아까부터 커서가 고정돼 있다. 썼다 지우기를 여러 번, 아직 한 문장도 못 나갔다. 생각만 맴돌 뿐 자판은 고요하다. 하얀 도화지 위에 점 하나 찍기 어렵다. 깜박이는 커서가 내게 묻는다. 무엇을 쓰고 있는지. 왜 쓰고 있는지. 나도 작가 인지.
나는 작가가 아니다. 글보다는 말로 손가락보다는 발바닥으로 생계를 유지한다. 하늘 위를 땀나도록 걷고 밤을 꼴딱 지새우며 통장 잔고를 채운다. 어쩌자고 이 일을 했는지 졸린 눈을 비비며 불평하다 따박따박 들어오는 월급에 새까맣게 잊고 산다. 문 앞에 쌓인 택배 상자에 방긋 웃고 입가에 뭍은 고기 기름을 닦으며 또 한 달을 버틴다. 그러다 이따금 마음이 궁할 때면 펜을 잡는다. 다이어리, 핸드폰 메모장, 노트북 등 그때그때 드는 감정을 손에 잡히는 데로 끄적인다. 너는 왜 그러니, 나만 잘 못 했니? 왜 그렇게 사니 라고. 차마 뱉지 못 한 말들, 한 마디도 대꾸하지 못 한 설움을 자판에 퍼붓는다. 그럼 잘한다, 얼씨구나, 할 말은 하고 살아야지 하는 응원이 답지한다. 기쁜 날은 기쁜 대로 적어둔다. 나 잘했지? 합격했어. 승진했어 라고. 군자 인척 꽁꽁 숨겨둔 본심을 제일 먼저 자판 위에 쏟아낸다. 그러면 기특하네. 고생했어. 살다 보면 자 뻑이 필요할 때도 있지 라며 궁둥이를 팡팡 두들겨준다. 가끔 술잔이 손짓하지만, 겪어봐서 안다. 나쁜 남자는 후유증이 길다는 것을. 깨질 듯 한 숙취와 공중분해되는 말에 속이 개운치 않다. 도돌이표처럼 글로 돌아온다.
언제부터였을까? 첫사랑과 헤어질 때도 면접에서 떨어질 때도 글과 안부를 주고받았다. 헛헛하고 무엇해서 매일같이 쓰다 보니 어느새 글이 곁에 있다. 한국이건 외국이건 틈만 나면 어딘가에 기록한다. 앞 뒤로 커서를 옮기며 한 바탕 쏟아내다 썰물처럼 거둬낸다. 쓰고 지우고, 고치고 다시 쓰며 남발하는 오타와 삐걱대는 맞춤법에 얼굴을 붉힌다. 글은 삶을 닮는다는데 이렇게 쓰다가 (살다 간) 큰 일 날 꺼 같아 홀로 퇴고를 한다. 고해성사하는 마음으로 주변 안부를 묻고 부모님께 전화를 건다. 잘 살면 잘 쓰나 싶어 여기저기 기웃거리며 도움 거리를 찾는다.
쓰다 지우기를 여러 번. 깜박이는 커서가 다시 묻는다. 무엇을 쓰고 있는지. 왜 쓰고 있는지. 나도 작가 인지. 이번엔 –도에 방점을 찍어 답한다.
–도 (동사, 형용사 어간 뒤에 붙어 강조를 나타내는 어미)
나도 작가다 라고. 글로 먹고살지 않지만 글 없이 못 사는 나도 작가다. 흑과 백, 옭고 그름, 하는 일과 하고 싶은 일, 나와 작가 사이 다리처럼 놓인 -도 위를 기웃거리는 나도 작가다.
화면 위 글자들이 콧 방귀를 뀌지만 당당히 응수한다. 이제 시작 일 뿐이라고. 끈질기게 물고 늘어지면 그런대로 똥이든 된장이든 뭐라도 되지 않겠냐고. 땅도 일 년을 놀리면 잡초가 무성해 농사를 못 짓는데 종이를 놀리면 쓰겠냐고. 김훈은 꽃은 피었다와 꽃이 피었다로 담배 수십 갑을 태웠고 이백은 엉덩이 밑에 수백 장의 연습지를 깔고 앉았으며 구스타프 플로베르는 마담 보바리를 쓰는데 5년이 걸렸다고. 원고지 고랑마다 감성의 씨앗을 파종하기 위해 불면의 밤을 지새우는 이외수를 따라 나도 밤을 새우겠다고. 여백마다 상추라도 심겠다고 말한다.
좀 나아질까 싶어 오늘도 타닥타닥 자판을 두들긴다. 일필휘지로 쓰는 날을 상상하며 열정을 불태운다. 조심스레 키워드를 누른다. <나도 작가다>라고 쓰고 '시작'이라고 읽는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