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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도원 May 28. 2021

백신 맞은 날

중국에서 코로나 백신 맞기

지난 금요일, 코로나 백신을 맞았다. 이렇게 얘기하면 중국에선 백신이 빨리 보급되고 있구나 하는 반응을 보이는 사람이 있는 반면, 어떤 백신 맞았어? 하고 묻는 사람도 있다. 시노백이라 답하면 ‘뭐? 화이자나 모더나 아니고?’ 중국에서는 (외국인도) 중국 백신만 맞을 수 있다는 사실을 모르는 사람도 꽤 많다. ‘어쩔 수 없지, 괜찮겠지, 맞아서 괜찮으면 다행이긴 한데..’라는 반응도 감수해야 한다. 하긴, 현재 중국에 있는 나도 불신의 단계를 거쳐온 건 매한가지다.


‘외국인들에게는 따로 선택권이 있을지도 몰라.’

‘좀 기다리다 지켜보고 나중에 맞아야지.’

‘맞아야 할 것 같긴 한데 왠지 꺼려져.’

그러다가 결국, ‘이왕 맞아야 할 거면 맞을 수 있을 때 맞자.’가 되었다.


유치원 반 엄마들 대부분이 백신을 맞기 시작하고, 아파트 단지 내 접종소에 줄이 길게 늘어서기 시작했을 때, 더 이상 미룰 수 없다는 감이 왔다. 중국인 친구 얘기로는 아이가 다니는 초등학교에서 각 반 학부모들의 백신 접종 현황이 웨이신 단체 창에 업데이트된다고 했다. 그즈음 알아보니 중국에서는 시노팜, 시노백 외에 또 자국에서 개발한 新冠疫苗 (3회 맞는 백신) 접종이 시작된 상황이었다. 현재 남방 쪽에서는 대부분 시노팜, 북방 쪽에는 시노백이 보급되고 있고 현지 접종소에 가서 맞으면 백신 종류를 선택할 수 없었다.


고로, 외국인인 우리들에게 선택은 하나다. 큰 종합병원 내 외국인들을 대상으로 하는 접종 센터를 방문했다. 중간에 병원을 연결해주고 통역을 붙여주는 병원 업체가 붙어서 백신 가격은 4배나 올랐다. 100위안에서 400위안으로, 그래도 원하는 백신으로, 믿을만한 곳에서 접종하려면 어쩔 수 없다. 상해, 북경에도 살아봤지만 외국인들이 많은 도시이다 보니 의료 서비스의 질이 이 곳과는 하늘과 땅 차이다. 외국인들만을 위한 병원, 한국인 대상 병원이 따로 있는 대도시와는 달리 선양에서는 외국인들 대상 통역과 서비스를 갖춘 병원이 이제 막 생기고 있는 형편이다.


다행히 접종 센터에 가니 영어가 가능한 의료진, 한국어가 가능한 조선족 직원이 대기하고 있었다. 길에서는 흔히 마주칠 수 없었던 다른 외국인들도 몇몇 있었는데 모두 남색 폴로셔츠에 베이지색 면바지를 입고 있었고 셔츠 왼쪽에는 BMW마크가 선명히 찍혀 있었다. 낯선 곳에 초대받은 이방인들. 로마에서는 로마의 법을 따라야 한다지만 중국에서는 그런 비슷한 말을 들어본 적도 없는데도 불구하고 그 어디에서보다 이 나라의 법과 규율을 따라야 한다.


무려 코로나 백신인만큼 접종 시 간 떨리는 건 당연지사일지 모르지만, 외국인이 중국에서 중국 백신을 맞는 것만큼 간 떨리는 상황도 없다고 본다. 적어도 나는 그랬다. 떨리는 내 마음과는 달리, 대중국을 통합하듯 신속하고 단호하게 밀어붙이는 정부, 그리고 언제나 그래 왔듯 자국의 선택에 순응하는 중국인들을 보며, 코로나 통제가 완벽하리만치 잘 이루어졌던 때와 마찬가지로 경악에 가까운 감탄을 금치 못하게 된다.


백신을 맞으러 가던 그날엔 날씨가 후덥지근해서 거의 여름 날씨와도 같았던 반면 봄의 꽃가루는 베갯잇 속 하얀 솜처럼 남아 공기를 가득 채우며 떠다녔다. 모두들 마스크를 쓰는 목적이 코로나보다는 꽃가루에 있는 듯했다. 지금 떠올려봐도 실로 아이러니한 날씨였다고 생각한다. 여름의 텁텁함이 섞인 공기에 떠다니던 커다란 솜뭉치라니. 마스크를 잠깐이라도 벗어젖히면 솜뭉치가 목구멍에 턱 막혀버릴 것만 같은 답답함이 내 마음을 가득 채웠다.


남편이 낮에 시간을 내서 같이 병원에 갔고 한 명씩 접종한 후 상태를 지켜보기 위해 병원에서 20분 정도 대기했다. 맞고 나서 조금은 긴장이 풀렸었는지, 멍하니 앉아서 꽃을 바라보다가 사진을 찍었다. 대기했던 장소에서 바라봤던 꽃.

 “오늘 나름 역사적인 날이네.”라고 말하자, 남편이 “어 맞아 나도 주사 맞으면서 그 생각했어.”라고 맞장구를 친다.

기념으로 남겨놔야겠다고 생각해서 찍었는데 결국 이 날 찍은 사진은 어이없게도 이 꽃 사진 하나뿐이다. 병원 입구에서 기념사진 찍을 정신까지는 없었던 모양이다.


당일에는 주사 맞은 쪽의 팔이 좀 뻐근한 것 말고는 특별한 증상은 없었다. 피곤이 쉽게 느껴져서 잠을 많이 잤다. 그리고 거의 이틀이 지난 일요일 저녁 남편은 월요일 아침에 있는 회의 때문에 비행기를 타고 상해로 떠났다. 오후부터 피곤하다 싶었는데 남편이 없을 때 저녁 준비를 하다가 급 피곤함과 허기를 느꼈다. 점심에 먹었던 피자가 잘 소화되지 않는 느낌이었는데, 단순히 소화불량이라기엔 멀미처럼 어지럽고 구역질이 났다. 이 느낌, 언젠가 겪어봤던 그것, 지옥과도 같았던 입덧과 너무도 흡사했다. 거기다 점점 열이 나기 시작하더니 39도 가까이 열이 났다. 결국, 남편 없는 저녁부터 밤새도록 나는 구토, 멀미, 발열 증상을 겪었다. 두 아이들이 어느새 커서 토할 때 옆에 와서 등을 두드려주며 ‘엄마 괜찮아?’를 외쳤다. ‘엄마 아프니까 오늘 엄마 힘들게 하는 거 절대로 안 할게~’ 언젠가 내가 아팠을 때 아이들에게 엄마 힘들게 하지 말라고 했었던 기억이 났다. 아이코, 미안하면서도 고맙다. 타이레놀을 먹고 아이들 옆에서 잠깐 까무룩 잠이 들었다가 또 속이 울렁거려 화장실로 달려가 헛구역질을 했고, 또 지쳐 잠이 들었다가 깨서 빈 속을 토해냈다. 다음날까지도 그야말로 사경을 헤맸다. 남편은 오전 일정만 급히 마치고는 돌아왔고 의사와는 화상 통화를 해서 추가로 약을 처방받았다. 기름진 음식이나 매운 음식, 생선류를 주의해서 먹으라는 얘기를 들었다. 죽을 시켜먹으려고 메뉴를 봤는데 어쩌면 같은 죽이라는 이름 하에 이렇게도 다른 죽들이 있을 수 있는 건지, 그래도 따뜻하고 부드러운 죽을 시켜먹고 점차 기운을 차렸다.


몸이 무너지면 정신도 무너진다고 했다. 몸은 꼬박 이틀 만에 점차 회복되어 갔지만 정신은 그와 반비례하여 무너져갔다. 이틀을 꼬박 침대와 한 몸이 되어 일어나지도 못했었다가 무거운 몸을 드디어 일으킬 수 있게 되었을 땐 한마디로 진정한 ‘메롱’ 상태가 되어버렸다. 남편 없이 혼자 겪어야 했던 병치레, 너무 비슷한 느낌에 강제 소환되었던 끔찍한 입덧의 추억, 백신에 대한 걱정스러운 마음, 한국에 1년 반이 넘도록 돌아가지 못하는 마음 등이 뒤섞였고 급기야는 내가 뭐하자고 해외에 그것도 중국에 살아서 이런 일을 겪나!라는 한탄에 이르렀다. 지금까지 해외에 살면서 크게 아팠을 때마다 하필이면 남편이 불가피하게 자리를 비웠던 것 또한 무턱대고 원망스러워졌다. 그렇게 가라앉아버린 우울한 마음은 팔의 미약한 욱신거림과 함께 사라질 줄을 몰랐고 지금 이 시간까지도 나를 조금씩 괴롭히고 있다.


백신 맞은 날. 어쩌면 그건 그저 작은 해프닝이었을지도 모르고, 정말 역사적인 날의 한 순간이었을 수도 있다. 역사 속에서 일어나는 작은 해프닝들이 어쩌면 한 사람의 인생을 만들어가는 건지도 모르겠다. 그래도, 여전히 나는 주어진 상황에서 그나마 가장 나은 방법을 찾아낼 수밖에 없고, 언제나 그랬듯 결국엔 찾아낼 것이다. (라고 말할 수밖에 없다.)

함께 병원에 가서 작은 긴장감이라도 나눌 수 있어 조금은 괜찮았던 것처럼,

토하는 나를 두드려주는 작은 손들에 잠시나마 미소지을 수  있었던 것처럼, 그렇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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