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You can make anything
by writing

C.S.Lewis

by 이핀 Sep 05. 2020

#1. 인정과 칭찬, 그 뫼비우스의 띠

"못 하는 사람이 되어본 적 있나요?"

 처음이라는 것에서 오는 낭만과 기대, 그리고 나의 스무 살. 모든 것이 새롭게만 느껴지던 그때, 나는 자취 생활을 시작했다. 자취 생활이라고 하면 가장 큰 메리트는 '혼자만의 시간', 즉, '자유로움' 아니겠는가. 그 혼자만의 시간을 나는 과거부터 현재까지 스스로를 돌아보는 계기로 삼았다. 그리고 지금부터 이야기할 내가 늘 가져왔던 고민, 그 ‘인정받음’이라는 요소에 대한 고민을 이야기하기 위해 어릴 적 순간을 떠올려본다.


 어렸을 때부터 외동으로 지냈던 탓인지 좋은 말을 많이 듣고, 사랑을 받으며 자라왔다. 그래서인지 누군가에게 혼나거나 나쁜 소리를 듣는 것에 익숙하지 않았다. 스스로 나는 ‘모두에게 사랑받아왔어!’라고 인정할 수 있는 사람이 많지는 않겠지만, 적어도 솔직한 심정으로는 유년시절의 나는 많은 사람들에게 ‘사랑받는 존재’로 살아왔다고 본다. 그렇게 칭찬을 받던 당사자인 나는 누군가가 믿어준다는 그 마음을 저버리지 않기 위해 “아, 나는 이것도 할 줄 알아야 하고, 저것도 다 할 줄 알아야 해!”라는 강박관념이 자연스럽게 생겼다. 오로지 그 칭찬을 받기 위해서 혹은 누군가의 인정을 받기 위해서 스스로를 압박하기 시작했다. 여기서 중요한 사실은 현실에서 그 누구도 나에게 무언가를 강요한 적이 없다는 것이다. 잘하지 못하더라도 칭찬과 위로를 건네줄 사람들이 옆에 있었다. 하지만 승부욕도 강하고, 감정적인 나는 ‘못 하는 사람’이 되는 게 싫었다. 초등학교 체육대회에서 달리기를 할 때도 2등인 게 싫어서 혼자 분에 겨워 씩씩대고, 시험 성적이 떨어졌을 때는 혼자 탈의실에서 울고 나온 적도 많았다. 즉, 오랜 기간 동안 완벽주의를 지니고 있었고 자기만족이 되지 않는 사람이었던 것이다. 과거의 이러한 행동들이 결국 완벽을 원하는 나의 강박이었음을 알게 된 건 다름 아닌 과거를 돌아보던 스무 살의 나였다.  


 처음으로 내가 ‘못 하는 사람’이 되어봤다. 중학교 2학년 때 친한 친구를 따라 학교 오케스트라에 들어갔다. 고작 할 줄 아는 건 초등학교 6학년 때 방과 후 특기적성으로 배운 첼로를 음계 정도 켜는 것이었는데, 난 음악 선생님께 “저 첼로 할 줄 알아요!”라고 당당하게 말했다. 그리고 들어가서 기초 테스트를 했는데 이게 웬걸, 하나도 모르겠더라. 그래서 그 자리에서 울어버렸다. 아무것도 못하는 내가 너무 한심해서. 선생님께서는 괜찮다고, 오케스트라 들어와서 같이 잘해보자고 말씀하셨다. 그래서 활 잡는 법부터 다시 처음부터 배우고, 심지어는 아는 분께 부탁해서 첼로 개인 레슨도 받으러 다녔다. 근데 나의 자존심에 스크래치를 낸 사건은 머지않아 일어났다. 선생님은 첫 테스트 때에 음 하나 못 켜고 울었던 내 이미지가 컸는지, 단체 연습을 할 때 나를 제외하고 진행했다. 다들 무대에 올라가서 지정된 곡을 연습하는데 그 무대 아래에서 음계만 또 열심히 연습했다. 그때의 기분을 되살려보자면, 정말 내가 한심하고 보잘것없는 사람 같았다. 아무래도 이전까지는 무엇을 할 때마다 완벽주의 성향 때문에 항상 잘하고자 노력했고, 또 그에 상응하는 결과를 받았다. 그러나 이 일을 겪으며 처음으로 스스로 자존감이 많이 낮아졌고, 결국 나의 욕심으로 시작된 일이 내게 남긴 것은 다른 단원들보다 실력이 부족하기에 그걸 따라잡고자 부단히 노력했던 모습뿐이었다.


 두 번째 순간은 – 어떻게 보면 학생이라는 신분에서는 가장 힘들지도 모르는 – 공부를 ‘못 하는 사람’이 된 일이었다. 그때는 국제고등학교를 갓 입학한 17살이었다. 입학을 하고 신입생 친구들을 처음 만났는데 영어를 네이티브처럼 하는 친구도 있고 똑똑한 사람들만 모인 것이었다. 첫 시험을 치고 난 후 받았던 성적에서 내가 중간 정도에 있었다. 중간이라는 그 애매한 위치가 주는 상실감은 생각보다 컸다. 항상 누군가보다 앞서가야 하는 강박 속에 살아온, 그리고 성취주의에 휩싸인 나로서는 큰 위기의 순간이었다. 나보다 더 잘하는 친구들이나 선배들을 보며 괜히 자격지심이 느껴지고 심지어는 열등감도 들었다. 자존감은 점점 바닥을 치고, 이때까지의 나는 내 바운더리 안에서만 ‘잘해 온 사람’이었다는 걸 절실히 느꼈다. 이걸 느낀 이후로 무엇이든 자신감을 지니고 할 수가 없었다. 누구나 알듯이 시험 준비를 할 때 가장 중요한 것은 내가 해낼 수 있다는 자신감인데, 나는 도리어 주변에 잘하는 친구들도 많을뿐더러 그에 비해 내가 공부한 양은 부족하다는 생각에 휩싸여 이번 시험을 잘 칠 수 있다는 생각조차 하지 않았다. 이렇게 고등학교에 입학하고 또다시 무언가 '못 하는 사람'이 되었고, 내가 모든 사람에게 인정받을 수는 없다는 걸, 나는 노력했지만 때때로는 그만큼의 성과가 나올 수 없다는 걸 깨달았다. 


 그리고 대학에 입학하고 난 지 1년이 지난 지금의 나는 여전히 무엇이든 잘하는 사람이 되고 싶어서 노력하고 있다. 성취주의 구조의 사회에서 학점과 대외활동 등 무언가를 해내야만 한다는 생각에서 살아오고 있다. 아마 현재 많은 20대들이 느끼는 감정과 유사하지 않을까. 스펙을 쌓기 위해 조급 해지는 마음과, 그에 비해 현저히 적은 기회. 고등학교 때까지 이상적으로 꿈을 찾던 시절과는 달리 현실을 바라보는 지금은 어떻게 하면 빠른 시일 내에 직업을 가질 수 있는지에 집중하고 있다. 마치 꿈을 잃어버린 듯하다. 그러한 상황 속에서 조금이라도 학점이 낮게 나오면 우울해지고, 무언가를 해야 된다는 생각 때문에 또 다른 스펙을 쌓고자 한다. 대외활동을 하면서 학업을 병행하는 것은 쉽지 않았다. 시험기간에 공부를 하다가도 대외활동 팀에서의 회의를 하고, 또 돌아오면 과제나 공부를 하고 있었다. 이 때문에 체력적으로도 한계가 생겼지만 나는 하나가 마무리되었을 때 또다시 새로운 것을 찾기 때문에 쉬는 순간 없이 달려오게 되었다. 여전히 그 누구도 나에게 이런 모습을 강요하지 않는데도 불구하고, 가만히 두지 않고 스스로를 압박하면서 사는 것이 습관처럼 되어버렸다. 어쩌면 이러한 나의 모습이 나를 위한 것이 아니라, 또다시 누군가가 나의 모습을 보면 나를 칭찬해주겠지, 인정해주겠지 라는 생각 때문에 비롯되었다. 과연 더 열심히 살아가기 위해 무언가를 하려고 하는 게 나를 위한 행동인지에 대한 의문이 생겼다. 


 누군가에게 칭찬을 받기 위해 생긴 스스로에 대한 강박과 완벽주의 성향으로 인해 나는 무수한 노력을 해왔다. 인정받고자, 사랑받고자 해왔던 그 노력의 순간들은 나에게 긍정적 영향만을 주지 않았다. 모순되게도 나의 노력들은 한순간에 내면의 자아를 갉아먹는 존재가 되기도 하고, 내 정신적 틀을 붕괴해버리는 존재가 되어있기도 했다. 나의 행동이 과연 나를 위한 것이 맞긴 했을까? 적어도 ‘인정받음’에서 오는 성취감에 행복했던 나는 존재했다. 하지만 ‘인정받기 위한’ 과정에서 진정으로 내가 행복한 행위를 취했다고 말할 수 있는가. 언제부터인가 타인에게 인정받아야 행복감을 느낄 수 있게 되어버린 나를 보며, 스스로를 잃어버린 채 타인의 틀에 나를 맞추어가는 게 아닐까라는 생각을 해본다. 칭찬과 인정이라는 그 긍정적인 단어가 결코 나에게는 긍정적이지 않았다. 도리어 나의 삶에 부정적 물결을 일으키는 일들이 생겨났다. 그 이유가 무엇이냐고 묻는다면 '스스로 자신에 대한 칭찬과 인정은 하지 않으면서, 결국 그 빈자리를 타인에게서 채우고자 한 나의 잘못된 마음'이라고 답할 것이다. 나는 이제야 그 소수의 부정적인 기억을 아우르고 있는 것이 칭찬과 인정받음에 대한 욕구였다는 사실을 받아들인다. 



작가의 이전글 #0. 칭찬의 모순점
작품 선택
키워드 선택 0 / 3 0
댓글여부
afliean
브런치는 최신 브라우저에 최적화 되어있습니다. IE chrome safari