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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롱박 Sep 23. 2021

문이 닫히지 않는 집과 초대하는 여자

다락방의미친 여자

오염된 피


  처음 희곡을 쓰기 시작했을 때 나는 아주 흥분해있었다. 내가 쓴 세계가 연극으로 만들어진다니. 황홀했다. 끼니도 거르고 밤을 새워서 글을 쓰는 것이 즐거웠다. 그런데 처음과 다르게 요즘에는 자꾸 머뭇거리게 된다. 내 글의 ‘여성 인물’을 검열하게 되기 때문이다. 나는 “잊혀진 이름을 부르고 싶다”라는 목표로 다양한 여성의 이야기를 쓰려했는데 결국에 내 손에 남는 소녀, 엄마, 성녀, 창녀의 구조에서 벗어나기가 너무 힘들다. 나는 왜 이렇게 되었을까?

  나는 남성이 쓴, 남성이 주인공인, 남성 서사를 읽으며 자랐고 그런 연극을 보며 자랐다. 나는 남자 주인공의 연인 혹은 엄마의 역할을 맡으며 연극을 공부했고 심지어 고등학생이었던 나는 창녀의 노래로 입시 작품을 준비했다. 이런 내가 새로운 여성 인물을 만들 수 있을까? 나의 글 쓰는 피는 무언가에 지독하게 전염되어 있는 것이 분명하다. 새로운 피를 수혈받을 수만 있다면 얼마나 좋을까? 


  생각해 보았다. 남자 인물은 어떤가? 다뤄지지 않은 남자의 이야기가 있기는 한 건지. 어린이부터 노인까지, 성인에서 악인까지 불려지지 않은 이름이 있는가? 

  우리는 남자를 너무 사랑한다. 텔레비전 프로그램만 보더라도 알 수 있다. 미취학 아동인 남자아이들의 귀여운 짓을 관찰 카메라로 보고 그들의 생일에 선물 공세를 한다. 남자 아이돌을 향한 광적인 집착은 말할 것도 없고 잘생기면 잘생겼다고 못생기면 매력 있다고 평범하면 훈훈하다고 좋아한다. 마약을 하고 음주운전을 해도 언제 그랬냐는 듯 돌아와 그 경험을 농담 삼고 불륜을 저질렀어도 ‘연기를 잘하니까 인정’이라며 박수쳐준다. 이혼하고 돌아와도 토닥여주고 혼자 사는 중년 남자의 나이를 개월 수로 계산하며 우쭈쭈 해준다. 

  희곡 속 인물들도 다를 것 없다. 햄릿이 그렇고 오셀로가 그렇다. 보이첵이 그렇고 뜨레플레프가 그렇다. 하나같이 이해할 수 없는 남자들이지만 작가는, 연출은, 배우는, 관객은 최선을 다해 그들을 사랑하고 이해하려 온갖 애를 써왔다. 무슨 짓을 해도 사랑받아온 남자들의 이야기를 나까지 계속할 필요가 있을까? 나는 아무리 애를 써도 지금까지 해 온 것보다 더 사랑해 낼 자신이 없다. 


  뭘 하든, 하지 않든 사랑받아 온 것이 남자라면 여자는 어땠는가? 나만 해도 숱한 여성들을 미워했다. 학창 시절 나는 반에서 소위 ‘논다’는 애들을 미워했다. 룰을 깨는 그들을 미워했고 학생답지 않은 모습을 욕했다. 왜 그 아이들이 그럴 수밖에 없는지에 대한 고민은 없었다. 결혼하지 않은 여자 선생님도 미워했다. 자기 관리가 완벽하고 학생들에게 엄격하며 카리스마 있는 그들을 독하다고 히스테릭하다고 욕했다. 

  성인이 되어서는 남자들이 싫어하는 여자를 따라서 미워했다. 나는 무리에 속하기 위해, 주류가 되기 위해 그들이 미워하는 여자를 욕했고 그들이 미워하는 여자가 되지 않기 위해 무던히 노력했다. 아이를 책임지기 위해 고군분투하는 엄마를 맘충이라고 욕했고 운전을 잘 못하는 사람을 성별에 관계없이 김여사라고 불렀으며 고작 커피 한 잔 사 먹는 여자를 두고 김치녀라고 욕했다. 금발의 미녀들을 멍청하다고 비웃고 꾸미지 않는 여자를 여성스럽지 않다고 욕했다. 시어머니와 며느리의 싸움을 재미있어하며 그 뒤에 숨은 아들과 아버지는 욕할 생각을 못했다. 그리고 그 기준들로 나 스스로를 욕했다. 

  여자들을 미워하지 않는 것에서부터 시작해야 한다고 생각했다. 미워하지 않기 위해선 이해하려는 시도를 해야 할 것이고 그 과정에서 나의 이야기를 찾게 될 것이다. 



문이 닫히지 않는 집과 초대하는 여자 


  내가 한동안 미워한 여자가 있다. 40대 중반인 이 여자는 혼자 살고 있다. 여자의 집은 서울 변두리의 아주 허름한 빌라 1층이다. 외부로 바로 나있는 현관문은 여자가 집에 없더라도 항상 열려 있다. 키우는 고양이가 답답해할까 걱정되어서다. 여자의 집은 발 디딜 곳 없이 물건으로 가득 차 있다. 작은 방은 옷으로 가득하고 큰 방은 침대와 고양이 캣타워, 가구 등으로 그득하다. 부엌이라고 부르기도 힘든 작은 공간에는 커다란 냉장고가 있고 그 안과 주변은 먹을 것들로 가득하다. 작은 찬장에는 그릇과 컵이 넘쳐난다. 주로 저렴한 식기들 사이에는 간간히 값비싼 식기도 섞여 있다. 한 마디로 여자의 집은 구질구질하다.

  여자는 사람을 초대한다. 자주. 처음 만난 사람, 일하다 만난 사람, 선배, 후배 등 그 누가 되었든 초대한다. 지극한 초대를 거절하지 못한 사람들은 여자의 집을 방문하게 되고 그때마다 여자는 그들을 극진히 대접한다. 하지만 구질구질한 파티는 쾌적하지 못하다. 남자의 경우에는 그 초대가 더 길어지기도 한다. 한 잔으로 시작한 자리는 취하고 깊어지고 남자는 기어이 다음 날 아침이 되어야 집을 나갈 수 있게 된다. 그리고 여자는 그런 아침에 만족한다. 여자는 똑똑하고 교육 수준도 높다. 번듯한 직장이 있고 일도 잘한다. 그런 여자는 관계의 중간에 꼭 초대를 끼워 넣는다. 

  이 여자는 풀기 어려운 문제였다. 도대체 왜?라는 질문이 여자의 얼굴에 뜨곤 했다. 커리어도 있고 능력도 되는 성인 여자가 왜 자꾸 관계에 집착하는지 알 수 없었다. 오랜 고민 끝에 ‘친밀한 관계로 자신의 존재를 확인받기 원한다’라는 결론을 내렸다. 40대 중반인 여자는 ‘이성애’와 ‘정상가족’이라는 대한민국의 기준에서 벗어날 수 없었을 것이다. 세상의 틀에 맞지 않는 자신이 불안했을 것이고 그 불안을 이겨내기 위해 비정상적으로 보이는 ‘초대’에 집착한 것은 아닐까? 

  그러고 보니 여자는 ‘오빠’라는 호칭을 좋아했다. 상대가 남자라면 곧장 ‘오빠’라는 호칭을 사용했다. 일로 만난 사이라도, 앞으로 계속 일을 해야 하는 사이라도 상관없었다. 여자는 특히 남자와 관계를 만드는 것을 즐기는 것 같았다. 20년이 넘는 시간 동안 사회생활을 하면서 혼자 살아온 여자는 그동안 이런 이야기들을 들어왔을 것이다. “여자가 그게 뭐니?, 너는 아직 결혼 안 했니?, 남자 친구는 있어?, 혼자 살아?” 여자를 이해하지 못하게 된 건 여자의 탓이 아니다. 


  오늘도 여자는 매일 정성껏 화장을 하고 옷을 골라 입을 것이다. 그리고 구질구질하고 문이 닫히지 않는 집을 나서며 초대할 사람을 만나기 위해 하루를 시작할 것이다. 그리고 나는 그런 여자를 이해하기, 끝내는 사랑하기 위한 글을 써 보려 한다. 



본 프로젝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지원에 선정, 지원을 통해 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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