유라시아 대륙 12,500km의 기록, <이토록 우아한 제로웨이스여행>
얼마 전, '4050 인생 2막을 위하여'라는 주제로 서울 시민대학에서 강연했다. 몇 년 전까지만 해도 평범한 주부였던 내가(물론 지금도 평범) 오마이뉴스 시민기자로 시작해서 책도 몇 권 내고, 무대극도 쓰고, 이번에는 드라마까지 도전하고 있으니 그런 내 이야기를 들려 달라는 것이다.
미술이나 클래식 관련 책을 냈기 때문에, 관련 강의는 제법 많이 해왔다. 그런데 내 이야기를 들려달라니. 나 같은 걸 누가 궁금해 한다고. 일단 수락하긴 했는데 걱정이다. 누가 오기나 할까? 아무도 안 오면 어쩌지?
강연에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많은 사람이 왔고 반응은 뜨거웠다. 역시 서울에는 사람이 많이 산다. 그리고 아무런 기대 없이 왔기에 조금만 괜찮아도 좋은 것이다. 재밌다고 소문난 영화 막상 보면 실망하는 이치랄까? 나는 그 반대의 경우지 싶다.
신문에는 실리지 않을 나의 일상
그리고 다음 날, 어느 신문사에서 나의 하루를 찍고 싶다는 연락이 왔다. 작가의 하루가 궁금하단다. 깜짝 놀란 난 단박에 고사했다. 온종일 세수도 안 하고 잠옷 바람으로 앉았다 누웠다 만 반복하고 있는데, 이런 모습을 보여주는 건 자폭이나 마찬가지.
그래서 이 자릴 빌어 나의 비루한 하루를 공개한다. 일단 새벽에 눈을 떠 노트북을 켜고 기사 검색을 시작. 영화나 드라마 몰아보기 유튜브를 시전하고 본격적으로 OTT 탐방을 위해 커피를 진하게 내려 마신다.
이 영화, 저 영화, 마치 카드 돌려막기 하듯 채널을 돌린다. 취향에 맞는 작품을 찾기 위한 지난한 여행이 시작된 것이다. 이 와중에 덩치가 산만 한 아들 둘이 번갈아 가며 "아침 뭐 먹어?"를 묻지만, 못 들은 척한다. 호환·마마보다 더 무서운 "엄마 뭐 먹어?"라는 말은 국가 차원에서 금지했으면.
그렇게 OTT 탐방이 끝나고 드디어 한글 화면을 띄운다. 고요하게 한글 화면을 보다가 슬그머니 일어나 강아지 산책, 산책 후, 강아지 발 씻기고 밥을 준다. 나도 배가 고프다. 겨우 한술 뜨고 나면 열한 시. 새벽부터 에너지를 썼더니 피곤하다. 이럴 땐 잠시 누워서 핸드폰을 본다. 그러다 문득 내가 지금 뭐 하는 거지? 싶은 현타가 오고. 벌떡 일어나 근처 서점이든 도서관을 간다. 가끔은 영화관.
다른 작가들이 애써 써 놓은 작품을 에어컨 아래서 술술 읽고 있으면 그렇게 꿀잼이다. 그렇게 창작 에너지를 흡입하고 장을 봐서 집으로 돌아오면 저녁밥 할 시간. 저녁을 먹고 나면 8시. 이제 드디어 창작하기 좋은 시간이 왔다.
근데, 먼저 몸이 너무 찜찜해서 일단 씻는다. 의미 있고 스펙터클한 일상을 기대했다면 이쯤에서 접으시라. 나의 일상은 예술영화다. 지루하다. 다시 씻고, 잠깐 침대에 누워 선풍기 바람에 머릴 말리다가 깜빡. 눈을 뜨면 다시 새벽이다. 이것이 나의 하루인 것이다.
그럼 글은 언제 쓰냐? 공모전 마감이 다가올 때! 그땐 미친 듯이 하루 20시간을 쓴다. 보통의 날엔 머릿속으로 이리저리 판을 짜고, 생각나는 대로 캐릭터 메모하고, 큰 사건의 줄기를 먼저 그려보고, 세세한 사건들로 살을 붙인다. 그리고 공모전이 뜨면, 전속력으로 달린다(콜록콜록! 왜 과장하면 기침이 나는지).
2019년에 처음 드라마 아카데미를 다닌 이후 올해 드디어 드라마 공모전에 당선되었다. 본격적으로 미니시리즈를 쓰기 시작하면서 팬데믹 영향도 있었지만, 내가 만든 세계 안에서 여행하느라 진짜 몸을 쓰는 여행은 거의 가지 않았다.
그것만으로도 여행에 대한 갈증은 어느 정도 풀렸기 때문이다. 그러고도 글이 풀리지 않아 떠나고 싶은 날이면 '집 나가면 개고생이야. 집이 최고야'를 되뇌며 셀프 가스라이팅한다. 그렇게 가스라이팅 하다 보니 원래 여행을 좋아했던 내가 진짜 집순이가 되었다.
그런데 바로 며칠 전, 그런 나의 엉덩이를 걷어차는 책을 만나게 되는데. <이토록 우아한 제로 웨이스트 여행>이다. 표지를 살펴보니 1년 반을 자전거를 타고 유라시아 대륙 1만 2500km를 달렸단다. 그것도 일회용품을 쓰지 않고! 지은이를 보니 삼십 대 여자다. 헐, 미쳤구나!
끊임없이 여행의 이유를 질문하는 작가
▲ 이토록 우아한 제로 웨이스트 여행 ⓒ 도서출판 사우
그러니까 인천에서 자전거를 배에 싣고 중국 남부(인천에서 가장 가까운)에 내려 거기서부터 중국, 라오스, 태국을 거쳐 미얀마, 인도, 파키스탄, 타지키스탄, 우즈베키스탄, 투르크메니스탄, 이란을 거쳐 튀르키예 이스탄불의 아야소피아 성당까지 자전거를 타고 갔다고? 그것도 30대 젊은 여자 혼자서? 질투와 동경, 호기심과 걱정, 네 가지 감정이 네 박자로 솟구쳤다.
저자는 환경 관련 NGO에서 일했다. 일이 너무 많아 오직 일 말고는 다른 것을 생각할 여유 없이 살았는데, 어느 날 가장 친한 친구의 갑작스러운 죽음으로 인해 일만 하며 달리던 일상의 기차에서 내리기로 한다. 기차에서 내려 뭣을 할까 고민하다가 결정한 것이 바로 자전거로 유라시아 여행하기.
겨우 여기까지 읽었는데 눈시울이 붉어지고 코를 푸는 나. 책을 읽으면서 얼마나 키득거렸는지 침까지 흘렀다. 웃다가 정신이 혼미해질 수 있으니 조심. 저자는 여행 초반, 하루하루가 긴장의 연속이라 오직 무사히 달리는 것에 집중했다. 시간이 흐르면서 이마저도 일상이 되어 버리니 여행을 와서도 행복하지 않았다. 스스로 여행을 떠나온 이유에 관해 끊임없이 질문하기 시작한다.
이쯤 되니 나도 잠시 책장을 덮어본다. 나도 내가 좋아서 글을 쓰기 시작했고, 어리바리 낸 책이 잘 팔렸고 여기저기 강연도 다니는 꿈 같은 인생이 되었는데, 어느덧 내게도 이것이 일상이 되고 나니, 나 또한 마냥 행복하지만은 않다. 더 높이, 더 멀리 뛰고 싶은 욕망은 나의 성취를 자꾸 하찮은 것으로 만들어 버리고 난 더 작아진다.
최근 드라마 공모전에 당선이 되지 않았다면 더 큰 슬럼프가 왔을지도 모르겠다. 당선은 내게 상금뿐 아니라 계속 쓸 동력을 만들어 주었다. 이 동력은 내게 쓰는 즐거움을 다시 가져다주었다. 그러니 나란 존재가 글을 쓰면서 행복하려면, 성과가 나고 누군가에게 인정받아야 하는구나. 난 골방에 박혀 글을 쓰지만, 작품을 통해 결국 사람들과 연결되고 싶구나.
저자의 이 고민은 태국 '시시아속'에서 며칠을 보내고 해결되었다. 시시아속은 공동체 마을인데 지금의 공동체가 되기 이전, 아무리 열심히 일해도 먹을 게 없어 바나나 한 개를 셋이 나눠 먹었단다. 그 말에 저자가 그렇게 힘들 때 어떻게 견뎠는지 묻는다.
이에 촌장은 "괜찮았어, 부자가 되는 게 목표가 아니라 가난해지는 게 목표였거든. 그냥 또 주고 싶어. 받지 않고 주고 싶어. 주는 것이 내게는 실천이야. 그걸로 마음의 화를 없애고 그래"라고 말한다.
자신을 돌아보고 싶은 사람에게
전율이 왔다. 주는 것이 실천이고 그걸로 마음의 화를 없앤다니. 나는 멍하니 천정을 바라보았다. 한참 마음을 추스르는데, 아들이 들어와 묻는다. "뭐 해?" 난 밑줄 그은 문장을 보여주며 "이거 보니까 엄마가 부끄러워서" 아들은 한참 문장을 보다가 "엄마, 내 계좌로 오만 원만 보내, 그리고 마음의 화를 없애" 하마터면 실천할 뻔했다. 심신 미약일 때 보이스피싱 조심!
저자가 찾은 답은 알려주지 않겠다. 직접 읽어보시라. 여자 혼자 하는 여행이 어찌 낭만뿐이었겠는가. 들개에 쫓기고 변태남에게 쫓기고 역경의 고비마다 공포영화보다 더 식은땀이 흘렀다. 저자가 무사히 돌아올 수 있게 도와준 많은 사람, 날씨, 자연, 운에도 감사드리고 싶다.
책을 다 읽고 나니 내 안에서 온갖 질문들이 아우성쳤다. 나는 지금 무엇을 하며 살고 있는지. 지금 내가 타고 있는 기차에 난 그대로 머물러도 되는지. 혹시 지금 내려야 하는지. 밑도 끝도 없는 질문들이 도깨비방망이처럼 가슴 밑바닥부터 불쑥불쑥 튀어 올랐다. 그리고 안개가 걷히듯 질문들의 답이 하나씩 보이기 시작했다.
도저히 끝나지 않을 것 같던 여름도 갔다. 이제 책 읽기 너무 좋은 가을. 나는 이 책이 당신의 가슴에 닿아 많은 질문을 만들고 그에 답하기 위해 자신을 돌아보는 뜻깊은 시간이 되길 바란다. 책을 읽는 동안도 제로 웨이스트니 눈물 닦고 코 풀 때 휴지 말고 꼭 수건을!