12p. 19살의 박주영
2003년. 12월 31일
따뜻한 겨울.
학원에 다녀오는 길에 그런 생각이 들었다. 20살까지만 살고 싶다는 생각.
친구들한테 말하면 무슨 개 같은 소리냐고 하겠지만, 그게 정말 멋있을 것 같다.
오늘 학원에서 지정 연기랑 특기 연습을 하고 수업도 듣고 동국대 모의고사도 봤다. 곽쌤이 오늘 애들 다 있는 앞에서 "주영이 수능만큼 나와야 동대, 경희대 넣는 거야."라고 얘기하셨다. 애들이 질린 듯한 표정을 지었지만 나는 그러려니 했다. 그리고 문득 엄마 얼굴이 떠올랐다. 제발 가나다군 중 하나는 인문계로 넣으라고 하시던 엄마. 엄마는 왜 아직도 나를 이해하지 못하는 걸까. 나는 그냥 대학이 가고 싶은 게 아니고 연극영화과를 가고 싶은 건데. 연극영화과가 아닌 대학을 가고 싶은 마음이 전혀 없다는 걸 왜 아직도 이해 못하시는 걸까. 아니 안 하시는 거겠지. 19년 통틀어서 요즘이 가장 엄마 맘에 안 드는 딸일 거다.
오늘 특기 수업시간에 '지킬 앤 하이드'의 넘버 중에 'someone like you'를 불렀다. 사실 종합 연기로 오래 연습하긴 했지만 수업시간에 단독 발표는 처음이었다. 곽쌤이 오늘 보시고 특기 확정한다고 하셨으니 나는 조금 더 힘을 들여 발표를 준비했다. 하늘하늘 치마도 입고 약간 타이트한 상의로 입시 의상을 딱 입고 발표했다. 노래는 힘이 들어가서 그런지 조금 불안했던 것 같지만 전체적으로 나쁘지 않다고 생각했다. 다른 애들 반응도 좋았고. 그래서 평가 시간을 기다리고 있었는데... 곽쌤이 앞으로 나와 보라며 애들 앞에 날 세웠다. 그리고는 한 바퀴 돌아보라고. 나는 의상까지 준비해 온 나를 칭찬해 주시려나 했다. 수능성적 이야기처럼 늘 곽쌤은 나를 칭찬해 주셨으니까. 그런데 아니었다.
"주영아. 니는 가슴이 너무 큰 것 같다. 무식해 보이잖아. 좀 다른 옷 없나?"
홀딱 벗겨지는 기분이었다. 나도 늘 싫었다. 뭔가 우람해 보이는 내 몸 구석구석이, 울룩불룩한 몸의 실루엣이 늘 싫어서 감추고 싶었다. 그런데 입시 작품 준비는 정말 '나 자신'을 드러내고 전력으로 부딪혀 보고 싶었다. 평소라면 입지 않을 타이트한 옷에 하늘하늘 치마까지 준비한 건 그런 이유에서였다. 그리고 '루시'는 술집 접대부다. 인물을 잘 표현하기 위해서 나쁘지 않은 선택이라고 생각했다.
그런데 그런 이야기를 듣다니. 내 노력들이 결국 다 헛짓거리였다는 생각이 들면서 얼굴이 활활 타오르는 듯했다. 순간 증발해서 사라져 버리고 싶은 기분이었다. 하지만 그럴 수 없지. 나는 발을 붙인 채 서 있었다. 그 많은 입시반 애들 앞에.
나는 왜 이따위 몸을 갖게 된 걸까. 살도 많고 뼈도 두껍다. 죽을 때까지 '엠마'를 할 수 없는 체형을 갖고 있고 겨우 '루시'를 할 수 있어도 예쁜 몸은 아닌 거다. 머리카락도 자기주장이 너무 강해서 가르마도 맘대로 못 타고 눈은 살짝 올라가서 꼴 보기 싫다. 처진 눈이 순해 보이고 좋은데 가로도 너무 좁다. 앞 트임 뒤트임을 하고 나면 겨우 괜찮은 눈이 될까? 쌍꺼풀도 너무 애매한 두께다. 예쁘지도 않고 부담스럽다. 피부도 안 좋다. 우리 반에 매일 옥상에서 담배 피우는 민정이는 하얗고 뽀얀 피부를 가졌는데 나는 영 엉망이다. 내가 딱히 피부에 해가 될 일을 한 것도 없는데 왜 그럴까. 코는 말할 것도 없다. 작고 오뚝한 코를 갖고 싶은데 왜 나는 코마저 우람할까. 입매도 안 예쁘고 입술 색깔도 별로다. 뭘 발라도 잠깐이고 금방 거무죽죽한 색이 되는 것 같다. 진짜 싫다. 얼굴 이미지가 호감이 아닌 것 같다. 그러니 여자 주인공 역은 내가 맡기 힘든 거다. 여자 주인공은 주로 호감 가는 소녀가 많으니까. 아니면 나이 든 역할인데 나는 아직 20살도 안 된 핏덩이니까 나이 든 역할을 진심으로 해 낼 수 없지. 이도 저도 못하는 인간이 된 기분이다. 아니, 쇄골뼈도 위로 솓았다. 여배우 쇄골은 일자라는데 나는 왜? 팔도 길어서 가끔 징그러울 지경이고 손가락도 진짜 못생겼다. 손톱도 뭉툭하고 손바닥 자체가 두꺼워서 야리야리한 느낌이 전혀 나지 않는다. 그러니 연기할 때 손 끝으로 하는 표현들이 두루뭉술할 수밖에. 가슴이 큰 것도 진짜 싫다. 어렸을 때 엄마 말을 들었어야 했다. 그 코르셋을 3년간 입었으면 몸이 더는 자라지 않았겠지? 그럼 좀 작은, 부담스럽지 않은 가슴을 가질 수 있었을 텐데 나는 무식해 보인다. 멍청해 보이고. 사람이 퉁명스러워 보이게 하는 가슴을 갖게 되었다. 진짜 싫다. 오늘은 정말 이 가슴을 칼로 숭덩 썰어내고 싶었다. 골반뼈도 크다. 그러니 다리도 두꺼운 느낌. 매일 변기에 앉을 때마다 손으로 허벅지를 쓸어내려본다. 양 손으로 밀린 부분만큼이 삭제되면 좋겠다고 매일매일 생각한다. 필요 없는 몸이 너무 많다. 너무 많이 붙어 있다. 몸이. 삭제하고 싶다. 전부. 그리고 처음부터 다시 만들고 싶다. 어떤 역이든 맡을 수 있는 멋진 배우의 몸으로 다시 만들고 싶다. 하지만 이미 늦었지.
곽 샘은 나를 세워놓고 이런저런 평가들을 하셨다. 발표에 대한 것들은 칭찬이 많았지만 내 머릿속에는 계속 '무식해 보인다'만 돌고 또 돌았다. 무식해 보이면 안 되는데. 배우가 무식해 보이면 무슨 메리트가 있어. 그리고 계속 생각했다. 동국대나 경희대는 전국에서 가장 연기 잘하는 애들이 모이는 곳일 텐데, 내 연기실력이 그 아이들과 비슷하다 하더라도 예쁘지 않은 내가, 무식해 보이는 몸을 가진 내가 그 아이들과 경쟁해서 합격할 수 있을까? 만약 합격하더라도 그 아이들과 내가 학교를 다니면서 얼마나 절망하고 좌절하게 될까?
그래서 죽고 싶다는 생각이 들었다. 지금 말고 20살이 되면. 성인이 되고 대학에 합격하면 아마도 그 이상의 성취감과 행복은 내 인생에 더는 없을 것 같다. 물론, 대학에 합격한다면-이지만. 어찌어찌해서 그 지독한 입시를 이겨내고 나면 그래서 기쁨을 맘껏 느끼고 나면 그 이후의 나에게는 절망, 절망, 절망뿐일 거라는 생각이 들었다. 정말로 그렇겠지. 아무리 노력해도 나는 '연기는 잘 하지만 못생긴 여자 배우'가 되어서 20대 부터 할머니 역할이나 하다가 평생 주인공 한 번 못해보는 배우가 될 거다. 절망 뿐인 삶이 이어질 거다.
그러니 20살이 되어 대학생이 되면 날씨 좋은 어느 날을 골라서 곱게 떠나야지. 남겨질 사람들이 좋은 날에 나를 떠올릴 수 있게 좋은 날을 골라 가야지. 연기 잘하는 미래가 창창했던 나로 마무리 지어야 한다. 꼭.
그런데 그것도 대학을 가야 할 수 있는 일이다. 이딴 생각 할 시간에 발음 연습이라도 한 번 더 하면 대학 갈 수 있을까. 오늘 밤에는 러시아 희곡을 읽고 자야겠다. 외모는 내가 어찌할 수가 없지만 그래도 실력은 어떻게든 해 볼 수 있다. 아직은.
내일이면 20살이 된다. 죽을 수 있는 가장 큰 조건 하나가 채워진다. 그다음 조건은 대학 합격. 해 보자. 쉽지 않겠지. 그리고 아마 안 될 수도 있다. 그럼 못 죽는 건가? 아니 또 방법은 있겠지. 그건 그때 가서 생각해 보자. 일단은 대학! 대학을 가야 한다. 죽기 위해서!
본 프로젝트는 문화예술진흥기금으로 추진되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의 2021년 아동·청소년 대상 예술 활성화 지원사업에 선정된 프로젝트입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