪽엔 교인들이 사용하는 조립식 자재로 지어진 식당이 보였다.


동네 이장님인 아빠는 오늘 옆집 덕배 아저씨 큰딸 결혼식에 가셨다. 엄마와 전주에 나가신 김에 자취하는 형을 만나 저녁을 드시고 오신다고 하셨다. 주영이 형은 대학교 졸업반이었다. 율이 누나는 내가 초등학교에 1학년일 때부터 우리 집에서 세 들어 살게 되었다. 2002년 5월 31일 FIFA 월드컵이 대한민국과 일본에서 열린 날, 나는 동네 어귀 아카시아 아래에서 율이 누나를 처음 만났다. 아빠와 배 씨 아저씨는 군산 시내에서 같이 버스회사에서 일했다. 누나의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져 병원에 입원하고, 수술비며 병원비를 감당할 수 없어 아파트까지 팔게 되었을 때, 남는 방이 있으니 우리 집에서 함께 살자고 아저씨를 설득한 사람이 우리 아빠였다. 2005년 여름에, 누나의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저씨는 버스회사를 그만두셨다. 성실한 버스 운전사였던 아저씨는 택시회사로 직장을 옮기고 나서, 세상에 더는 미련이 없는 듯, 술과 도박에 손을 대셨다.

율이 누나는 작년에 익산 보건대학 간호학과에 합격했다. 그녀는 학기 중에는 통학하기가 불편해서 익산 원광대학교 대학로에서 자취생활을 했다. 딸에게 무관심한 아저씨를 대신해서 엄마가 누나의 자취방을 알아봐 주고 전세 계약도 해주셨다. 수업이 끝나면 그녀의 친구들이 동아리 활동이며 소개팅이며 학교 축제에 놀러 갈 때 누나는 밤늦게까지 식당에서 아르바이트해야 했다. 그리고 아르바이트하면서도 우리 엄마, 아빠, 내 생일은 잊지 않고 챙겼다. 엄마가 그러지 말라고 타일렀다.

-율이야, 네가 힘들게 몸으로 일해서 번 돈 그렇게 허투루 쓰면 안 된다.라고 말려도 그녀는 개의치 않았다. 오히려 술과 도박에 빠진 배 씨 아저씨가 술에 취해 돈을 내놓으라고 누나에게 소리를 고래고래 질러댔다.

-지 애미 잡아먹은 년.

돈이 없다고 버티는 누나에게 배 씨 아저씨는 욕설을 퍼부었다. 누나의 엄마가 뇌출혈로 쓰러진 게 인정머리 없는 딸년을 뒷바라지하다가 생긴 거라고 말했다. 술 취한 배 씨 아저씨의 술주정에도 누나는 슬픈 눈으로 아저씨가 잠들기를 기다릴 뿐이었다. 일요일 밤이 돼서, 누나가 익산 자취방으로 돌아갈 때면 부모님은 승용차 트렁크에 쌀이나 밑반찬, 채소와 과일 등을 싣고 그녀를 데려다주곤 했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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