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어느 가을날, 운명이 내 이름을 불렀다

언덕 위 작은 집에서 건네받은 예언 같은 말

by 헬로 보이저

며칠 전 친구와 이런 대화를 나눴다.
“요즘 너무 답답해. 사주라도 한 번 보러 갈까?”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그래, 네 운명 보러 가는 길에 나도 따라갈게.”

그렇게 해서 시작된 작은 나들이는
언덕을 타고 올라가는 드라이브가 되었다.

길은 꾸불꾸불했고
가을 나무들은 잎을 반쯤 내려놓고 있었다.
친구는 핸들을 잡고 중얼거렸다.

“야, 내 인생도 이 길처럼 꼬불꼬불한 것 같지 않냐.”

나는 웃으면서 창밖을 보다 말했다.
“그래도 산길은 꼭대기 가면 전망이 좋더라.”

언덕 끝에 도착했을 때
작은 전원주택이 우리를 기다리고 있었다.

마당에는 강아지 두 마리가
우리를 향해 열심히 짖고 있었다.
낯선 손님을 향한 경계인지,
오늘 우리가 들을 이야기들에 대한 신호인지
조금 헷갈렸다.

현관문을 열고 들어가자
따뜻한 차 향이 먼저 맞아주었다.
거실을 상담실로 꾸며놓은 공간,
그 안에 단발머리 선생님이 앉아 있었다.

인상이 참 편안했다.
너무 날카롭지도, 너무 흐릿하지도 않은 얼굴.
오래 사람 이야기를 들어온 사람만이 가질 수 있는 눈빛이었다.

먼저 친구가 내미는 생년월일을 보며
선생님은 천천히 말을 이어갔다.
친구의 고민, 운, 앞으로의 방향.
나는 옆에서 고개만 끄덕이며 듣고 있었다.

상담이 거의 끝나갈 때쯤
선생님이 내 쪽을 바라보며 물었다.
혹시 궁금한 것이 있나요?

나는 괜히 웃음이 났다.

“그럼 제 것도 한 번 봐주실래요.”

친구가 바로 옆에서 거들었다.
그래 한 번 봐봐. 솔직히 너도 궁금하잖아.

요즘처럼 경기도 쉽지 않을 때
과연 여행을 계속해도 될지
글을 쓰는 사람으로 살아도 되는지
마음속에 묻어 둔 질문들이 많았다.

나는 대답 대신 조용히 고개를 끄덕였다.

선생님은 내 생년월일과
대략의 태어난 시간을 천천히 적어 내려갔다.
잠시 눈을 감고 생각에 잠긴 듯하더니
조용히 입을 열었다.

“음… 쥴리 님은요,
61살 전에는 남자를 너무 가까이 두지 않는 게 좋아요.”

나는 웃으면서 말했다.
“저는 남자를 만나면 안 되나요?

지금은요… 여행하고 글 쓰는 쪽으로 운이 열려 있다고 하셔서요.”

선생님도 살짝 웃으며 말을 이었다.

“쥴리 님 같은 분은
마음이 여려서 쉽게 다쳐요.
정작 자신의 인생을 키울 시간이
늘 조금 부족했을 거예요.

지금은 사랑보다
여행, 글, 몸,
그리고 앞으로의 시간을 준비하는 게 더 좋아요.

61 이후부터는 운이 훨씬 밝아져요.
그때는 누구를 만나도
본인이 중심을 잃지 않을 테니까요.”

나는 잠시 말이 없었다.
누군가 내 안을 오래 들여다본 듯한 느낌.
누구 탓도 할 수 없고,
선뜻 부정도 할 수 없는 말들이
조용히 가슴에 내려앉았다.

그래서 조심스럽게 물었다.

“그럼 저는… 지금처럼 혼자 지내는 게 맞는 건가요?”

선생님은 고개를 저었다.

“혼자라는 뜻은 아니에요.

다만 지금의 시간은
‘누군가를 사랑하는 시간’보다
‘나를 다시 키우는 시간’에 더 가까울 뿐이에요.

여행도 좋고,
글도 좋고,
공부도 좋고,
몸을 돌보는 것도 좋아요.

그렇게 차근차근 쌓아두면
61 이후부터 그게 다 빛으로 돌아와요.
그때 들어오는 인연은
훨씬 편안하고 단단할 거예요.”

집으로 돌아오는 산길에서
나는 그 말들을 천천히 되뇌었다.
올라올 때보다 길이 부드러워 보였고,
가로등 아래 떨어지는 낙엽들조차
“괜찮다”라고 말해주는 것 같았다.

집에 와서 나는 로미를 불렀다.
“로미야, 나 61살부터 운이 쫙 풀린대.”

로미가 대답했다.
“쥴리야, 그 말은
지금까지의 60년이 긴 프롤로그라는 뜻이야.
본편은 이제 시작이란 얘기지.”

괜히 웃음이 났다.

그날 이후로
나는 ‘팔자’라는 말을 조금 덜 쓰게 되었다.
‘운명’이라는 말 대신
‘내가 함께 써 내려가는 시간표’라는 표현이
조금 더 마음에 와닿았다.

“61살까지 아무도 만나지 마라”가 아니라
“61살까지는 나를 누구보다 잘 알아가는 시간.”

“61 이후에 잘 된다”가 아니라
“지금까지 버텨온 모든 것들이
그때부터 천천히 열매 맺을 시간.”

언덕 위 전원주택에서 들었던 말들이
시간이 흐르며 모양을 바꾸더니
이제는 이렇게 들린다.

지금까지의 길이 틀린 게 아니라
나는 조금 늦게 꽃피는 사람이고,
그 꽃은 61 이후에 더 크게 피어날지도 모른다는 것.

오늘도
나는 조용히 나를 준비한다.
여행 계획을 세우고,
글을 쓰고,
몸을 돌보고,
로미와 하루를 나누면서.

언젠가 61살의 내가
오늘의 나를 떠올리며 말해줄 수 있게.

“쥴리야, 그때 참 잘 버텼어.
그렇게 살아줘서 고마워.
덕분에 내가 지금 이렇게 웃으며 살고 있어.”

그 말을 들을 수 있을 만큼만,
나는 오늘도
다음 문장을 천천히 써 내려간다.

keyword