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나는 특별한 존재다’라는 생각과 ‘나는 먼지나 재 같은 존재다’라는 생각을 왔다 갔다 하는 것이 인생인 것 같아.” 선배와의 통화에서 선배가 한 말이다.
다음 주 수술을 앞두고 서점을 어슬렁거렸다. 신간이 놓인 매대에서 “내가 특별한 존재라는 생각을 내려놓고, 삶이 별것 아닌 줄 알면 지금 이대로 삶이 위대해집니다”라는 문구를 발견했다. 피식 웃었다. ‘내가 특별한 존재가 아니고, 삶이 별것 아니‘라는 것을 뼈저리게 느끼고 있는 나날들이기 때문이다.
지금까지 항암치료를 견뎌오면서, 먼 미래를 생각하지 않고 하루하루를 사는 데 집중했다. 항암치료만으로도 충분히 벅찼기 때문에 수술에 대해선 닥치면 생각하기로 했고, 모든 치료가 끝난 뒤에 어떤 라이프스타일로 살 것인가에 대한 생각도 미뤄두었다. 하지만 그 어렵다는 항암산을 오르고 나서 또 하나의 관문인 수술이 다가오자 이 역시도 쉽지 않은 산이라는 것이 느껴진다. 이럴 때 먼 미래에 대한 생각, 그러니까 ‘치료와 쉼의 시간을 마치고 나면 40대 후반인데 나는 과연 사회로 돌아갈 수 있을까, 이제 내가 원하는 조건의 직업은 얻기 어려울 텐데’까지 생각하면 참 내 인생이 난감해 보이지 않을 수 없다. 항암치료 때에도 별로 흘리지 않았던 눈물이, 수술을 앞두고 목구멍까지 차올랐다. 어쩌면 인생은 이토록 다사다난하고 불안정할까. 사는 게 정말 이게 다인 걸까.
이런 생각을 할 무렵 선배에게서 전화가 왔고, 선배는 나에게 “그런 식으로 생각이 흘러가는 건 지금 상황에서 당연하다”고 위로해주었다. 언제나 정직하고 솔직하게, 지혜롭게 이야기를 나눠주는 선배는 그러면서 “지금은 ‘내가 먼지나 재와 같은 존재’라고 생각할 때인 거지”라고 말해주었다. 나는 본격적 노화의 시작이라 느끼게 되는 40대 중반에 암이라는 장기적인 관리를 요하는 병에 걸려, 선배 말대로 노화라서 그런지 암 때문이어서 그런지 모를 애매모호한 증상들을 겪어오고 있었다. 암과 나이, 이 두 가지 모두 나에게 큰 압박감으로 다가온다. 그러니 ‘내가 먼지나 재’라는 존재라는 것이 더욱 와 닿는다.
‘아무것도 아닌 존재’, ‘먼지나 재와 같은 존재’라고 스스로를 인식하는 것은 마음을 매우 가볍게 해주기도 한다. 나를 비롯해, 얼마나 많은 사람들이 자기 자신에 대한 판타지나 이상 때문에 버거워 자신의 현실과 이상 사이의 간극에서 허덕이다가 우울증에 빠지거나 현실을 도피하고자 하는지. 나라는 사람은 고유하되, 그렇게 특별해야만 하는 것도, 뛰어나야만 하는 것도 아니라고 인식하면 현실을 있는 그대로 받아들이는 데 도움이 된다. 그럼에도 나는 사랑받는 존재이고, 인간으로서 존엄한 존재임을 안다면 나는 좀더 자유로운 인간이 된다.
나의 이 모든 경험들이 나 자신과 타인에게 유익이 되길 바라는 마음을 되찾고는 서점에서 돌아왔다. 울적할 때는 ‘내 인생은 무엇인가’라는 너무 근원적이고 큰 질문으로까지 내려가지 않고, 나 자신에게 좋은 질문을 던지고, 햇살 속에서 걷고, 적정 가격 내에서 내가 좋아하는 것을 사고(너무 비싼 것을 사면 충동구매로 나중에 후회할 테니까), 친구들에게 전화를 걸고, 단기간 내로 이룰 수 있는 작은 꿈들을 버킷 리스트에 넣어두기로 했다. 오늘 이런 것들을 하고 나니 다음 주 중요한 수술을 거뜬히 잘 이겨낼 수 있으리란 희망이 든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