영화 파과를 검색하면 이렇게 설명이 나온다.
바퀴벌레 같은 인간들을 처리하는 ‘신성방역’에서 40년간 활동 중인 레전드 킬러 ‘조각’과 그를 쫓는 미스터리한 킬러 ‘투우’의 숨 막히는 핏빛 대결을 그린 작품.
나는 이 영화를 이렇게 정의하고 싶지 않다.
나에게 이 영화는 삶의 의미와, 존재가 지속되는 이유를 묻는 시간이었다.
영화는 어린 소녀였던 조각이, 아직 조각이 되기 전 류를 만나면서 시작된다. 타들어가는 추위 속에서 소녀는 류에게 구해지고, 그들은 가족이 된다. 그러나 자신을 지키기 위해 어쩔 수 없이 남자를 죽이게 되고, 류에게서 ‘손톱’이라는 이름과 함께 그의 기술과 규칙을 전수받으며 킬러로서의 삶을 살게 된다.
여기까지의 인트로를 보여준 뒤, 젊은 킬러로서의 조각의 모습을 보여주며 파과라는 영화 타이틀이 나온다.
그 짧은 타이틀을 보는 순간, 어린 조각이 선택한 것이 아닌, 어쩔 수 없이 들어가게 된 그 인생의 초입이 나는 벌써 슬퍼졌다.
이 사람에게 다른 인생이 있었을까?
있었다면 어떤 모습이었을까?
어쩔 수 없이 그냥 흘러들어 갈 수밖에 없는 인생들, 그것들을 그저 감내해야만 하는 시간들.
그것들이 너무 아프고, 잔인하게 느껴졌다.
방역 도중 과거의 트라우마로 인해 자신의 존재를 노출시키고 만 장비. 규칙에 따라 회사는 장비를 없애기로 결정하고, 조각은 자신이 직접 하겠다며 장비를 쫓는다. 하지만 마지막 순간, 조각은 장비를 찌르기를 잠시 주저하고, 장비는 칼을 쥔 조각의 손을 끌어당겨 스스로를 찔러 죽인다.
나는 장비를 찌르기 전 조각이 보여준 아주 짧은 망설임이, 조각이 가지고 있는 연민처럼 느껴졌다. 조각은 지킬 것이 없는 삶을 살았다고 생각했지만, 사실은 인생의 초입부터 그 모든 것을 강탈당한 사람일 뿐이다. 그 시작에는 어쩌면 ‘나도 보호받을 수 있고 울타리가 있다’는 안도감이 있었을 것이다. 그리고 아주 작은 욕심도 생겼을지 모른다.
그러나 소중한 것을 지키지 못했을 때, 그리고 자기에게 ‘손톱’이라는 존재를 부여해준 류마저 떠났을 때, 조각은 분명 두려웠을 것이다. 다시는 이런 감정을 느끼고 싶지 않아서, 억지로, 일부러 자신의 감정을 죽이며 그렇게 메마르게 살아왔을 것이다.
그래서 장비를 죽일 때도, 자신의 정체를 알아버린 강 선생을 그냥 놔둔 것도, 억지로 꾹꾹 눌러왔던 감정들이 조금씩 새어 나온 순간이 아니었을까.
감정은 사라지지 않는다. 사라질 수 있는 존재도 아니다. 그저 눌릴 뿐이고, 눌린 감정은 언젠가 반드시 그 틈으로 새어 나온다. 자신의 정제되지 않은 감정을 마주한 조각은 당황했을 것이다. 그 감정을 다루는 법을, 류에게 미처 배우지 못했으니까.
류가 죽고, 레전드 킬러로 40년을 살아온 조각. 살인이라는 행위는 직업도, 폭력도 아닌, 조각에게 자신의 존재를 증명하는 방식이었을 것이다. 그것은 단순한 살인이 아니라 방역이었고, 그 기술은 류에게서 물려받은 유일한 것이었다.
방역을 하며 조각은 류와 함께할 수 있었을 것이다. 처음으로 쓸모를 인정받은 조각에게, 방역이란 행위는 어쩌면 그녀 자신이었을 것이다. 방역을 통해 그녀는 세상과 연결되었고, 계속해서 자신의 쓸모와 존재를 증명해왔다. 그것 외에 조각에게 남은 인생의 의미는 없었을 것이다.
쓸모의 증명.
그것은 조각에게 인생의 굴레이자, 동시에 인생의 연료였다.
영화는 처음에 투우를 광기에 사로잡힌 인물, 복수에 올인한 인간으로 보여준다. 집요하고, 집착적이고, 폭력적이며 조각을 압도하려는 인물. 그러나 투우가 어떤 사람이었는지는, 그의 죽음의 순간에 이르러서야 비로소 드러난다.
조각에게 류가 전부였던 것처럼, 어른이 된 투우에게 조각 역시 그랬다. 무기력했던 그 시절의 투우에게 조각은 한 줄기 빛이었고, 구원이었을 것이다. 조각은 투우에게 ‘아빠를 죽인 킬러’라기보다, 자신을 또다시 버리고 간 엄마에 가까웠을지도 모른다.
투우가 조각의 목을 서서히 조여온 이유는 복수가 아니라, 그저 자신을 알아봐 주길 바랐기 때문이었을 것이다. 말하지 않아도, 임무가 아닌 순간에 어린 투우에게 보여주었던 그 진심 한 조각을 기억해주길 바랐던 것이다. 직접 말하지 못한 이유는, 혹여 그것이 그저 임무였을까 봐, 자신이 느낀 진심이 착각이었을까 봐 두려웠기 때문일지도 모른다.
투우에게 그 진심, ‘당신을 따라가겠다’는 그 다짐은 그의 인생을 지속하게 만든 연료였을 것이다. 방역 임무 도중 투우를 대했던 조각의 행동과 태도에 연민이나 진심이 있었는지는 알 수 없다. 우리는 계산하며 살려고 애써도, 어느 순간 계산되지 않은 감정이 튀어나와 스스로를 당황하게 만드는 부류니까. 계산되지 않고 의도되지 않았던 어떤 진심을, 애착에 굶주려 있던 어린 투우는 더욱 집착적으로 붙잡았을 것이다.
자신의 품에서 투우를 떠나보내며, 조각은 어쩌면 투우가 아닌, 아직 조각이 되기 전 민설화였던 시절의 어린 자신을 떠나보내고 있었는지도 모른다. 류의 시선과 그림자를 좇아 살던 자신의 인생, 그 수고스럽고 짐스러운 시간을 투우에게서 겹쳐 보며 “왜 진작 나에게 말하지 않았어”라고 묻는 것은, 결국 어린 자신에게 하는 말이었을 것이다.
자신의 마음을, 고통을, 아픔을, 슬픔을 진작 알아주었다면, 조각은 그 긴 시간 삶의 무게를 오롯이 짊어지고 버텨내지 않아도 되었을지 모른다.
그래서 조각은 자유로워졌을까. 아니면 단지 이해에 도달했을 뿐일까.
나는 이 질문에 대한 답을 추측하는 것 자체가, 조각의 인생을 함부로 단정 짓는 일처럼 느껴졌다. 감히 그 길고 외로운 투쟁을 어찌 한 문장으로 말할 수 있을까. 그것은 어떤 삶을 너무 가볍게 말하는 일이기 때문이다.
다만 추측해 본다면, 조각은 자유로워지지는 않았을 것이다. 나는 인생에서 자유라는 것은 존재하지 않는다고 생각한다. 어쩌면 죽음조차도 우리를 완전한 자유로 이끌 수는 없을지 모른다. 그럼에도 나는 조각이 자신에게 조금 더 여유로워졌기를 바란다.
민설화에서 손톱이 되었지만, 류를 지키지 못하고 떠나보내야 했던 자신에게 ‘손톱’이라는 이름은 더 이상 허락되지 않았을 것이다. 그보다 더 하찮은 ‘조각’으로 자신을 내려놓고, 쓸모와 증명을 위해 애써 버텨왔던 시간들.
마지막에 네일 아트를 하며 손톱을 꾸미는 장면은, 나에게 조각이 다시 류가 붙여준 이름으로 살아볼 용기를 얻은 순간처럼 보였다. 이제 더 이상 류에게 쓸모를 증명해야만 하는 어린 소녀가 아니라, 스스로를 정의할 수 있는 시점에 그녀가 도달한 것은 아니었을까.
손톱을 칠한다고 해서 조각이 민설화가 될 수는 없다. 햄버거를 먹던 그 겨울날의 민설화는 죽지는 않았지만, 그 상태로 멈춰 화석이 되어버렸다. 너무 멀리 와버려 돌아갈 수는 없지만, 죽어가는 투우에게 그 이름을 말했다는 것은, 조각 역시 봉인해 두었던 자신의 일부를 꺼내놓을 준비가 되었다는 뜻처럼 느껴졌다.
잔인하고 냉정하며 감정이 죽은 사람처럼 보이는 류는, 가족을 잃고 자신의 손을 잡는 손톱을 조용히 뿌리치며 말한다. “너나 나나, 서로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말자.”
류에게도 손톱은 이미 가족이었을 것이다. 그러나 아내와 아들을 잃은 그는, 더 이상 무엇도 잃고 싶지 않았을 것이다. 상실이 무엇인지 알았기에, 냉정함이 생명인 방역의 일을 다시는 하지 못하겠다고 생각했을지도 모른다. 그래서 복수하러 갔을 때, 그는 살아 돌아올 생각이 없었을 것이다.
그랬기에 곁에 남은 손톱마저 냉정하게 떼어내며, 서로 지켜야 할 것은 만들지 말자고 말하지 않았을까. 그 말은 류가 손톱에게 건넬 수 있었던 마지막 말이었고, 손톱에게는 류와의 약속처럼 남았을 것이다.
그 약속을 지키며 자신의 쓸모를 증명하는 삶.
그것만이 조각의 삶이 무너지지 않도록 붙잡아 주는 최소한의 틀이었을 것이다.
파과: 인터내셔널 컷은 액션 영화도, 누아르 영화도 아니다.
노년에 대한 이야기 역시 아니다.
이 영화는 우리가 어떻게 버텨왔고, 어떻게 자신을 증명해왔는지를 보여준다.
운이 좋아 그 의미와 이유를 일찍이 발견할 수 있다면 더없이 좋겠지만, 그것을 찾기 위한 여정을 시작했다는 사실만으로도 각자의 삶은 조금 더 의미를 갖게 되지 않을까.
그 끝에 무엇이 있든,
끝까지 걸어가 보면 어떤 것이든 남아 있을 것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