k는 정암사에 가보고 싶다고 했다. 나는 핸드폰을 꺼내 정암사를 쳤다. 강원도 정선에 있는 절이었다. 그곳엔 자장율사가 마노석으로 만든 수마노탑이 있고, 그 아래 적멸보궁에는 부처님 사리가 있다는 정보가 눈에 띄었다. k가 정암사에 가고 싶은 이유도 수마노탑에 있었다. 풍수지리적으로 기운이 모여 있어 소위 말하는 ‘기도발’이 좋다고 했다. k에게 무슨 간절한 소원이 있는지 묻지 않았다. 기도발 좋은 곳에서 빌 소원은 나도 많았으니까. 지난 일요일 새벽, k와 정암사를 향해 출발했다.
이른 아침 정암사는 고요했다. 서늘한 산길을 십여 분 올라가니 수마노탑이 있었다. k와 나는 탑을 돌거나 절을 올리며 각자의 소원을 빌었다. 풍수지리는 몰라도 좋은 기운이 느껴지는 건 분명했다. 절을 나오다 벽에 붙은 ‘삼탄 아트마인 현대미술관’ 전시 포스터를 발견했다. ‘윤후명 문학과 미술과의 만남’이라는 주제의 전시였다. 별다른 계획이 없었고, 차로 5분 거리에 있었기에 주저 없이 출발했다.
삼탄 아트마인은 폐광된 광산을 미술관으로 만든 곳으로 일단 엄청 넓고 관람 동선이 복잡했다. 입장료는 만 삼천 원으로 생각보다 비쌌지만, 비싸야 볼 것이 있는 법, 오히려 기대가 커졌다. 매표 직원이 관람 동선을 알려주는데, 이게 좀 당황스럽다. 우리가 서 있는 곳은 1층처럼 보이지만 실제론 4층이고 계단을 따라 1층까지 내려가면서 층마다 전시된 작품들을 관람하는 방식인데, 50대로 보이는 여자 직원은 하도 같은 설명을 많이 해서 인지 목소리가 갈라져 무슨 말인지 알아듣기 어려웠다. 진즉 알아듣기를 포기한 k는 조금 떨어져 브로셔만 보고 있었다. 나는 그녀의 말을 해독하느라 머리에 쥐가 났고, 속사포 랩 같은 그녀의 설명엔 쉼표가 없었다.
그러다 2층은 드라마 ‘태양의 후예’를 찍었던 곳으로, 송혜교가 취조당했던 의자가 있다며 k를 향해 크게 물었다.
“여기 여자분 송혜교처럼 찍어주실 수 있으시죠?”
잠시 침묵이 흘렀다. 웃지 않는 우리를 보며 어색한 표정을 짓는 그녀를 보고야 유머임을 직감한 난 예의 웃음을 지었다. 내 웃음에 안도한 그녀가 준비한 설명을 마칠 때까지 난 제2외국어를 듣는 심정으로 알아듣는 척하며 적당한 타이밍에 고개를 끄덕였다. 관람 후엔 큐알코드 찍고, 후기 남겨달라는 부탁으로 설명은 끝났다.
메인 전시 외에도 아프리카 미술전, 진시황 유물전 등 상설 전시가 함께 열리고 있었다. 흥미로운 전시였지만, 탄광으로 사용했던 당시 모습을 그대로 재현하고 있어 이곳에서 일했을 사람들 생각에 숙연해졌다. 미술 작품보다는 공간이 주는 힘이 더 컸다.
가느다란 줄로 공급되는 희미한 산소에 의지해 폐에 탄이 쌓여가도록 일해야 했던 광부의 삶 앞에 관람이란 말이 죄스러웠다. 갱도가 무너져 몇 사람이 죽었다는 뉴스가 매일 나오던 시절이 있었다. 강원도와 정반대에 살았던 나는 탄광을 본 게 이번이 처음이었다. 막연히 아는 것과 눈으로 보는 것엔 감정적으로 큰 차이가 있었다. k와 난 두 손을 공손히 모으고 전시장을 돌았다. 폐광을 미술관으로 만들어 그 역사를 잊지 않게 만든 건 그 자체로 의미가 있었다.
긴 관람을 마치고 다시 매표소로 돌아왔다. 벌써 한시가 넘었고, 정암사에서부터 네 시간 넘게 서 있었더니 배도 고프고 다리도 아팠다. 그 말인즉, 큐알을 찍고 후기를 남길 여력이 없다는 말이다. 매표 직원이 우리에게 했던 말을 다른 관람객에게 그대로 하는 동안 나와 k는 도망치듯 그곳을 빠져나왔다. 뒤통수에 “안녕히 가세요”라고 말하는 그녀의 목소리가 닿았다. 어쩐지 힘이 빠진 소리였다.
생선구이 백반을 먹다가 문득 수마노탑에서 ‘오늘도 무사히’를 빌었을 많은 광부와 그 가족들이 떠올랐다. 그들을 생각하면 그 탑은 분명 기도발이 좋아야 했다. 안 좋더라도 좋다고 믿어야 했다. 인간의 힘으로 어찌할 수 없는 것엔 믿음이 필요하니까.
후기를 남길걸, 하는 후회도 생겼다. 매표 직원에게 똑같은 말을 목이 쉬도록 하게 할 게 아니라 관람 동선을 세세하게 표시하고 설명을 써서 붙이면 될걸, 한 사람에게 과도한 노동이 부과된 점을 외면했다. 탄광에서 과도한 노동을 하다간 사람들에 대한 부채감이 매표 직원에게 전가된 면도 있지만, 개선할 수 있는 문제를 개선하지 않아 목이 쉬어버린, 그래서 한국말인데도 제2외국어처럼 들리는 그녀의 목이 '오늘도 무사하기' 위해 작은 소리일망정 남겼어야 했다. 내 배고픔과 다리 아픔만 생각하느라 타인의 고통을 외면한 게 내내 마음에 걸렸다. 물론 후기를 남긴다고 해서 반드시 개선되리란 보장은 없지만, 그럴 확률을 따지기 전에 뭐라도 실천했어야 했다. 그런 나를 반성하며 그때 남기지 못한 후기를 이렇게라도 남긴다.
“관람 동선을 세세하게 표시해 주시고, 알아야 할 정보는 벽에 붙여주세요.
전시는 돈이 아깝지 않을 만큼 괜찮아요.”
ps: 작품 사진은 저작권 문제로 첨부하지 않았어요. 볼만한 가치가 있는 많은 작품들이 삼탄 아트마인에 있답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