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유럽 음식 방랑’. 시칠리아의 한 주방에서 음식을 하는 도중 불현듯 떠오른 타이틀이었다. 물론 정말로 부엌칼을 손에 쥐고 다니지는 않았다. 그랬다면 아마도 유럽의 음식 이야기 대신 유럽 유치장 음식에 관한 전무후무한 에세이를 썼을지도 모르겠다. 양손에 각각 카메라와 부엌칼을 들고 이리저리 수상하게 다니는 외국인을 곱게 볼 현지 경찰은 흔하지 않을 테니까 말이다.
분수 넘치게 사회생활의 첫발을 기자란 직업으로 내디뎠다. 호기심이 많아 적성에 맞을 줄 알고 시작한 일이었다. 하지만 호기심이라는 게 시도 때도 없이 언제나 작동하는 건 아니라는 걸 나중에야 알게 됐다. 몇몇 부서를 거치는 동안에도 호기심은 물에 젖은 성냥 마냥 열정에 불을 붙이지 못했다.
열정은 엉뚱한 데서 타올랐다. 요리에 흥미를 느끼게 된 것이다. 친구들과 지인을 초대해 음식을 만들면서 문득 무미건조하게 기사 쓰는 일보다 요리하는 일이 내게 있어 훨씬 보람된 일이란 걸 깨달았다. 더 늦기 전에 요리를 배우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고 후회하지 않기 위해 이탈리아행 비행기에 몸을 실었다.
한식이 아닌 서양요리를 택한 이유는 낯섦이 주는 흥미 때문이었다. 전혀 알지 못하는 분야라 날 선 호기심과 흥미를 갖고 탐구할 수 있었지만, 문화적인 배경지식 없이는 장님 코끼리 만지는 격이었다. 왜 이런 재료를 사용하고 왜 이런 조리법이 탄생하게 됐는지, 왜 이런 방식으로 먹는지 궁금했다.
넘치는 호기심과 갈증을 풀기엔 주방은 답답한 곳이었다. 직접 발로 뛰고 몸으로 부딪쳐보는 일이 필요했다. 결국 견문을 넓히고자 주방을 떠났고, 유럽 곳곳을 누비는 탐사가 시작됐다. 질문에 대한 대답을 찾아 나가는 취재면서 동시에 나름의 요리 수련이었던 셈이다.
‘카메라와 부엌칼’은 상징적이면서 동시에 실재적 의미를 지닌다. 기자의 시선과 요리사의 시선으로 음식 이야기를 풀어내겠다는 의지인 한편 여정 내내 함께한 도구이기도 하다. 유럽 10여 개국을 누비면서 카메라는 괜찮아도 긴 부엌칼을 휴대해 다니면 꽤 곤란해질 위험이 있다.
귀찮은 상황을 피하고자 주방용 부엌칼 대신 택한 건 작은 주머니칼이었다. 처음 이탈리아에서 장만한 칼은 프랑스의 유서 깊은 칼 브랜드 오피넬(Opinel) 사의 Slim Line 08 Beech, 8cm짜리 접이식 스테인리스 칼이다. 작고 가벼워 들고 다니기도 좋고, 디자인도 그리 위협적으로 보이지 않아 어디서든 펴고 접는데 부담이 없었다는 장점이 있다.
(출처: Blade Forum)
유럽을 여행 중이라면 주머니칼은 선택이 아닌 필수다. 사실 주머니칼을 갖게 된 건 생존을 위한 필요 때문이었다. 곳곳에 편의점과 24시간 문을 연 식당이 넘쳐나는 한국이야 언제 어느 때고 음식을 먹을 곳이 많지만, 남유럽 작은 마을에서는 꿈도 못 꿀 일이다. 가뭄에 콩 나듯 한 블록에 식당이 하나 있을까 말까 한 데다가 점심과 저녁 한두 시간을 제외하고는 거의 모든 식당이 약속이나 한 듯 문을 굳게 걸어 잠근다. 식사 시간을 놓치면 다음 끼니때까지 쫄쫄 굶기 일쑤다.
몇 번의 허기를 경험해보니 대책이 필요했다. 흔하고 저장하기 쉬운 과일과 햄, 그리고 치즈를 식사 대용으로 먹기 위해선 도구가 있어야 했다. 특히 딱딱한 염장 건조한 햄을 얇게 썰려면 칼 말고 대안이 없다. 좋은 주머니칼이 하나 있다면 유럽 어디에서나 와인과 함께하는 만찬이 가능해진다. 몇 번이고 허기에서 구해준 오피넬 주머니칼과의 인연은 그리 오래가지 않았다.
작고 가볍다는 건 잃어버리기도 쉽다는 의미와도 통하는 법. 어디서 어떻게 잃어버린 건지 생각조차 나지 않는 건 칼에 대한 애정이 부족했기 때문일까, 아니면 너무 저렴해서였을까. 같은 오피넬 칼을 한 번 더 산 적이 있는데 그것은 3일도 안 돼서 사라졌다. 아무래도 칼이 문제이지 싶다.
3개월 간의 유럽 방랑을 마치고 한국에 돌아온 이후에도 유럽에 갈 일은 몇 번이고 있었다. 행방불명된 오피넬 주머니칼의 빈자리를 채운 건 프랑스의 한 시골 마을 장터에서 찾은 녀석이었다. 올리브나무로 만든 손잡이에 칼등은 꽤 두껍고 날의 폭은 작은 단단한 강철 소재의 주머니칼이었다. 브랜드나 상호는 없었다. 인근 대장간에서 만든 제품이라고 했다. 날이 S자를 그리며 곡선이 우아하게 나 있는 게 꽤 매력적이었다. 더군다나 한쪽에는 와인을 딸 수 있는 스크루까지 달려있었다.
가볍고 편하지만 뭔가 손맛이 없었던 오피넬 칼과는 달리, 묵직하면서 손에 착 감기며 달라붙는 감촉이 맘에 들었다. 그날 저녁 시험 삼아 쏘시송(프랑스식 염장 건조 소시지)을 잘라 보았는데 나무토막 같던 소시지가 마치 초량 두부 잘리듯 썰렸다. 아마도 프랑스 칼 장인이 만든 것이 틀림없을 무명의 강철 주머니칼은 그날 이후 가장 아끼는 칼이 됐다. 국내 서든 국외에서든 주방밖에 서면 늘 함께했다. 포르투갈 공항의 보안 검색대 쓰레기통 안으로 들어가기 전까지는.
당연한 이야기겠지만 칼은 항공 보안 규정상 기내 반입이 금지다. 그걸 모르는 것도 아닌지라 매번 수화물로 부쳤는데 그날따라 가방에 둔 칼을 캐리어에 옮기는 걸 깜빡한 것이다. 보안담당자의 단호함 앞에선 나의 우는 표정도 소용이 없었다. 아직도 기억이 생생하다. 올리브나무 손잡이의 그 아름다운 주머니칼이 차가운 스테인리스 휴지통 안에 떨어지면서 내던 텅~ 하던 소리는 마치 단말마의 비명처럼 들렸다. 작별 인사, 아니 일방적인 실연 통지였다.
비행기를 타고 한국으로 오는 내내 상실감이 쉬이 떨쳐지지 않았다. 그 프랑스 시골 마을에 다시 가지 않는 한 같은 걸 구할 수도 없어 더 속상했다. 공항에 내리자마자 나는 실연당한 사람 마냥 굳은 결심을 했다. 다시는 칼에 애정을 주지 않겠노라고.
아끼는 칼과의 이별 후 칼은 내게 설렘을 주는 대상에서 단지 무미건조한 도구가 됐다. 물론 예쁘고 멋진 칼을 보면 갖고 싶다는 생각이 들지만, 그 칼이 심미적인 만족 이상으로 무언가를 선사해주리라는 기대는 하지 않는다. 그것을 잘 다루기까지는 시간이 걸리고, 익숙해지는 과정을 거쳐야 비로소 목적에 충실한 도구가 된다는 걸 알기 때문이다.
카메라와 부엌칼이란 타이틀 때문인지 종종 ‘좋은 카메라’나 ‘좋은 칼’을 추천해달라는 질문을 받는다. 그럴 때마다 매번 당혹스럽다. ‘좋은’의 의미는 개인마다 상황에 따라 다르기 때문이다. 그래서 이렇게 대답한다. 자신의 예산에서 살 수 있는 가장 비싼 걸 고르시라고.
반드시 그런 건 아니지만 대개 가격과 품질은 어느 정도 비례하는 법이다. 비싸게 주고 산 물건일수록 애정이 생긴다. 애정이 생기면 자주 만지게 되고 그러다 보면 손에 익게 된다. 카메라도 칼도 단지 어떤 목적을 위해 손에 쥐는 도구일 뿐이다. 좋은 카메라가 좋은 사진을 찍어주지는 않고 좋은 칼이 좋은 음식을 보장해주지는 않는다. 손에 익어 잘 쓸 수 있다면 그것이 어떤 것이 되었든, 나에게 좋은 도구인 셈이다.
칼이란 건 결국 무언가를 자르기 위한 도구다. 그러기 위해서는 좋은 강재도 중요하지만 더 중요한 건 늘 칼을 잘 갈아 놓는 습관이다. 수백만 원을 호가하는 칼일지라도 녹이 슬고 이가 나가면 무 하나 제대로 자르지 못하는 무용한 도구일 뿐이다. 주방에 놓인 칼은 매번 갈아 쓰지만 가끔 스스로에게 묻는다. 나의 생각이나 시선은 날카로운가. 어딘가 녹이 슬고 이가 나가 있는 게 아닐까.
무뎌졌다고 생각할 때면 숫돌에 날을 벼리듯 가끔 새로운 환경에 나를 던져 넣는다. 카메라와 부엌칼을 든 남자의 음식 방랑은 아직 끝난 게 아니다. 앞으로도 날 선 시선으로 세계를 여행하며 음식과 요리에 대해 이야기할 것이다. 다음번에 손에 쥐게 되는 주머니칼과는 인연이 더 오래갔으면 하는 바람이다.
해당 원고는 포스코 뉴스룸 '스틸에세이'에 발행된 내용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