말보다 표정을 먼저 읽어내고, 상대방이 내세우는 논리 보다 기분을 더 잘 살펴내는 사람들이 있습니다. 만날 때마다 마음을 읽어주기에 사람들이 호감을 갖고 좋아하죠. 공감을 깊게 하는 사람들입니다.
그런데 깊은 공감을 하려면 상대방의 표정, 감정, 분위기 등 온갖 신호에 끊임없이 주의를 기울이고 있어야 합니다. 조금만 시간이 지나도 많은 에너지 소비가 일어나죠. 금방 피곤해져요. 누군가의 마음을 읽고 공감해주느라 정작 자신은 소진되어버리는 겁니다.
몸은 살기 위해 절전 모드에 들어가게 되죠. 공감을 타고났는데도 에너지를 어떻게든 절약하기 위해 스스로를 억눌러야 하고, 사람들의 요구에 맞춰 감정 조절 하다보니, 정신적-육체적 피로에 점점 지쳐가는 거에요.
결국 타인과의 연결에 에너지를 쓰기 위해 나와의 연결을 끊어내게 됩니다. 그래야 늘 하던데로 다른 사람에게 에너지를 쓸 수 있을테니까요. 그러나 자기 자신과의 연결이 끊어지면, 몸이 신호를 보냅니다. 여태껏 살아왔던 방식으로는 더 이상 살아갈 수 없다고.
음악을 하지 않으면 살 수 없을 것만 같아 노래를 불러야만 했던 한 가수가 제 마음을 읽어줬습니다.
살아있어도 죽은 것처럼
길을 잃고 헤메이는걸
나를 깨워 그리고 안아줘
내가 살아있다고 느낄 수 있도록
- ‘아무도 모른다’ 사비나앤드론즈
https://youtu.be/YgnZyIWIyJc?list=RDYgnZyIWIyJc&t=64
나를 깨워달라는 간절한 호소는, 타인의 마음을 읽어내느라 정작 자신의 영혼이 소리 없이 무너져 내린 사람의 구조 신호로 들려왔습니다.
공감은 선의에서 시작됐지만 타인의 감정을 끝없이 감당하다 보면 정작 내 마음을 돌볼 여력은 남지 않게 됩니다. 감정을 이해하는 수준을 넘어 대신 떠안는 것이 일상이 되었으니 그럴 수 밖에 없었어요.
사람의 마음을 살피는 다정함이 어느덧 고단한 업무가 되어버렸을 때, 업무로부터 멀어지는 방향성이 생기게 됩니다. 역설적이게도 공감을 억누르고 냉정한 논리와 기준으로 스스로를 무장해야만, 부서진 일상을 간신히 지켜낼 수 있으니까요.
다정함은 그래서 아픔입니다. 우리는 소중하지 않은 것에 통증을 느끼지 않아요. 아프다는건 그만큼 내 마음이 향했던 곳이 진심이었다는 증거니까요.
아픔이 없으면 타인에게 무관심해진다. 아픔을 느낄 줄 모르면 결국 공감하는 능력을 잃게 된다.
- 『신에 대하여』, 한병철
공감과 아픔이 한 몸을 이루고 있으니, 마음을 느끼기 위해선 아픔 또한 느낄 수 있어야 합니다. 실은 아픔이 나의 다정함을 잃어버리지 않도록 보호하고, 내가 여전히 살아있음을 끊임없이 증명하는 거였어요.
아픔을 포기하고 싶지 않습니다. 아픔을 기꺼이 껴안는 일이야말로, 내가 당신에게 닿을 수 있는 유일하고도 정직한 길임을 이제는 알았기 때문입니다.
내 영혼에 깃든 아픔이 결코 헛되지 않았음을, 그 상처의 틈새로 당신이라는 온기가 비로소 스며들었음을 말해주는 칼릴 지브란은 사랑의 이름으로 기꺼이 아파본 자들에게만 허락된 지혜를 빌려 속삭였습니다.
지나친 다정함의 고통을 알게 되기를.
스스로 깨우친 사랑으로 인해 상처받고
그리하여 기꺼이 기쁜 마음으로 피 흘리기를
- 사랑에 대하여, 『예언자』
이제 저는 더 이상 아프지 않기를 기도하지 않습니다. 다만 나의 아픔이 타인에게 닿는 다정한 손길이 되기를, 그리하여 그 길 끝에서 당신의 온기를 기쁘게 마중하기를 바랄 뿐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