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의 아버지 이중석씨.
오늘 나의 아버지 이야기를 적어보려고 하니 나의 어린시절의 기억부터 떠오른다.
나의 아버지는 다정다감한 사람도 아니었고 무뚝뚝하지만 속정깊은 전형적인 경상도 사람도 아니었던것 같다. 어렸을적 아버지는 그저 무섭고 불편한 그런 사람이었다. 농담을 주고받을만큼 친밀한 관계도 아니었고 조금만 잘못해도 불호령이 떨어졌으며 어쩌다 한방에 단둘이 있게되면 무슨 핑계를 대고 밖으로 나갈까 생각하게 만드는 그런 불편한 관계였다.
무한 애정을 주는 엄마가 없었더라면 정말 사막처럼 까슬까슬한 가정이 되지 않았을까 하는...
언제부터라고 딱 꼬집을순 없지만 아마도 내가 대학교를 다니던 성인이 되었을때 즈음하여 나를 장녀로 존중해주며 우리가족의 대소사를 결정할때 나의 의견을 물어보고 반영해주기 시작했던것 같다. 그래서 순종적인 성향이 강했던 엄마와 동생은 아버지에게 말하기 전에 나에게 넌지시 이런 이야기를 할건데 긍정적인 피드백을 받을수 있도록 아버지에게 어필해달라는 요청을 받기도 했던것 같다.
돌이켜 생각해 보면 내가 그토록 아빠가 불편했던 이유는 내가 아버지와 많이 닮았기 때문이다.
맞다고 생각하면 의견을 굽히지 않는 고집스러움.
요즘 언어로 말하면 대문자 T로 상대방을 배려하거나 돌려말하는지 못하고 팩트만 짚는 아집.
그리고 나를 기준으로 생각하는 이기심.
(물론 이건 아버지와 나의 부정적인 부분만 강조한것. 아버지의 장점 또한 많음)
나의 감정과는 무관하게
어쨌든 아버지는 우리집의 가장이었고 모든 일상에 있어 절대적이었다.
그런 아버지와 나의 관계가 조금씩 틀려지기 시작한건 엄마가 갑작스럽게 돌아가시고 홀로 생활하셨으며 또 몇년의 시간이 흐른후 위암 판정을 받으시고 완쾌 판정을 받고 끝날것만 같았던 아빠의 건강상태가 조금씩 안 좋아지면서 호랑이 같던 아버지에서 자녀들에게 의지하는 아빠로 조금씩 관계가 변화되면서이다.
단 몇줄로 엄마가 돌아가시고 아버지가 아프신 시간들을 어찌 표현할수 있을까.
긴 병원생활로 아빠와 나 그리고 동생이 조금씩 지쳐갈때즈음 어느날.
나의 아버지 이중석씨가 아닌 그냥 사람. 70대가 된 노년의 이중석으로 아빠를 바라보게 되었다.
나에겐 애증의 아버지이지만 사람 이중석의 살아온 환경과 과정을 봤을땐 참 애잔한 사람이었다.
구례군 토지면 작은 시골에서 태어났던 소년 이중석은
홀어머니 밑에서 가난하지만 열심히 공부해서 중학교때까지 전교 1~2등을 놓치지 않았으며
가정형편상 고등학교 진학을 못하고 취업을 해야하는 상황에 놓이자 서울로 상경해서 혼자 검정고시를 준비해서 당당히 합격을 했으며 그 기세로 학력고사를 보고 고려대학교 경영학과에 합격을 했지만 첫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해 결국 대학교에 입학하지 못했다. 첫 등록금만 준비되면 학기중에 아르바이트를 하면서 학비를 마련하고자했던 청년 이중석은 결국 첫 등록금을 마련하지 못하고 평생 학력을 고졸로 마감하게 된다. 아마도 그때 아무리 노력해도 안되는 일이 있다는, 너무 많이 쓰라린 첫 실패를 경험했으리라.
그즈음 쓴 상처를 음주로 대처하다 대한민국 남자라면 누구나 다 가는 군대를 가게 되었다.
그때의 군대는 지금과 많이 다르게 구타와 가혹행위가 당연한 일상처럼 생활화되어 있었다. 아버지의 성품으로 미뤄보아 선임들에게 살가운 후임은 아니었을터. 그로 인한 구타는 어쩌면 당연스레 예견되어 있었을까? 선임들의 구타로 인해 몇번의 실신을 경험하고 국군병원으로 이송후 뇌전증이라는 병을 얻게 되어 의가사 제대를 하게 되었다. 그 또한 아빠는 또 한번의 실패라고 생각했을까?
제대후 아버지는 어느 회사에 입사를 하게 되었고 스마트한 머리와 꼼꼼한 성격으로 인정받으며 직장생활을 잘하고 있던 어느날 회사에서 뇌전증으로 쓰러지는 일이 발생하게 되었다. 뇌전증이란 병명은 간질이랑 단어가 주는 부정적인 의미를 없애기 위해 바뀐 현재의 병명인데 그 당시 간질이 워낙 인식이 좋지 않은 병이라 회사에서 뇌전증으로 쓰러졌다는 이유만으로 직장생활을 하기 어렵다며 퇴직을 당했다. 그때의 아빠는 또 얼마나 좌절을 했을까.
대학의 꿈도 평범한 직장인의 꿈도 좌절된 아빠는 세탁소 기술을 배워 귀향을 하게된다.
주먹구구식의 운영을 했던 기존 방식과 달리 서울에서 배운 기술적인 부분을 접목해 입소문을 타기 시작했고 시골 작은 마을에서 잘하는 세탁소로 인식이 되었고 그 근처에 너도 나도 세탁소를 차리며 나름의 세탁소 골목이 형성되는데 기여했다.
가난해서 단칸방 하나로 겨우 시작했던 신혼집 살림에서 온전한 내 가게를 갖게되고 또 그 건물을 담보로 새로운 건물을 사고 그렇게 자리잡았다. 아빠의 청춘을 담보로.
하루종일 서서 일을 해도 돈을 모으는 재미에 신났으리라.
돈 모으는 재미만 알고 돈 쓰는 재미는 몰랐어서 몸이 축나는줄 모르고 일만 했었더랬다.
똑똑하고 수재소리를 들었던 그 청년은 그렇게 노년을 바라보고 있었다.
그러다 갑작스레 엄마가 돌아가시고 또 다른 상실감을 겪게되고 마음을 추스린다고 생각할즈음 위암 판정을 받고 여러번의 염증 수술과 고관절 재수술후 재활 과정을 겪으며 건강에 대한 상실감을 또 겪게 되었다.
어느날 병원에 누워계신 아빠를 보는데 처음으로 아빠의 살아온 인생이 궁금해졌고 상상해보니 많아 애잔한 마음이 들었다…
아빠가 걸어온 발자취를 따라 인생을 살아왔다면 나는 어떤삶을 살고 있을까? 서툴지만 그 자리에서 최선을 닿했던 아빠 덕분에 어쩌면 지금의 나는 조금은 번듯하게 자랄수 있었던건 아닐까.
오늘은 나의 아버지 이중석씨에게
소란한 마음을 숨기고 무던하게 전화 한통을 해야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