연기수업에서 현직 드라마pd님의 특강을 들었다. 오디션과 드라마 촬영 현장, 연기에 대한 이런저런 문답을 진행하고 나서 수업 말미에 자기를 소개하는 시간을 가졌다. 나야 뭐 그간 했던 대로 주로 어떤 이미지의 역할을 맡았었는지 위주로 주-욱 경력을 나열했다. 나는 이런이런 역할을 했었고, 이걸 좋아하고, 몇년생이고... 뭐 그런 것들.
모든 사람들의 자기소개가 끝나고 pd님이 한마디 하셨다. 요지는 '자기를 포장하지 말라'는 것이었다. 오디션을 통해 수많은 배우들을 만나다 보니 실제로는 아닌데 자기를 거창하게 포장하는 사람은 그 모습이 다 보인다며, 진솔하게 자기가 어떤 사람인지 말하는 게 낫다는 말이었다.순간 그 말이 내 마음을 찔렀다. 마치 나를 두고 하는 말인 것 같아서 뜨끔했고, 여러 시간들을 지나오며 나를 포장하는 것에 길들여진 내 모습이 속상하고 아팠다.
동시에 의문이 들기도 했다. '내가 진짜 진솔한 내 모습을 보여주면 나를 뽑아줄까?'하는 생각.
열심히 준비했던 워크숍 촬영을 망치고 몇날 몇일을 실의에 빠져 스트레스 받고 내 자신을 혐오하고 내가 배우가 될 수 있는 사람인가에 대해 의심하는 나. 남들과 나를 비교하면서 우울해 하는 나. 타인의 요구엔 충실히 반응하면서 정작 스스로는 잘 돌보지 못하는 나. 하루하루 두려움이라는 큰 산을 힘겹게 넘으며 배우생활(인지 배우지망생 생활인지 모를 이 삶)을 간신히 연명해 가고 있는 나.
이게 지금 나의 현실인데, 이런 나를 심사위원들이 좋게 봐줄까? 사람들이, 동료들이 좋아해줄까?..하는 두려움. 그 두려움이 자꾸만 평균 언저리의 포장지로 스스로를 둘러싸게 한다.
그러면서 또 드는 생각은, 심사위원들은 진짜 내 소소하고 일상적인 모습이 궁금할까, 하는 의문.
- 저는 요즘 뜨개질을 해요. 하고 있으면 생각정리에도 도움이 되고 마음도 편안해지거든요.
- 저는 키움히어로즈 팬이예요. 오늘도 야구를 봤는데 연장까지 가서 지는 바람에 입에서 육두문자가 조금 나왔답니다.
- 주식에도 관심이 많답니다. 실제로 소액으로 투자도 하고 있구요. 의정부 워렌버핏이 되는 게 꿈입니다.
저는 호기심이 많아요. 그래서 관심사가 생기면 좀 집요하게 파고드는 스타일이예요. 얼마 전에는 생활법에 관심이 생겨서 민법 책까지 사서 공부를 해보기도 했고, 예전엔 축구에 관심이 많아서 아시안컵을 보러 카타르에 다녀온 적도 있어요. 되게 인상적이었던 건 거기에서 북한 사람들을 봤어요. 북한 경기 때 응원단이 왔는데 실제로 중동에서 일하고 있는 북한 노동자들이더라구요. 먼발치에서만 봤지만 저한테는 신기하고 묘한 기억이예요.
정말, 이런 이야기에도 관심 있으신가요? 그렇다면 참 감사할텐데 말입니다.
나는 정말 '나로서' 받아들여지고 싶었다. 하지만 입시, 취업준비, 사회생활, 아르바이트, 여러 조직생활, 대외활동, 오디션, 사적인 관계 등을 통해 수없이 거절당하는 경험을 하면서 사회생활을 하면서 온전한 나로서 받아들여지는 것은 어렵겠다는 생각을 하게 되었다. 나는 사람들이 나의 외모, 직함, 학력, 경력, 사는 곳, 나이, 성별.. 이런 것들을 다 떼고 나로서 받아들여주기를 원했다. 내가 좋아하는 건 무엇인지, 내 요즘 화두가 뭔지, 관심사가 뭔지, 그걸 왜 좋아하는지... 이런 걸 물어봐주길 원했다. 근데 그렇게 바라면 바랄수록 실망만 커지고, 상처만 받게 됐다.
아마 내가 나를 포장하게 된 건 이러한 과정들의 결과일 것이다. 나도 나를 있는 그대로 세상앞에 내놓고 싶다. 누가 나를 싫어하든 말든, 무시하든 말든, 탈락 시키든 말든. 근데 아직 나에게 그런 걸 다 무시할 용기가 없나보다. 누가 나를 싫어하면 여전히 신경쓰이고, 무시당하면 너무나 속상하고, 오디션에서 탈락하면 자괴감이 드는 걸 어쩌겠는가. 나도 나를 사회가 덧씌운 답답한 포장지에서 해방시키고 싶다. 나만이 나를 구원할 수 있는데 스스로를 구할 방법을 아직 찾지 못해 답답할 뿐이다.
나에게도 진정한 자기 사랑에 이르러 나를 둘러싼 모든 억압과 포장을 벗어던지고 "유레카!"를 외칠 수 있는 날이 올까.
2021. 4. 6.