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솔직함이 때로는 폭력이 될 수 있다"는 말을 한 TV 프로그램에서 접했다. 이 문장을 듣고 감정보다는 이성을 중시하는 누군가는 있는 그대로를 이야기하는 것이 왜 나쁘냐고 반문할 수도 있다. 하지만 누군가는 솔직함이라는 이름으로 포장된 말이 폭력처럼 다가오고, 상처받을 수 있다. 진실을 말하는 것과 상처를 주는 것 사이의 경계는 우리가 생각하는 것보다 훨씬 모호하다. 그렇다면 우리가 말하는 '솔직함'이란 대체 무엇일까?
요즘 푹 빠진 미국드라마 <굿 닥터>에선, 자폐를 가지고 있기에 지나치게 솔직한 의사 머피가 환자들에게 상처를 주는 에피소드가 등장한다. 꽤나 자주. 그 중 갓 태어난 아이의 병이 혹시 본인의 임신 중 약물 복용 때문일 수 있냐는 엄마의 질문에, 머피는 그럴 수 있다고 대답한다. 사실이었지만, 당장의 치료에 도움이 되지 않고, 수술이 잘 되지 않았을 때 엄마가 가질 수 있는 죄책감을 생각하면 굳이 하지 않아도 되는 이야기였다. 사실 머피는 이해하지 못한다. 물어봤으니까 답했을 뿐이고, 사실을 대답한건데 그게 왜 잘못인지.
이 장면을 보면서 나는 생각했다. 솔직하다는 것이 폭력이 되는 건지, 물어본 것에 그대로 답했을 뿐인데 왜 죄가 되는지. 여러 의견이 갈릴 수 있을 것이다. 특히나 머피처럼 공감능력이 선천적으로 떨어지는 사람들, 혹은 그렇지 않더라도 소위 요즘 말하는 '쌉T'이기에 공감능력이 다른 사람들보다 떨어지는 경우라면 더욱 그럴 것이다. 하지만 결국, 그것에 대한 정답을 내릴 수 없다. 아니, 정확히는 정답이 없다는 게 정답인지도 모르겠다.
문득 고개를 돌려 내 주변을 둘러본다. 내 주변에는 솔직한 사람들보다는 자신을 속여 배려하고 양보하는 사람이 많다. 그리고 그들은 뒤에서 서운함을 토로하는 경우도 많다. 나 역시 굳이 범주를 따지자면 솔직함보다는 그런 쪽에 속한다. 가끔은 내가 조금 더 솔직한 DNA를 가졌더라면 어땠을까 생각한다. 마음에 없는 칭찬을 하지 않아도 되고, 하기 싫은 약속을 거절할 수 있고, 불편한 감정을 그 자리에서 표현할 수 있었다면.
그런데 재밌는 건, 그 솔직함이 다르게 변형되어 허영심이나 보여주기식으로 드러나게 됐을 때 돌아오는 후회들이다. 굳이 그렇게까지 포장할 필요는 없었는데 하는 뒤늦은 후회. 그럴 때면 차라리 솔직한 게 나았나, 아니면 적당히 포장하는 게 나았나 혼란스러워진다.
인스타그램이나 스레드를 보다 보면, "굳이 저 말까진 안 해도 될 것 같은데"라는 생각이 드는 게시물들을 종종, 아니 자주 마주한다. 지나치게 솔직한 자기 감정의 토로나, 누군가를 향한 직접적인 비난, 혹은 과도하게 사적인 이야기들. 안물안궁. TMI. 그런 걸 보며 나는 다시 묻게 된다. 솔직하다는 것은 무엇이고, 우리가 그렇게 선망하는 '진실되다'는 것과 어떤 관계가 있는 걸까?
버지니아 울프는 "우리 내면의 영혼은 외부의 삶과 결코 일치하지 않는다. 만약 우리가 용기를 내어 영혼에게 무엇을 생각하는지 묻는다면, 영혼은 항상 다른 사람들이 말하는 것과 정반대되는 것을 말하고 있다"고 썼다.진실을 말하기 위해서는 먼저 자신의 내면 깊숙한 곳에 귀 기울이는 용기가 필요하다는 것이다. 그런데 우리는 얼마나 자주 우리 영혼의, 내면의 목소리에 귀 기울이고 있을까? 관습과 기대, 눈치와 체면 사이에서 진짜 내 목소리는 어디쯤 묻혀 있을까?
하지만 그렇다고 모든 진실이 말해져야 하는 건 절대 아니다. 우리는 일상에서 수많은 '착한 거짓말'을 한다. <굿 닥터>의 머피에게 다른 의사들이 권하는 그런 거짓말. "괜찮아", "별로 안 힘들어", "네가 좋으면 나도 좋아". "이거 잘 어울려" 뭐 이런 말들은 거짓일까, 배려일까? 아니면 울프가 말한 것처럼, 내 영혼의 목소리를 외면하는 또 다른 방식일까?
솔직함과 진실함 사이 어딘가에는 분명 우리가 찾아야 할 균형점이 있는 것 같다. 솔직함이 모든 걸 다 말하는 것이라면, 진실함은 말해야 할 것과 말하지 말아야 할 것을 구분하는 지혜를 포함하는 게 아닐까. 누군가에게 상처가 될 말을 하지 않는 것이 거짓말은 아니다. 때로는 침묵도 진실의 한 형태다.
결국 솔직함이 폭력이 되는 순간은, 그것이 상대방에 대한 고려 없이 나의 감정과 생각을 무차별적으로 쏟아낼 때다. "나는 원래 솔직한 사람이라서"라는 말 뒤에 숨어, 상대에게 줄 상처를 면죄부처럼 정당화할 때다. 진짜 용기는 진실을 말하는 데 있는 게 아니라, 언제 말하고 언제 말하지 말아야 할지를 아는 데 있는지도 모른다.
나는 여전히 소심하고, 뒤에서 서운함을 토하는 사람이다. 하지만 이제는 조금 다르게 생각한다. 내가 배려심이 많은 것인지, 용기가 없는 것인지는 모르겠지만, 적어도 내가 하는 침묵이 누군가를 지키기 위한 것이라면 그것도 나쁘지 않다고.
인간이기에 가질 수 있는 다양한 감정들, 솔직함과 배려 사이에서 흔들리는 마음, 진실을 향한 갈망과 상처받고 싶지 않은 욕망 사이에서 우리는 매일 줄타기를 한다. 정답은 없지만, 그 줄 위에서 균형을 잡으려 애쓰는 것, 그것이 어쩌면 가장 진실된 태도가 아닐까.