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고통의 눈물' 흘리게 만드는 영화.
이 글에는 영화 '가버나움'의 스포일러가 있습니다.
SNS상에서 최고의 영화라고 꼽는 사람들이 많았다. 포스터에 나온 아이의 눈빛만 봐도 삶은 달걀 열 개는 삼킨 듯 목구멍이 막히고 뭉클한 신물이 올라왔다. 책은 도끼와 같다고 한다. 고정된 사고를 내리찍는. 영화도 그렇다. 통째로 흔들릴 마음의 준비를 하고 영화관을 향했다. 생각할 거리를 던져주는 이런 영화들은 어찌 된 일인지 상영관이 많지 않다. 더구나 시간도 오전 9시 단 한번. 십여 명의 사람들이 여기저기 흩어져 앉았다. 대체로 혼자 온 사람들이다.
가버나움은 이스라엘의 갈릴리 바닷가에 있던 마을로 예수가 수많은 기적을 일으켰다는 곳이다. 그럼에도 불구하고 사람들이 회개하지 않고 믿지 않았기 때문에 몰락한 곳. 감독은 이 혼돈의 빈민가 레바논 베이루트에 기적이 일어나길 바라는 마음으로 제목을 이렇게 붙였다.
이 영화는 레바논 출신의 여성 감독 나딘 라바키가 각본에 참여하고 연출, 조연배우까지 1인 3역을 한 영화다. 71회 칸영화제 심사위원상, 전 세계 유수 영화제 관객상 8관왕, 뉴욕 타임즈 올해의 영화 탑 10, 레바논 최초 76회 골든 글로브 시상식 외국어 영화상 후보, 등 많은 영화제를 휩쓸었다, 특히 칸에서는 무려 15분 동안 기록적인 기립박수를 받은 작품이다.
감독은 이 영화를 위해 주요 배우들을 실제 경험을 가진 인물들로 길거리에서 캐스팅했다. 주인공 자인 역의 자인 알 라피아는 시장에서 배달 일을 하는 시리아 난민 소년, 라힐 역의 요르다노스 시프로우는 불법 체류자였으며, 한 살배기 요나스 역의 보루와티프 트레져 반콜 또한 레바논에서 인종차별을 겪는 아이 었다.
배우들은 칸영화제 참석 일주일 전까지 법적으로 존재하지 않는 사람들이었다. 출생에 관한, 혹은 국적에 관한 서류가 없는 사람들. 이 영화는 엄연히 존재함에도 존재하지 않는 삶을 살아가는 사람들을 보여준다. 그들의 존재를 통하여 우리가 알지 못했던, 혹은 알고도 외면했던 현실을 똑바로 마주하게 만든다.
자인은 수갑을 차고 재판정에 서있다. 사람을 칼로 찌른 죄로 수감 중인데 그 상태로 부모를 고소했다. 부모의 죄는 자신을 태어나게 만든 것. 자인은 출생신고도 되어 있지 않고 그 부모도 그의 정확한 생년월일을 모른다. 치아 상태로 본 의사의 소견이 12세로 추정된다고 할 뿐. 자인의 부모는 마약성분의 진통제를 교도소에 팔아 생계를 유지한다. 이 약품들을 수집하는 역할은 자인의 몫이다. 외에도 자인은 길거리에서 주스를 만들어 팔고, 자기 덩치보다 큰 가스통을 배달하고, 슈퍼를 청소하는 등 하루 종일 노동에 시달린다. 또래의 아이들이 버스를 타고 학교 가는 장면을 아이는 음료수 박스를 나르다 무심히 바라본다.
화면에 등장하는 동생의 숫자도 세기 힘들다. 좁은 집안, 어린아이들 사이 막내 아기는 멀리 가지 못하게 발을 기둥에 묶어놓았다. 자인은 바로 아래 여동생 사하르(11세)와 각별한 사이다. 대화가 되지 않는 부모를 대신해 말이 통하는 남매 사이랄까.
길에서 주스를 만들어 팔던 자인은 바지에 피가 묻어있는 사하르를 보고 바로 공중화장실로 데려간다. 사하르를 변기에 앉히고 자인은 동생의 피 묻은 속옷을 빨아 입히며 부모에게 절대 비밀로 해야 한다고 말한다. 부모가 아는 순간 가임기 여성으로 간주되어 팔려갈게 뻔하기 때문이다. 자인은 입고 있던 민소매 티를 벗어 돌돌 말아 건네며 사하르에게 속옷 사이에 끼우라고 알려준다.
심장이 발끝까지 떨어지는 기분이었다. 우리나라에서도 생리대 살 돈이 없어 신발 밑창을 이용했다는 소녀들의 뉴스와 겹쳐 머리까지 띵했다. 자인의 눈물겨운 노력에도 불구하고 부모는 사하르를 조혼이라는 이름으로 팔아버린다. 자인은 분노했다. 그리고 무작정 집을 나왔다. 하지만 어린아이가 갈 곳은 없었다. 결국 그를 받아준 사람은 청소부로 일하는 불법체류자 라힐이다. 라힐은 젖먹이 아들 요하스를 몰래 혼자 키우는 여성이다. 자인은 라힐의 집에서 라힐이 일하러 간 동안 요하스를 돌본다. 짧은 순간이었지만 자인에게는 따뜻한 공간이었다. 손대면 부서져버릴 살얼음처럼 연약한 사람들의 따뜻한 연대.
그러던 어느 날 라힐이 불법체류자로 체포되어 집으로 돌아오지 못한다. 영문을 모르는 자인은 요하스를 데리고 라힐을 찾아 헤매지만 찾을 수가 없다. 자인과 요하스의 살기 위한 투쟁이 눈물겹다. 끝까지 요하스를 지키고 싶은 자인의 고군분투하는 모습은 안타까움을 넘어서 고통스러운 탄성이 새어 나오게 만들었다. 객석 여기저기서 눈물소리가 났다. 영화를 보면서 흘리는 눈물은 세 가지다. 감동의 눈물, 슬픔의 눈물, 그리고 고통의 눈물. 지금 여기, 새어 나오는 울음은 고통의 눈물이었다.
아이를 키워 본 사람이라면 더더욱 한 장면도 빠짐없이 아팠을 것이다. 한 순간도 눈을 뗄 수 없이 고단한 육아는 둘째치고 거리를 돌며 아기와 먹고살아야 하는 자인. 결국 요하스를 입양 중개인에게 넘기고, 타국으로 가기 위해 신분을 증명해 줄 뭔가를 찾으러 집으로 돌아온 자인은 사하르의 죽음을 알게 된다. 격분한 자인은 칼을 들고 사하르를 죽음에 이르게 한 남자의 집으로 달려간다.
자인을 면회 온 엄마는 “신은 하나를 데려가면 하나를 주신다.”라고 말한다. 무슨 말인지 묻는 그에게 엄마는 또 동생이 생겼다는 임신소식을 알리며 사하르처럼 딸이었으면 좋겠다고 한다.
자인은 억장이 무너지는 눈빛으로 엄마에게 말한다. “엄마의 말이 칼처럼 심장을 찌르네요. 다시는 나는 찾아오지 마세요.” 그리고 재판장에서 말하길, “신은 우리가 짓밟히길 바란다. 인생이 개똥 같다. 내 신발보다 더럽다. 우리 부모가 아이를 낳지 않게 해 주세요.” 자인의 입에서 쏟아지는 말들이 칼처럼 내 심장을 찔렀다.
걸핏하면 때리고 방치되고 학대당하는 지옥 같은 삶을, 태어날 동생이 살아가야 한다는 사실이 자인에게는 괴롭기만 하다.
가버나움은 보는 내내 고통스럽다. 어디까지 현실이고 어디까지 허구인지 짐작조차 못하겠다. 자인을 가장 괴롭게 만드는 사람이 다름 아닌 부모다. 그 부모는 자신들도 그렇게 살아왔고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뭐가 문제냐고 되레 묻는다. 나는 입술을 깨물었다. 관습이라는 이유로, 혹은 나도 그렇게 살아왔으니까, 남들도 다 그렇게 사는데, ‘이게 다 너를 위해서야’라는 소름 끼치는 이유로 내가 놓쳐버린 것이 있는지, 내가 보지 못한 것이 있는지 돌아보았다. 그리고 생각해본다. 자식을 낳는 것을 넘어선 부모의 자격은 무엇일까. 부모라는 이름으로, 권력으로 내가 내 자식의 심장을 찔렀던 적은 없었을까. 자인의 슬픈 눈빛에 한동안 잠들기는 어려울 것 같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