7p. 17살의 박주영
2001년. 12월 1일
날씨 꾸물꾸물함. 눈 올까? 올리가 없지.
정신없었던 1학년 3반이 이제 슬슬 마무리되어 가는 듯. 물론 아직 기말고사가 남았지만 후다닥 끝내고 나면 방학이다. 고등학생이 되어 처음 만나게 된 우리 1학년 3반 친구들은 정말 하나, 하나 다 보석 같은 도라이들이다. 말도 잘 듣고, 물론 컴싸로 아이라인 그리는 한 둘은 속 썩이기도 하지만 그래도 찬찬히 말하면 다 알아들어 주니까 귀엽기도 하고. 다들 헤어질 생각 하니까. 눈물이 찔끔.
우리 반 같이 단합이 잘 되는 반도 없을 거다. 스승의 날에 담임한테 꿀 한통이랑, 코끼리 팬티 선물해 줬던 건 좀 심했나 싶기도 하다. 근데 어쩔 수 없다. 너무 ‘곰돌이 푸’랑 똑같이 생겼는데 어쩌라고? 그리고 20대 총각 남자 선생님은 놀려먹는 게 전통 아닌가? 전통이라는 얘기 어디서 들은 건지 모르겠지만 암튼 놀려주고 싶었다. 얼굴 빨개져서 화는 못 내면서 버벅거리는 모습이 귀여우니까 됐다. 다른 쌤들이 우리 반한테 적당히 하라고 했는데 뭘 적당히 하라는 건지? 전혀 모르겠다는 말씀.
1학년 생활중에 가장 충격적이었던 건 컨닝 사건이다. 영어 쪽지 시험에서 3명이 컨닝했던 거. 셋 다 공부를 못하는 애들도 아닌데 왜 컨닝을 했던 걸까. 마침 내가 그걸 목격했고 나 말고도 목격자가 또 있었다. 그 세 명한테 이야기한 후에 같이 가서 자수?를 같이 했던거. 그때는 정말 심장이 터질 것 같이 화가 났고 다시는 그 애들 보고 싶지도 않았는데 그 후에 담임이 참 잘 정리해줬던 것 같다.
담임이 컨닝 사건 후에 그랬다. ‘다 함께 정직함과 양심을 회복하기 위해 봉사활동을 가자’고. 3살 이하의 영유아 고아들이 있는 ‘성애원’이라는 곳이었는데 기저귀도 갈고 분유도 먹이고 청소도 돕고 애기들이랑 놀아주고 그랬다. 처음엔 잘못한 건 걔네들인데 나머지 애들이 왜 함께 가야 하는지 알 수 없었다. 불공평하다고 느껴졌다. 근데 처음 다녀온 날 느꼈다. 모성애가 이런 건가? 하는 마음. 물론 내 안에 모성애가 벌써 만들어져 있을지 모르겠지만 모성애는 여자의 본능이라고 하니까. 보송한 아기들을 안아주고 보살피면서 따뜻해지는 마음을 느꼈고 이런 게 모성애? 하는 맘이 들었다. 이제 2학년이 되면 다 흩어지겠지만 봉사활동은 같이 가자고 했다. 1학년 3반 다음 카페를 만들어 두었으니까 거기서 이야기하면 될 거다.
가을에 홍시 장사했던 건 좀 잘못한 일 인것 같다. 근데, 학교에 감나무는 너무 많고 맛있는 홍시는 나무 위쪽에 있고 그건 누가 올라가서 따지 않으면 새들이 먹거나 자연스럽게 바닥에 떨어져서 버려지게 될 텐데? 누군가 나무를 잘 타는 사람이 있다면? 나무 타고 따와서 함께 먹을 수 있게 해 주면? 좋은 일 아닌지? 그리고 노동의 대가로 천 원 정도 받는 게 뭐 그렇게 잘못한 일인지?
아니다 근데 다시 생각해 보면 그 나무가 우리 반 나무도 아닌데 다 털어 먹고 돈 벌어서 피자 사 먹겠다고 한 건 잘못한 거 맞다. 그리고 국어한테 홍시를 팔지 말았어야 했다. 애들한테만 팔 걸. 그게 가장 큰 실수였다고 본다. 우리 반 부자 될 수 있었는데. 너무 아쉽다. 근데, 국어의 그 말은 너무 심했다고 생각한다. ‘반장이 면학분위기 조성은 못하고 애들 선동해서 놀 궁리만 한다.’ 라니. 반장은 안 놀고 싶나? 저거 분명 학생 때 친구 없었지 싶다.
개인적인 변화를 보자면, 성적은 나쁘지 않고, 남자 친구는 없다. 발은 240, 몸무게는 50kg대... 키는 163이 되었다. 지금은 더 컸을 수도 있고. 엄마는 내가 중학교때 보다 살이 더 붙었단다. 아 맞다. 그래서 여름에 코르셋 입고 다녔다. 중학교 친구들 엄마모임이 늘 문제다. 그 엄마들끼리 모여서 이야기하다가 과외선생 찾아서 붙여주고, 장어탕이 좋다 그래서 장어 사다 먹이고, 이번에 코르셋도 엄마들끼리 얘기하다가 딸들 입혀야 해서 다 하나씩 산 것이 분명하다.
근데, 그 코르셋 처음에는 좋았다. 예쁘고. 영화 ‘바람과 함께 사라지다’에 스칼렛 오하라가 입는 코르셋처럼 끈으로 동여매는 건 아니지만, 등에 후크가 10개 넘게 달려 있다. 그리고 원피스 수영복 같이 생겨서 입고 나면 화장실 갈 때 가랑이 사이에 있는 후크 3개를 또 풀어야 팬티를 내릴 수 있는 스타일이다. 엄마는 ‘올인원’ 이라고도 불렀다. 살색이긴 하지만 레이스가 곳곳에 달려서 공주가 입을 것 같은 그런 디자인. 그걸 입고 교복을 입으면 몸이 탄탄하다. 허리가 괜히 꼿꼿하게 세워지는 느낌. 자세도 바르게 걷게 되고 긴장되고. 엄마는 몸이 마음대로 자라지 않고 예쁘게 자라도록 도와줄 거라 하셨다. 그리고 여자가 가슴이 너무 크면 무식해 보인다고 가슴도 덜 크게 해 줄 거라고. 가슴 큰 건 불편하긴 하다. 뛸때도 그렇고 남들이 쳐다보는 것도 싫고. 근데 이거 입으면 더 안크는 게 맞는지? 가슴은 유전 아닌지? 엄마가 거울 좀 보셨으면 하는 마음이 들긴 했지만. 일단 시키는 대로 했다.
처음엔 애들한테 자랑도 했고 좋았다. 근데 처음 이틀 정도만 괜찮았지 그 후는 지옥이었다. 덥고 가렵고. 특히 가랑이 닿는 부분 팬티 끝이랑 겹쳐지는 부분이 너무 가려웠다. 며칠 입고 다니다가 온몸에 땀띠가 너무 생겨서 그 후로는 엄마가 절대 입지 말라고 했지만 지금 와서는 다시 입어볼까 생각도 든다. 2학년 되고 3학년 되면 공부하느라 앉아 있어야 하는데 그거라도 입고 있으면 몸이 정돈되지 않을까? 뭐든 익숙해지면 편해질 텐데. 좀 참다 보면 그 코르셋도 익숙해질 지 누가 알아? 그리고 실제로 그걸 입고 있으면 안정감? 같은 게 느껴지기도 한다.
아무튼, 1학년 때는 내가 아직 중학생 티를 덜 벗어서 애 같은 면이 많았을 수 있다. 정말 실컷 놀았다. 애들도 다 좋았고 말도 잘 들어줬고. 목표로 했던 것들 중에 이루지 못한 건 없는 것 같다. 다 이루었다.
아, 남자 친구 사귀는 거 빼고... 남자를 볼 일이 없는데 다들 어떻게 만나는 건지? 서전학원 남자애들은 다 못생겼고 어렸을 때부터 알고 지내던 애들은 진짜 애들인데 다들 어떻게 만나고 사귀는 거지? 알 수가 없다. 나는 드라마 학교에 나오는 공유 같은 남자애 만나고 싶은데. 현실에 그런 고등학생 없음. 그러니까 내가 ‘남자 친구 사귀기’ 목표를 올해 이루지 못한 건 내 탓이 아니다. 세상에 사귀고 싶은 남자애가 없어서 그렇다. 그래도 목표 달성에 실패한 건 속상하군.
2학년이 되면 공부도, 신체적으로도, 남자 사귀기도 다 성공하고 말겠다. 그리고 조금 더 꿈을 찾아가는 내가 되어야지. 이렇게 연말 기분에 이것저것 생각하고는 있지만 기말이 남았다. 역시 시험기간에는 뭐든 재밌지요? 어휴. 이제 공부해야지.
본 프로젝트는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추진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1년 아동·청소년 대상 예술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된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