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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Jul 18. 2021

큐브 무림 고수

중국 일상 이야기

고궁 옆 오래된 건물. 적색의 벽과 흑색 기와를 닮은 조잡한 벽에는 중국어와 영어가 같이 표기된 간판이 걸려있다. 네모 반듯한 타일 사이사이에는 녹슨 못이 튀어나와 있다. 차라리 매끈한 신식 건물이었으면 좋았을걸 하고 생각한다. 고궁 벽과 길 하나를 둔 거리에 선 적색 건물은 고궁을 닮았지만 고궁보다 더 오랜 시대의 고단함을 품고 있는 듯 보인다.


"니하오." 

"아까 연락 주신 분 맞죠?  쪽으로 오세요."

인사를 나눈 후 아저씨가 발걸음을 옮기려다 멈칫하며 묻는다. "그런데 어디 분이세요?"

 발음이 서툴렀으리라.

"저희 한국인이에요."

"에~? 아 하하하 한국인."

"한국인이 여기 온 건 처음인데."


건물 1층 구석진 곳, 옷가게들이 줄지어 자리 잡고 있는 사이 길 복도였다. 커브를 돌자 기다란 테이블 위 산처럼 쌓여있는 알록달록한 큐브들이 먼저 눈에 들어왔다. 약간은 왁자지껄한 것 같기도 하고 적막하기도 한 것 같은 희한한 분위기 속, 이제 막 솜털을 벗은 고만고만한 어린아이들이 까만 눈동자를 빛냈다. 찰칵찰칵 스르륵.


큐브 무림 고수들이 한 자리에 모였다.


네모진 큐브 하나가 아이 손에 날아온다. "한 번 해 볼래?"

아이는 손에 쥔 큐브를 만지작대다 제가 해온 방식대로 작은 손가락을 이리저리 돌린다. 몇몇의 시선은 아이 손에 고정되어 있다. 몇 번의 회전 끝에 모든 면이 같은 색으로 가지런히 맞춰진다. 아이는 씩 미소 지으며 마음 좋아 보이는 얼굴이 둥근 아저씨에게 작은 큐브를 건네고, 아저씨는 대충 고개를 끄덕이며 빈 종이에 작게 끄적인다. 큐브 공식이다.

그리고는 크고 검은손에 형형색색의 작은 큐브를 쥐고는 시범을 보인다. 한 두어 번 눈을 깜빡였을까. 가지런히 맞춰진 큐브가 어느새 아저씨의 손바닥 위에 올라 있다.


일제히 (우리만) 와아~

우리는 중국 고궁 옆 무림을 찾은 이방인들.

옆에서 밥을 시켜먹고 있던 한 아이의 엄마는 힐끗 넘겨볼 뿐 이내 먹는데 집중한다.


"큐브 맞추는 데는 여러 가지 공식이 있어. 네가 맞추는 건 조금 시간이 오래 걸려. 이제부터 정말 빠른 방법 몇 가지를 알려줄 거야. 하나씩 알려줄 테니 연습해봐." 아저씨는 이렇게 말하고는 똑같은 큐브 열댓 개씩을 똑같은 모양으로 섞어 아이 앞에 주욱 늘어놓는다. 시작! 어리둥절해하는 아이에게, 아저씨가 다시 한번 말한다. "여기 있는 큐브 다 맞추고 나서 나 불러."


아이가 큐브 열 개를 맞추는 동안 주변을 한 번 둘러본다. 각종 큐브 대회에서 상을 받은 아이들의 자랑스러운 얼굴이 큰 포스터로 인쇄되어 벽마다 걸려 있다. 찬찬히 훑어보는 나에게 아저씨가 한 마디 덧붙인다. "얘가 몇 년도에 바로 아시아에서 큐브 대회 1위 한 앤 데, 바로 내가 가르쳤지요."


어떤 여자아이는 머리를 질끈 땋아 묶고는 어깨를 딱 펴고 서서 큐브를 맞추기 시작한다. 아저씨가 어느새 또 와서 언질을 준다. "보세요." 1,2,3,4. 탁! 던지듯 큐브를 내려놓으며 시간 알람 버튼을 누른다.


그쯤 되니 나와 남편의 턱은 조금씩 한도 끝도 없이 내려와 닫힐 줄을 모른다. 유치원에서 큐브를 잠깐 배웠는데 아이가 좋아하고 잘하니 큐브 학원에 보내보는 게 어떻겠냐는 선생님 말씀에 찾아가 본 곳이었다.


이곳에서 큐브는 그냥 그런 취미가 아니었다. 자랑거리는 자랑거린데 그렇다고 자랑에 혈안이 되어 보이진 않았다. 아이들의 눈빛은 하나같이 빛났고 부모들의 얼굴은 싱글벙글했다. 테이블이 놓인 어두컴컴한 복도는 보이지 않는 열기로 가득했고 정적인 활기가 넘쳤다. 시간과 공간이 분리된 듯한 묘한 느낌이 있었다. 고궁 옆 스러져가는 건물, 오래된 옷가게 사이에 이런 곳이 있을 줄이야!


고작 두 세 테이블 남짓한 좁은 공간을 보다 뜬금없이 소림사와 쿵후가 떠올랐다. 무술을 연마하듯, 무언가를 연마하기 위한 연마 그 자체와 같은 것들. 이곳의 누군가는 자신의 아이가 어떤 분야에서 최고가 되길 바라며 이곳을 찾았을지도 모르겠다. 반짝이는 네일이 눈에 띄는 키 큰 엄마도 있고, 모자를 푹 눌러쓴 고단한 얼굴의 아빠도 있다.  아이들의 얼굴을 찬찬히 살펴봤다. 작은 눈들이 형형하다. 억지로 하는 아이는 없어 보였다. 지나가는 아이들과 엄마 몇몇이 관심을 보이지만 이내 자리를 뜬다.



가끔 아이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부모의 뒷모습을 보며 생각한다. 어린아이와 손을 잡고 걸어가는 건 어디에서나 너무도 흔한 풍경이지만, 이곳에선 중고등학생 정도 되어 보이는 조금 큰 아이도 부모와 손을 잡고 걷는 모습을 쉽게 볼 수 있다. 같은 아파트에 사는 아이 친구 엄마는 친정아빠와 손을 잡고 팔짱을 끼고 걷는다. 놀이터에서는 나이 지긋한 할아버지도, 아빠도 아이와 단둘이 노는 모습을 자주 볼 수 있다. 경쟁이라면 지지 않고, 아이에게 요구하는 것도 많아 보이는데, 솔직히 그다지 특별할 것 없교육이라 생각했었는뭔가가 다르긴 다른 것 같다. 


아이가 큐브 공식이 적힌 종이와 큐브를 잔뜩 들고 와 상기된 얼굴로 말한다. "엄마 수업은 다 끝났어. 여기서 조금 더 연습해도 된대."


그러는 동안 나는 바로 옆 옷가게에서 잠옷 바지 하나를 골랐다. 그런데 점원 아줌마에게 한 아이가 큐브를 들고 오는 것 아닌가. 웬걸, 아줌마가 큐브를 받아 들더니 스르륵 하는 손놀림으로 큐브를 순식간에 맞춘다. 이 분도 숨은 고수였다!


중국, 알면 알수록 신기한 곳이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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