40대에 영어공부 시작하기
어렵게 딴 한국어교원자격증으로 봉사활동을 했다. 활용할 수 있다는 게 다행이었다. 이왕이면 자격증으로 돈도 벌고 싶었다. 내 삶이 글로벌해지면 좋겠다는 원대한 꿈을 꾸었다. 영어공부를 해야 하는 절실한 이유가 생겼다.
어떤 방법으로 할지 정해야 했다. 우리나라만큼 다양한 공부법과 교재가 있는 곳이 있을까. 뭔가 확실한 방법을 찾고 싶었다.
방송통신대 중문과 다닐 때가 떠올랐다. 전공 교수님이 중국어를 잘하게 된 배경을 설명해 준 적이 있다. 1970,80년대에는 중국 무술영화가 인기가 많았다. 그중에서 영화 '취권'은 단연코 최고였다. 교수님도 이 영화의 광 팬이었다. 어느 날, 라디오를 듣는데 중국어 전문가가 농담처럼 이렇게 말했다고 한다. “영화 대본 100번 읽어보세요 무슨 언어이든 가능합니다.”
교수님은 그 날로 대본 읽기에 들어갔다고 했다. 교수님은 자기 경험을 설명하면서 갑자기 '취권' 대사를 술술 외웠다. 강의실 여기저기에서 탄성이 터져 나왔다.
나도 그렇게 하면 영어가 될까. 고수의 비결을 발견한 것 같아 가슴이 벅찼다. 교수님이 그리했듯 나도 그대로 따라 하기로 했다. 내 끈기와 열정이면 충분히 가능할 거라 믿었다.
2014년 본격적으로 영어공부를 시작하였다. 어떤 영화를 선택할까 고민하다가 집에 있는 DVD를 찾아보니 '찰리와 초콜릿 공장' 이 있었다. 아이들과 함께 즐겁게 본 영화다. 특히 독단과 외로움을 동시에 표현하는 조니 뎁의 연기와 우스꽝스러운 단발머리가 마음에 들었다
인터넷에서 영화 대본 공부법을 여러 가지 찾아보았다. 8년 전 영어공부를 시작할 때 ' 쉐도잉(shadowing) '이라는 뜻을 잘 몰랐다. 배우들이 하는 대사를 그대로 따라 하는 것을 말한다. 내가 하려는 영어 공부법이 바로 이거였다.
공부할 자료를 준비해야 했다. 대본과 음성파일을 어디서 구해야 할지 막막했다. 인터넷을 검색해보니 대본을 다운로드할 수 있었다. 사이버 세상의 사람들이 음성파일을 만드는 방법도 친절하게 설명해 놓았다. 인터넷에선 맘만 먹으면 얼마든지 원하는 정보를 찾을 수 있었다. DVD에 있는 음성파일을 별도로 다운로드하는 게 가능할까? IT 관련 지식이 부족하니 세상에 어떤 것이 가능한지 불가능한지조차 가늠이 되지 않았다. 일단 음성파일 변환 관련 자료를 찾아보니 생각보다 간단하게 할 수 있었다. 이때부터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에 대해 거부감이 줄어들기 시작했다.
스크립트의 모든 문장을 꼼꼼하게 번역했다. 시간과의 싸움이었다. 대화문이기 때문에 문장 구조가 복잡한 것은 아니었다. 단어를 다 알아도 알 수 없는 문장이 많았다.
스크립트를 보지 않고 한 문장씩 열 번 정도 반복 듣기를 하면서 받아쓰기를 했다. 첫 번째 공부의 고비였다. 들리지 않는 문장을 계속 듣기를 하는 과정은 지루하고 답답하기만 했다. 수도 없이 들어도 절대로 안 들리는 문장이 수두룩했다. 그래도 마지막 문장까지 포기하지 않고 듣고 받아쓰기 과정을 했다.
본격적으로 소리 내어 읽기에 도전했다. 모든 문장을 하나하나 배우의 말투, 속도를 그대로 따라 해 보려고 무한 반복했다. 읽기를 반복할수록 연음과 억양이 저절로 몸에 익혀졌다.
매일 1시간씩 읽기를 반복했다. 처음에는 읽는 속도가 느리기 때문에 대본의 2-3장만 해도 1시간이 훅 지나갔다. 한 문장을 배우가 말하는 것처럼 따라 하려면 최소한 20번, 30번 이상 해야 비슷해진다. 3개월 정도 지나니 대본 전체를 하루에 낭독할 수 있게 되었다. 6개월 정도 반복하면 배우보다 더 빨리 발음할 수 있는 문장도 나오기 시작한다. 1시간 30분이면 모든 문장을 낭독할 수 있다. 매일 1시간 이상 소리를 질러 댔더니 공부를 마칠 때면 목이 아팠다. 쉰 소리까지 나왔다
외출하고 돌아오면 바로 그날 분량을 해냈다. 아이들이 학교나 유치원에서 집에 오기 전에 끝내기로 맘먹었다. '내일 하지!', '좀 있다 하지!' 이런 생각이 들지 못하도록 처음 습관 잡는 것에 집중했다.
어느 날부터 배우들의 대사를 따라 읽는데 내가 하는 발음이 좀 멋있게 들렸다. 나 혼자 착각일지도 모르지만 왠지 내 발음 좋은 것 같았다. 예전에는 치열하게 영어공부를 해본 적이 없어서 내가 영어 발음이 좋은지도 모르고 있었던 것이다.
읽은 횟수를 '바를 정(正)'으로 표시해 나가면서 '과연 내가 100번을 채울 수 있을까?'라는 의구심이 가득했다. 그러나 50번을 넘어서니 ‘잘하면 100번 할 수 있겠는데!!!’라는 자신감이 생겼다. 마침내 약 6개월간 '영화 대본 100번읽기' 대장정을 무사히 마쳤다. 지그 지글러는 ‘정상에서 만납시다’라는 저서에서 ‘자기 자신을 믿지 않고 자신의 능력을 충분히 사용하지 않는 사람은 도둑'이라고 했다. 무식했던 100번의 낭독을 통해 내 안의 잠재력을 끄집어낼 수 있었다. '끈기'와 '열정'으로 내 능력을 믿고 충분히 사용한 결과였다
똑같은 문장을 100번 이상 보면 문법구조를 저절로 알게 되는 경우가 있다. 학창 시절 가장 어려운 영어 단계라고 여긴 가정법 문장이 눈에 들어오기 시작했다. 새로운 지식을 습득하는 것도 중요하지만 반복의 힘이 얼마나 큰지 깨 달았다. 다른 사람들이 소개하는 공부 이론이 아니라 나만의 공부법을 체험하게 된 거다. 몸소 고생하며 터득한 공부방법은 나만의 스토리가 되었다. 이 스토리를 블로그와 유튜브에 남겼다. 공부할 당시 노트를 그대로 보여주니 공부에 대한 열정과 진정성이 배가 되었다. 노트는 내 삶의 일부를 기록해 놓은 것이나 다름없었다.
힘들어도 포기하지 않았던 것은 방송통신대와 자격증 준비를 하면서 몸에 배어 있는 공부습관이 있었기 때문이었다. 무엇보다 영어를 반드시 해내리라는 굳은 의지가 있었다. 영어를 못해서 직장에서 해고됐다는 사실이 나에겐 사무칠 만큼 아팠다.
100번을 완료하면 내가 영어회화를 자유롭게 할 수 할 수 있으리라 기대했었다. 그러나 생각만큼 나의 목표는 달성하지 못했다. 다만 영어문장을 다른 사람들 앞에서 당당하게 읽을 수 있게 되었다. 지금도 원서 읽기를 하면서 낭독을 병행하고 있다.
영어공부를 하면서 강하게 깨달은 사실이 있다. 어느 수준 이상의 목표를 달성하기 위해서는 무식하게 몰입하는 기간이 반드시 필요하다는 것이다. 이후로 난 새롭게 무엇인가를 시작할 때 이런 몰입 기를 당연히 거쳐야 하는 걸로 받아들인다. 처음에는 나를 믿지 못했지만 힘든 과정을 통해 무엇이든 할 수 있는 힘과 자신감이 길러졌다. 이때 생긴 몰입 근육은 현재 독서와 블로그, 유튜브를 해 낼 수 있는 원동력이 됐다.
이렇게 시작된 영어공부를 8년째 하고 있다. 실력이 조금씩만 늘어서 속상한 마음도 있다. 하지만 내가 시작도 하지 않고 중간에 포기했다면 나의 수준은 어떨지 생각도 하기 싫다. 시간이 흐르면서 영어공부 목표도 변하였다. 번역서를 영어 원서로 직접 읽으면서 독서의 기쁨이 확장되는 것, 새롭게 생긴 나의 바람이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