우리 모두 다 다른 속도로 달리고 있다
사람은 무언가를 해야 한다는 인식에 매여 살면 참 힘든 것 같다. 난 최근까지도 의과대학원에 붙어야 한다는 생각에 매여있었고 참 근시안적이었다. 일기장에 꿈을 적어 내려 가던 시절엔 참 행복했었고 힘듦을 버틸 수 있는 이유였는데, 어느 순간 난 봉사하고 사랑하는 의사가 되는 꿈이 아닌 현실적으로 돈과 명예를 좇았던 거 같고, 어쩌면 그렇게 변했을 때 난 지쳤는지도 모른다.
최근 난 무엇을 위해 날 채찍질했는지 되돌아보았다. 아마 내가 의사가 되고 싶다고 꿈을 꾸었을 때 주위에서 생겼던 기대 어린 시선, 조금은 공부 잘한다고 우쭐우쭐거렸던 내 유치한 자존심. 그리고 주위에서 나를 재단하고 만들었던 "모범생"이라는 틀에 부응하고 싶었던 마음. 어쩌면 그 채찍질이 날 더 열심히 달리는 경주마가 되게 할 수 있었겠지만... 난 다른 육천 명과 함께 의과대학원을 위한 레이스를 세 번이나 완주했다. 하지만 합격의 트로피는 결국 받지 못했고, 경주가 끝나고 나니 난 방향을 잃은 것만 같았다.
고등학교, 그리고 대학교를 졸업할 때 까진 우린 모두 같은 속도로 달렸다. 같은 시험을 보고, 같은 과제를 하고, 다 같이 어떤 대학교에 붙을지, 그리고 우리의 경우 어떤 대학원에 붙을지 (주: 호주는 대학원제를 차용해서 바이오메디슨과 졸업 후 의학, 치의학, 물리치료사 등 다양한 대학원을 갈 수 있다) 다 함께 걱정했었다. 나 같은 경우는 졸업 후 여러 번 걸쳐 의과대학원에서 미끄러진 후, 주위에 자기의 길을 정해 달리는 친구들을 보고 슬프기도 했다. 나도 함께 달리고 싶었던 게 큰 마음이었다.
최근 몇 주동안 푹 쉬며 느꼈던 것은 우리 모두 다 다른 삶의 속도가 있다는 것이다. 한 예로, 내가 하던 연구직에선 오랫동안 가족을 위해 뒷바라지하던 분께서 아이들을 다 길러내신 분도 있었고, 방글라데시에서 의사로 생활하시다가 호주로 이민 오셔서 커리어를 쌓아가시는 분도 있었다. 우리 부모님도 한국에서 쌓아오신 커리어를 뒤로 두고 호주에 오셔서 아예 맨 땅에 처음부터 시작하셨지 않나.
또 고등학교 친구들과 거의 2년가량의 럭 다운이 끝나고 모여서 수다 떨며 알게 된 건: 내 주위엔 일찌감치 가족을 만들어 알콩달콩하는 친구도, 졸업 후 세계여행을 하며 미지의 세계를 탐험하는 친구도, 법학과를 진학했지만 커피에 빠져 바리스타로 일하는 친구도, 의사가 되어 인턴으로 열심히 일하는 친구도... 삶의 모양새는 참 다양했다. 정답이 있는 게 아니었다. 우리 모두 다 각자의 고민이 있고 다른 삶을 살고 있었지만, 그 안에서 자그마한 행복이 있었으니까.
요즈음은 다양한 사람들과 대화하고, 여러 매체를 접하고, 책을 읽으면서 우리에겐 참 많은 길이 있고, 각자 다 다른 삶의 속도가 있구나.라는 걸 다시금 되새기고 있다.
난 요즘 천천히 걷고 있다. 엄마와 알콩달콩, 티격태격. 푸른 하늘과 봄내음을 맡으면서 우리 집 주위를 한 바퀴 돌기도 하고, 아니면 무작정 배낭을 메고 구글 맵 한 곳을 찍은 다음 그곳까지 쭉 걷기도 한다. 삼십 분이 걸리든, 두 시간이 걸리든.
요리도 시작했다. 유튜브를 보면서 하루에 서 너 개의 한식 요리와 디저트를 구워내곤 한다. 오늘은 에그타르트를 구웠는데, 평이 좋았다. 특히 디저트는 손을 대지도 않는 우리 엄마가 네 개를 먹었다는 건 진짜 큰 성공인 것 같다.
조금만 더 이 느린 속도를 즐길 것이다. 너무 빠르게 뛰었으니, 조금은 쉼표가 필요하겠지. 의대에 못 붙어 아쉬운 마음은 뒤로 하고, 원하는 책을 마음껏 읽고 베이킹을 즐기면서 천천히 나만의 속도를 되찾아가 볼까 한다. 아마 조깅 정도로. 옆에 사람과 떠들 수도 있으면서, 음악도 듣고 속도도 느리지 않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