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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Jun 29. 2021

중국 북방식 훠궈로의 초대

중국음식 중국사람 (1)

훠궈는 나에게 줄곧 ‘중국식 샤부샤부’였다.


그 당시 대학가에 하나쯤은 있었던 트렌디한 샤부샤부 집, 고기와 야채를 데쳐서 간장 소스나 칠리소스에 찍어 먹고 남은 국물에는 밥을 볶아먹는 그런 곳. 매콤한 육수에 소고기와 쑥갓, 느타리버섯을 듬뿍 넣어 데쳐 먹고 밥을 볶아먹는 샤부샤부 집은 그 당시 나의 단골집이었다. 중국에는 조금도 관심 없었고 중국 음식에 대해서도 물론 무지했었던 그때, 나중에 중국에서 오래 살게 될 줄은 꿈에도 모른 채, 중국집에서 짜장면을 먹으며 누군가와 이런 대화를 나누곤 했었다.

‘근데, 짜장면이 중국에서 온 음식이 아니래, 중국 짜장면은 완전 다른 거래~’

‘아 그럼 중국에 가서 짜장면 주문하면 이렇게 안 나와?’

‘그렇지~’

‘아 진짜?’


그랬던 내가 한국에서 처음 샤부샤부가 아닌 훠궈를 접하게 된 건 남편 때문이었다. 남편은 대학시절 교환학생으로 중국 하얼빈에 1년 동안 있었다. 유학생 시절 자주 먹었던 훠궈 맛이 생각난다며 나를 정통 중국식 훠궈 집에 몇 번 데려갔었다. 그렇게 맛 본 인생 첫 훠궈는 홍대에서였다. 홍대 입구역에서 내려 대학가로 향하는 길목 바로 앞에 위치해 있던 명당자리. 중국에도 있었던 훠궈 음식점 체인이었고 맛은 잘 기억나지 않는다. 간판에는 귀여운 양 캐릭터가 그려져 있었는데, 그저 이렇게 귀여운 양의 얼굴을 보며 과연 양고기를 먹을 수 있는가에 대해서 한참을 이야기했던 기억이 난다. 두 번째 갔던 곳은 대림에 있는 훠궈 집이었다. 중국인이 운영하는 가게였고 그 당시에 정통 중국식 훠궈 식당은 고급 중국 식당을 제외하곤 이런 특정 지역에서만 맛볼 수 있었다. 남편은 바로 ‘이 맛이야!’를 외쳤지만 나는 너무 강한 마라 맛에 쩔쩔매며 궁여지책으로 하얀 국물만 휘휘 저었다. 그리고는 남편은 나에게 다시는 훠궈를 먹으러 가자는 말을 하지 않았다.  


그 후, 우리는 8년째 중국에 살고 있다.

가장 좋아하는 중국 음식은 두 말할 것 없이 훠궈다.



[훠궈 火锅]

중국 훠궈 전문점 하이디라오 / 바이두
끓는 육수에 육류, 해산물 또는 채소나 버섯류 등을 기호에 따라 즉석에서 담가 익혀 먹는 중국요리이다.

육수는 크게 매운 향신료가 전혀 들어가지 않은 담백한 맛의 뽀얀 색을 띠는 ‘칭탕(清汤)’과 맵고 얼얼한 향신료가 들어간 ‘홍탕(红汤)’ 또는 ‘마라탕(麻辣汤)’으로 나뉜다. 칭탕은 주로 닭고기, 돼지머리, 오리고기 등을 오랜 시간 푹 고와서 만들고, 홍탕은 칭탕을 만든 베이스에 고추, 화자오(花椒) 등의 맵고 얼얼한 맛을 내는 향신료를 추가해서 만든다. 두 가지 맛을 모두 즐기고 싶을 때는 커다란 냄비에 두 가지 육수를 나눠 담을 수 있는 ‘위엔양탕(鸳鸯汤)’을 선택할 수도 있다.

이제는 굳이 요리에 대한 정의를 덧붙이지 않아도 될 정도로 ‘훠궈’는 한국에서도 대중적인 음식이 되었다. 지금은 홍대, 대림에서 뿐 아니라 어디에서나 쉽게 훠궈나 마라탕 음식점을 접할 수 있다. 8년 전 처음 중국 상해에서 훠궈를 먹어봤을 땐 칭탕과 마라탕 두 종류만 있는 줄 알았는데, 탕의 종류도 꽤나 다양하다. 훠궈 전문점 하이디라오에서 출시한 인스턴트 제품 맛은 아홉 종류나 되고 지역 특색에 따라서도 다양한 탕이 존재한다. 개인적으로는 버섯탕, 마라탕 그리고 토마토탕을 즐겨 먹는다. 처음엔 뜨거운 토마토 국물이라는 것이 낯설었지만 지금은 토마토탕 덕분에 아이들과 함께 훠궈를 즐길 수 있게 되었다.


그렇게 중국에 살았던 8년간 토마토탕 훠궈를 먹게 되었고, 함께 곁들여 먹는 음료인 酸梅汤 (솬메이탕 : 시고 달콤한 매실 맛의 짙은 까만색 음료)을 즐겨 먹게 되면서 어느 순간 나는 ‘중국음식을 잘 먹는다’라는 착각을 하기 시작했다. 비슷한 탕을 고르고, 항상 먹던 소고기와 비슷한 야채들을 골라 넣으면서 말이다. 언제나 먹을 수 있는 음식, 먹을 수 없는 음식에 선을 그었으며 시장에 널린 낯선 식재료들은 한 번도 장바구니에 담긴 적이 없음에도 불구하고. 나는 그렇게 똑같은 훠궈를 똑같이 먹어본 횟수 만으로 경험과 이해를 부풀리곤 했다.


그랬던 어느 날이었다.  



우리를 초대한 건 남편 회사 중국 직원 가족이었다. 남편에게 哥 (형)이라는 호칭을 성에 붙여서 부르기 시작했다는 얘기는 들었었는데, 가족과의 식사 모임은 정말로 의외였다. 중국에 사는 동안 현지 중국인들과의 교류가 없었던 것은 아니지만, 이렇게 ‘리얼’ 중국인 가족들에게 개인적인 교류 목적의 초대를 받은 건 처음 있는 일이었다. 조선족 친구, 외국인과 결혼한 중국인 등 ‘외국인’인 우리와 최소한의 교집합을 가지고 있는 중국인 친구들과는 달랐다.


어디서 보기로 했어? 남편에게 물었다.

응, 집에서 멀지 않은 훠궈 집. 맛집이래~

어? 한 번도 안 가본 데네? 그런 곳이 있었어?

응 우리가 외국인이니까 아무래도 훠궈 먹는 게 낫겠다고 생각한 것 같아.


중국어도 잘 못하는데 괜히 어색한 자리가 되는 것 아닐까 걱정이 되었지만 맛집에서 훠궈를 먹는다는 생각에 기대가 되었다. 그리고, 약속한 날 식당에 들어서자마자 내 기대는 곧 갈 곳 잃은 어리둥절함이 되었다. 식당 입구에는 양 떼가 푸른 초원을 뛰어다니는 사진 몇 점이 걸려있었으며, 발걸음을 안으로 조금 옮기자 뿌연 증기가 곧 시야를 가렸다. 커다랗고 둥근 대형 테이블이 적절히 배치되어 있었고 우리는 그 사이로 이리저리 휘어진 길을 따라 방으로 안내를 받았다. 왁자지껄한 소리는 그대로였지만 뿌연 증기는 어느새 사라져 있었고 환해진 시야 사이로 훠궈를 끓여 먹는 커다란 구의 알록달록한 색감이 들어왔다. 언젠가 이곳 박물관에서 봤던 도자기의 그것. 그건 하이디라오의 깔끔하고 고급스러운 느낌도, 대중적인 빨간색과 흰색의 인테리어도, 어둑하고 고급스러운 느낌의 훠궈 집과도 거리가 멀었다. 말하자면, 정통 북방식 훠궈 요리 전문점이었던 것이다.


어리둥절해 있는 사이, 만나기로 약속했던 그들 가족도 식당에 도착했다. 첫눈에 빨간색으로 맞춰 입은 커플 상의가 강렬하게 눈에 들어왔다. 나이키 로고가 크게 박힌 빨간색의 맨투맨 셔츠였다. 한눈에도 그들의 까무잡잡한 밝은 미소와 무척 잘 어울렸을뿐더러, 8살짜리 딸아이와 함께 맞춰 입은 모습이 참 행복하고 단란해 보였기에 ‘나라면 절대 저런 가족 커플티를 입지 않겠어’라는 첫 느낌은 곧 무장해제되어 버렸다. ‘고룡’ (가오롱), 남편에게 많이 들었던 이름이었다. 짙게 쌍꺼풀진 큰 눈이 서글서글했지만 가끔 고개를 숙여 눈을 치켜뜨는 바람에 그에게는 순한 양과 야생동물의 느낌이 공존해 있었다. 그 부인은 ‘양루’. 나이를 가늠하기 어려운 앳됨과 가느다란 주름이 그녀 얼굴에 함께 자리하고 있었다. 눈은 작고 가느다랐지만 얼굴도 작아서 이목구비의 조화가 낯설지 않게 예뻤다. 입이 조금 튀어나온 건 아무런 흠이 되지 않았다. 중국 북방 토박이라더니, 확실히 생김새부터 그랬다. ‘오래전 이 땅에 살았던 사람들도 이런 얼굴이었겠지’라는 상상 아니 확신이 드는 찰나, 문득 공간이 시간을 이동시킨듯한 기분이 들었다. 얼마 전 선양에 있는 청나라 고궁에 다녀왔던 탓일까.


만리장성을 분계선 삼아 예로부터 중국 대륙 북쪽은 유목민족, 남쪽은 농경민족이 지배해 왔다고 알려진다. 유목민족이 세운 나라들로는 만주족의 청나라와 몽골족이 세운 원나라가 대표적이다. 그리고 지금 내가 살고 있는 이곳 선양은 바로 그 청나라의 옛 수도였다. 1625년 청나라 태조 누르하치가 세운 첫 번째 수도. 청나라 초기 황실 궁궐인 선양 고궁은 누르하치와 2대 황제 태종 홍타이지에 의해 건립되었다. 궁궐은 자금성과 비할 규모는 아니지만 금색 지붕, 빨간 벽으로 그 화려함과 맥락을 같이 한다. 궁궐 내부에서 썼던 장식품들과 도자기 문양은 그야말로 화려함의 극치다. 하지만 궁궐 내부를 들여다보면 그 화려함과는 반대로 자유롭고도 간결했던 만주족의 특징이 고스란히 드러난다. 소박한 침대와 음식을 하는 커다란 솥이 한 공간 안에 자리 잡고 있는 것을 보며 이게 정말 황제의 거처 맞아?라고 되물었던 기억이 난다. 북경의 자금성을 먼저 접해서였을까, 선양 고궁 역시 분명 중국인데 내가 아는 중국이 아닌 것 같은 느낌을 받았다. 산이 없는 드넓은 초원에서 말을 타고 뛰어다니던 오랑캐의 기개가 건축물에서도 고스란히 느껴지는 듯했다. 내부에 나무 한 그루 없는 자금성은 금빛과 붉은색이 자로 잰 듯 뚝뚝 떨어지는 것만 같았는데, 선양 고궁은 어딘지 모르게 인간미가 철철 넘쳐흘렀다. 오랑캐 청타이지가 몽골과 조선을 굴복시키고 중국 대륙의 주인이 될 수 있었던 원천이 바로 여기에 있었구나!

<역사 속 훠궈 이야기>
중국에서 사람들이 본격적으로 훠궈를 먹기 시작한 시기는 전국시대로 알려져 있는데, 이때는 도자기 그릇에 훠궈를 먹었다고 전해지며, 송나라 때 들어서는 훠궈가 더욱 보편화되었다. 이어 남송 시기 요리책인 《산가청공(山家清供)》의 기록에 따르면 이때에도 훠궈를 먹었다는 소개가 나와있으며, 원나라 때는 훠궈가 몽고 지역까지 유행했다고 한다. 청나라 때는 일반 대중을 넘어 황실에서 까지도 사랑받는 요리였다고 전해진다.  (출처 : 두산백과)


유목민족이었던 그들에게는 양고기가 중요한 식량이었을 것이고 육수를 끓여 얇게 썬 양고기를 데쳐 먹었던 것이 곧 북방 지역의 훠궈였을 것이다. 그렇게 지난 역사를 통해 본 훠궈는 색다르게 다가왔다. 메뉴에서 소고기를 선택할 수는 있었지만 그보다는 양고기가 주였으며, 동그란 탑같이 생긴 금색 구는 허연 국물의 칭탕으로만 채워져 있었다. 우리가 흔히 보는 두 가지 맛의 위엔양탕(칭탕, 마라탕)이 아니었고 심지어 메뉴에서도 마라탕은 찾을 수가 없었다. 마라 국물로 훠궈를 접해왔던 나에게 마라탕이 없는 훠궈 음식점이란 신선한 충격이었다. 곧이어 북방 또는 몽골식 훠궈는 칭탕으로 먹어야 제대로 먹는 거라는 설명을 들을 수 있었다. 그 외 곁들여 데쳐먹는 야채들은 우리에게도 익숙한 것들이었지만, 그중 한 가지 눈에 띄는 재료가 있었으니, 바로 북방식 절인 배추 ‘솬차이’였다. 솬차이를 듬뿍, 가득 찰 정도로 아주 듬뿍 넣어서 데친 다음 마장에 찍어먹는다. 따로 먹어봤을 땐 밋밋하게 시큼한 맛이 별로였는데 양고기와 같이 먹으니 궁합이 좋았다.

주문한 재료가 다 나오기 전 사진, 그 다음은 먹느라 사진이 없다;;


그렇게 하나의 국물에 각자 원하는 재료를 담가 먹는 사이 여러 재료들의 풍미가 스며들어 국물 맛은 점점 진해졌으며, 뜨거운 증기 사이 오가는 입김으로 공기의 밀도 또한 더욱 짙어졌다. 오가는 술 한 잔 또 그리고 한잔, 어느새 그들이 나를 부르는 호칭은 ‘사오즈’(嫂子,형수)가 되어 있었다. 아이들 셋은 말해 무엇하랴. 제 자리에 가만히 앉아 호기심 어린 눈으로 잠깐 동안 테이블 위를 살피더니 이내 방울토마토 굴러가는 것만 봐도 서로 깔깔거리며 웃었다.


훠궈 그 자체가 바로 중국 문화다.
훠궈의 불은 ‘따뜻함’을 나타내고, 훠궈의 둥근 그릇은 ‘가족이 한 자리에 둥그렇게 모인 것’을 나타낸다. 훠궈는 뜨거운 국물로 원재료를 다루는데, 이는 부드러움이 강함을 이기는 것이다. 훠궈는 고기, 생선, 야채를 가리지 않을뿐더러 남북의 재료도 구분하지 않고, 동서의 맛도 가리지 않는다. 또한 산에서 나는 것, 바다에서 나는 것, 제철음식, 민물고기, 두부, 국수 등 모든 것을 재료로 쓸 수 있다. 훠궈는 고기와 야채를 한데 섞어 여러 가지 맛이 모두 나고 주재료와 양념이 잘 스며든 맛이 나는데 일종의 중화된 맛이다. 더 중요한 것은 훠궈가 한솥밥이라는 심오한 의미를 가장 잘 형상화하고 직관적으로 나타낸다는 것이다. 따라서 이는 분명 함께 먹는 것이라고 할 수 있다. 게다가 이렇게 함께 먹으면서도 절대로 어떠한 강제성도 띠지 않는다. 각자 모두 임의로 자기가 좋아하는 재료를 선택해서 끓여 먹을 수 있다. 이른바 일치된 의지도 있고 개인의 편안한 기분도 고려하는 생동적이고 활발한 모습이라고 할 수 있다. (이중톈, 중국인을 말하다 中)


그들은 우리가 외국인이라서, 한국사람이라서, 첫 초대 음식으로 그나마 무난한 훠궈를 선택한 것이 아니었다. 그렇다고 외국인인 우리가 먹기 힘든 종류의 낯선 중국 음식을 들이민 것도 아니었다. 동북 3성을 대표하는 선양 토박이로서 나고 자란 곳에 대한 뿌리가 담긴 음식이자, 달라도 많이 다른 우리들이 한데 섞일 수 있는 음식으로 정통 북방식 훠궈를 선택한 것이었다. 나는 내가 좋아하는 고기와 버섯, 야채를 담가 먹는 한편, 그들은 그들의 방식대로 천엽, 솬차이 등 좋아하는 재료를 골라 한솥에 담가 먹었다. 재료를 탕에 넣기 전에, 먹을 수 있는지 물어보는 배려 또한 인상 깊었다. 각자의 것을 존중하되, 하나가 될 수 있다는 의미를 담은 훠궈. 덕분에 나는 훠궈를 먹으며 짧은 시간 여행을 다녀온 듯한 귀한 경험을 할 수 있었다. 음식을 이해하는 것은 곧 문화와 역사를 이해하는 것이란 명제를 다시금 깨달으며..


나는 여전히 마라탕 국물에 소고기와 각종 야채를 넣어 먹는 훠궈가 좋다. 더 나아가 김치찌개만 있으면 밥 한 공기 뚝딱 하는 한국 사람이다. 하지만 훠궈라는 음식을 통해 각자의 것을 존중하고 다름을 인정하면서 하나가  수 있다는 사실을 알았. 백 마디 말보다 하나의 음식이다. 그날 양고기 훠궈에 대한 기억이 무척이나 유쾌했던 건 바로 이런 이유에서였을 것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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