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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담다디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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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요롱박 Nov 29. 2021

<같이 있자고 했잖아>

다락방의 미친 여자 

등장인물 

다정 : 40대 중반 여자. 혼자 살고 있다. 

성현 : 20대 후반 남자. 다정의 회사 신입.


저녁


다정의 집 



1.  좋아해?


무대는 다정의 집. 발 디딜 틈 없다. 작고 협소한 공간에는 벽이 보이 않을 만큼 물건들로 가득하다. 거실 겸 부엌이 왼편에 놓여있고 뒤쪽으로는 화장실 문이 있다. 벽을 사이에 두고 오른편에는 작은 방이 있다. 

집은 어둡다. 아무도 없다. 아무런 소리도 들리지 않는다. 잠시. 


도어록 누른 소리가 들리고 다정이 들어온다. 단정한 긴 플레어 치마를 입고 두꺼운 재킷을 입었다. 다정은 현관에 들어서자마자 바닥에 주저앉아 신고 있던 롱부츠를 벗으려 애쓴다. 겨우 한쪽을 벗고 가만히 기다린다. 닫힌 방문 안 쪽에서 고양이 울음소리가 난다. 


잠시 후 발소리가 나고 성현이 쭈뼛거리며 들어온다. 손에는 노트북 가방과 편의점 봉투가 들려있다. 성현은 면바지와 셔츠, 재킷을 입고 있다. 


다정 : 응 왔어? 왜 이렇게 오래 걸렸어. 

성현 : 저, 선배님 따라서 바로 온 건데...

다정 : 그건 여기 내려놓고 나 도와줘. 

성현 : 네?

다정 : 이 부츠. 너무 안 벗겨져. 


다정은 부츠가 신겨진 한쪽 발을 성현에게 내민다. 


성현 : 당겨 드려요?

다정 : 응. 당겨봐. 혼자 벗으려면 한참 걸리거든. 도와줘. 


다정이 성현을 향해 발을 까닥, 한다. 성현은 마지못해 다정의 부츠를 두 손으로 잡는다. 


다정 : 응, 잘한다. 그렇게 굽 쪽을 잡고 각도를 조금만 올려봐. 그래, 그렇게 당겨봐. 더, 더 세게.

성현 : 이게, 왜 이렇게, 아!


부츠가 벗겨지며 성현이 뒤로 넘어진다. 쿵. 현관문에 부딪히는 소리가 크게 난다. 

그 모습을 보며 다정이 웃음을 터트린다. 


다정 : (웃으며) 성현, 무슨 남자가 그렇게 힘이 없어. 나 아무 짓도 안 했다? 자기가 혼자 넘어진 거야 맞지? 괜찮아? 안 다쳤어? 근데 방금 자기 넘어질 때 표정이 정말 엄청났어. 이걸 봤어야 하는데. 

성현 : (엉덩이를 만지며) 대단하네요. 부츠... 발목 괜찮으세요?

다정 : 자기는 괜찮아? 너무 웃어버렸네. 미안해. 고마워. 다친 데 없어?

성현 : 괜찮습니다. 들어가시죠. 

다정 : 그래, 그러자


다정은 손등을 위로 한 체 성현에게 손을 내민다. 성현은 무의식 중에 그 손을 잡아 준다. 


다정 : 땡큐.


다정은 집으로 들아간다. 성현도 따라 집으로 들어간다. 거실은 어지럽다. 성현이 집 안을 둘러보는 사이 다정은 오른편에 있는 방으로 들어간다. 성현에게는 목소리만 들린다. 다른 방 문 안에서 고양이 소리가 난다. 성현은 냉장고에 편의점에서 사 온 맥주를 채워 넣는다.


다정 : (방 안에서 옷을 갈아입으며) 거기 식탁에 앉아있어. 손부터 좀 씻고. 싱크대에서 그냥 씻으면 돼. 화장실은 뒤쪽에 있는데 우리 집 세면대가 없거든. 며칠 전에 깨졌어. 

성현 : 세면대 가요? 왜요?

다정 : 응, 어쩌다가 깨졌어. 

성현 : 어쩌다가요?

다정 : 응, 어쩌다가. 


다정이 옷을 갈아입는 옷 방에는 커다란 거울이 있다. 다정은 그 앞에서 옷을 갈아입는다. 입고 있던 옷을 모두 벗고 속옷 차림이 된다. 거울에 자신의 몸을 비춰본다. 그러고는 옷걸이에 걸어놓은 면 원피스를 꺼내 입는다. 집에서 입는 원피스지만 제법 몸매가 드러난다. 가슴이 많이 파여 다정의 가슴골이 보인다. 옷을 다 입은 다정이 거울에 자신을 비춰본다. 표정을 지어본다거나 자세를 바꿔본다거나 하지 않는다. 멀뚱히 서서 거울 속 자신을 잠시 바라본다. 그리고는 곧장 거실로 나온다. 


다정 : 많이 기다렸지? 

성현 : 아니에요. 괜찮습니다. 

다정 : 자, 그럼 시작해 볼까. 차 마실래?


다정은 냉장고를 열어서 맥주캔을 꺼낸다. 


성현 : 차... 는 괜찮아요. 

다정 : 그렇지? 맥주가 낫지? 한 잔 하면서 보자. 켜봐 노트북. 

성현 : 네. 


성현이 노트북을 켜고 다정을 본다. 다정은 식탁 의자를 바짝 당겨 성현의 옆에 앉는다. 성현이 앉은 의자의 등받이를 잡고 어깨동무를 한 것 같은 자세가 된다. 


다정 :  보자. 이거 열어봐. 그래, 여기 이 부분. 이런 경우에는 센터에 두는 것이 낫지 않을까? 아주 미세한 조정이긴 하지만 잘 모르겠을 때는 정석으로 가는 게 답이야. 자기야. 이런 것도 그래, 내가 가장 기본적인 폰트로도 충분히 만들 수 있어야 한다고 늘 이야기했잖아. 봐 봐. 여기도 그래, 샘플 문구가 쓰여야 할 부분이잖아. 그게 없으면 전체 그림을 볼 수가 없다고 했어 안 했어? 샘플 문구도 의미가 있는 것들 말고 지난번에 내가 줬던 레퍼런스들 안 본 거야? 왜 이렇게 일을 두 번 하게 만들지? 이리 줘봐. 


성현은 말 한마디 하지 못하고 다정의 리드에 끌려간다. 다정은 성현의 노트북을 가져가서 이리저리 만진다. 디자인 프로그램의 단축키를 능수능란하게 사용하는 손 끝이 제법 야무져 보인다. 


다정 : 봐. 어때? 이게 이거랑, (키를 누른다) 이거랑. 어때 보여? 어느 쪽이 더 포멀해?

성현 : 처음 것이 훨씬 좋네요.

다정 : 그렇지? 그래서 내가 오늘 피티 들어가기 전에 나랑 이야기하고 들어가랬더니 왜 말을 안 듣고, 

성현 : 제가 너무 긴장해서 그랬어요. 

다정 : 그러니까. 바보야 정말. 

성현 : 그럼, 선배님 이건 어떻게 하는 게 좋을까요. 저는 전체 레이아웃을 조정하는 건 힘들 것 같아서, 

다정 : 이리 줘봐.


다정이 성현의 노트북을 붙들고 잠시 무언가를 만진다. 

성현은 모니터를 바라보며 만족해한다. 


다정 : 봐, 이렇게 하면 간단하잖아. 여기 필요한 텍스트들 다 넣고. 시안은 시안용으로 다시 만들고. 

성현 : 텍스트도 넣는 형식이 다양해서 저는 늘 고민되더라고요. 

다정 : 어디 있어 필수 텍스트? 여기야? 이거네. 보자. 글자 수가 많네. 이럴 땐,

성현 : 시안용으로 만들 때 확장자 명은 평소랑 똑같이 하면 될까요?

다정 : 시안이 웹용이냐 인쇄물이냐에 따라 다르지. 그런 것 까지 설명해 줘야 해? 줘봐, 

성현 : 여기 끝 부분도 늘 고민이 돼서 

다정 : 이건 이렇게 돌려서 하면 되잖아. 봐. 자기 정말 아무것도 혼자 할 줄 아는 게 없네?

성현 : 그럼 전체적으로 톤 앤 매너를 다시 잡을 필요가 없던 거네요?

다정 : 그렇게 해 왔어? 그게 무슨 멍청한 짓이야. 줘봐. 

성현 : 선배님 그럼 이건, 

다정 : 줘봐. 

성현 : 이럴 때는 그럼,

다정 : 줘봐. 


다정이 모니터를 들여다보고 일한다. 성현은 팔을 뻗어 다정이 앉은 의자의 등받이에 손을 올린다. 어깨동무를 한 듯한 자세가 된다. 성현은 일하는 다정을 훑어본다. 머리 끝부터 발 끝까지. 모니터를 두드리는 소리만 들린다. 방 안에서 고양이 소리가 들린다. 


잠시 


다정 : 다 됐다. 이제 알겠지? 생각보다 손이 많이 가네 자기. 

성현 : 그러게요. 고마워요. 


두 사람 말없이 서로를 오래 바라본다. 성현이 눈을 내려 다정의 가슴을 보려는 순간 다정이 성현에게 키스한다. 


성현 : 선배, 왜 이래요. 

다정 : 좋아해?

성현 : 뭘요?

다정 : 이런 거. 난 좋아하거든. 하자. 

성현 : 네?

다정 : 안 좋아해? 거짓말하지 말고. 

성현 : 싫어하지는 않는데, 지난번에 말씀드렸잖아요. 저 이러려고 여기 오는 거 아니라고. 

다정 : 나도 알아. 그런데, 어쩌다 보면 그렇게 되는 거잖아. 

성현 : 또 이러시네. 제가 이래서, 

다정 : 이래서 뭐?


다정이 다시 성현에게 키스하려 한다. 


성현 : (화를 내며) 아 선배. 그만하시라고요. 

다정 : 너무하네.

성현 : 뭐가요?

다정 : (웃으며) 내가 다 해줬잖아 방금. 네 일. 너무 어설퍼서 아무것도 모르겠다는 표정으로 일 망치고 앉아 있는 거, 내가 하나부터 열까지 다 손 봐줬잖아. 그럼 고마운 줄 알아야지. 건방지게.

성현 : 하 진짜. 말 좆같이 하네. 

다정 : 뭐?

성현 : 말 좆같이 한다고요. 좆같은데 다 맞는 말이네요. 맞네요. 선배가 다 해줬지. 고마워요. 그럼 한 번 해 주면 되는 거예요? 어떻게?


잠시 


다정 : 어.

성현 : 이런 거 좋아한다 그랬죠. 뒤끝 없는 거죠? 오늘 하고 끝인 거예요. 

다정 : 그래. 대신 자고 가. 내일 가. 같이 있자. 

성현 : 그건 하는 거 봐서요. 

다정 : 어떻게 하면 되는데?

성현 : 어떻게라... 


성현이 의자에서 일어나 선다. 다정의 얼굴 가까이에 바짝 다가선다. 성현의 하체가 다정의 눈앞에 있다. 성현이 다정의 머리 위에 손을 올린다. 


성현 : 나는 이런 거 좋아해요. 괜찮겠어요?


잠시


다정 : 그래.


성현이 식탁에 다리를 벌리고 걸터앉는다. 그 사이에 다정이 들어가 앉는다. 다정이 큰 소리로 외친다. 


다정 : 아-


더 이상 뱉을 숨이 없을 때까지 큰 소리로 외친다. 숨이 다 되면 다시 큰 숨을 쉬고 외친다. 반복한다.


다정 : 아- 


성현의 표정은 미묘하다. 찌푸린 얼굴이 우는 것 같기도 겁먹은 것 같기도 하다. 한 동안 다정의 소리가 이어진다. 시끄럽고 크다. 고통스럽다. 




2. 같이 있자고 했잖아. 


만족한 표정의 다정이 식탁의자에 앉아 있다. 변기 물 내리는 소리가 나고 화장실에서 성현이 나온다. 


성현 : 세면대가 박살이 났네? 

다정 : 응. 어쩌다가 그랬네. 

성현 : 선배가 그랬어요?

다정 : 내가 그랬겠지. 

성현 : (웃으며) 힘 세구나?

다정 : 응.

성현 : 그래서, 해 주는 김에 하나만 더 해줄래요?

다정 : 뭔데?

성현 : 다음 주까지 마무리해야 하는 시안이요. 아니 최종본이던가? 좀 봐줘요. 

다정 : 오늘 내가 너한테 시킨 거?

성현 : 네. 같이 하는 거지. 이렇게. 

다정 : 그래. 

성현 : 쿨하시네 우리 선배. 고마워요. 그럼, 

다정 : 밥 먹을래?

성현 : 밥이요? 이 시간에요? 좀 배고프긴 한데 (주위를 둘러보며) 밥 까지 먹을 건 아닌 것 같네. 

다정 : 그럼 쉬어. 나도 금방 들어갈게. (왼쪽 닫힌 방 문을 가리킨다)

성현 : 쉬어요? 왜요? 저 갈 거예요. 

다정 : 간다고?

성현 : 네. 여기서 택시 타면 집까지 금방이에요. 잠은 집에서 자야지. 내일 출근도 해야 하고. 

다정 : 간다고? 

성현 : (웃으며) 아 왜 이러실까. 네, 저 집에 가 볼게요. 


성현이 노트북을 챙기고 겉옷을 입는다. 다정은 그 모습을 꼿꼿하게 굳은 채 바라본다. 


다정 : 갈 거야?

성현 : 어쩌라고?

다정 : 같이 있겠다고 했잖아. 

성현 : 제가 언제요. 다음에, 다음에 해요. 오늘은 너무 피곤하네. 


다정이 나가려는 성현의 앞을 가로막는다. 


다정 : 가지 마. 같이 있어. 

성현 : 왜 이래요 진짜. 

다정 : 같이 있자. 아무것도 안 할게. 그냥 밤에 같이 있어줘. 

성현 : 미치겠네. 선배, 그만해요. 추해. 여자가 이러는 거 아니야. 

다정 : 같이 있자. 있어줘. 밤 동안만. 내가 다 해줬잖아. 

성현 : 무섭다. 저 가요. 내일 회사에서 봐요.


성현이 다정을 밀치고 나가려 하는데 다정이 성현을 붙잡고 늘어진다. 


다정 : 안돼. 절대 못가. 같이 있어야 해. 

성현 : 무섭게 왜 이래요. 이거 놔요. 

다정 : 제발 같이 있어줘. 제발. 

성현 : 시발 진짜. 


두 사람 엉겨 붙어서 몸싸움을 한다. 다정의 원피스가 성현의 손에 당겨져서 엉망이 된다. 마침내 성현이 다정을 거칠게 밀어낸다. 다정은 바닥에 넘어진다. 


성현 : 회사에서 조금이라도 냄새 풍기면 죽는다 진짜. 너 그동안 싸게 굴고, 남자들한테 대주고 다니는 거 사람들 다 알아. 네가 피해자인 척하기만 해. 아무도 네 말 안 믿어 줄 거니까. 뭐 이딴 게 다 있냐 진짜. 더러운 년. 


성현이 돌아서 나가려는 순간, 다정이 옆에 놓인 화분으로 성현의 머리를 친다. 화분이 깨어지고 성현이 쿵 소리를 내며 바닥에 쓰러진다. 잠시.


다정 : 같이 있자 좀. 


다정은 미동 없는 성현을 내려다본다. 잠시. 

성현의 다리를 잡고 끌어 왼쪽 방으로 들어간다. 방에서 고양이 한 마리가 뛰어나온다. 고양이 울음소리. 


창문 덜컹거리는 소리가 난다.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현관문 센서등이 켜졌다 꺼진다. 


다정이 방 문 앞에 선다. 모든 소리와 불빛이 멈춘다. 

다정이 방 밖으로 한 발 나온다. 

창문 덜컹거리는 물방울 떨어지는 소리가 난다. 현관문 센서등이 켜졌다 꺼진다. 

다정이 방 문 앞에 선다. 모든 소리와 불빛이 멈춘다. 다정은 문턱에 쪼그리고 앉는다. 


다정 : (방 안을 향해) 거봐. 내가 같이 있자고 했잖아. 


고양이 울음소리가 들린다. 고양이가 현관 앞에 앉아 그루밍을 하고 있다. 


다정 : 왜 딸? 나가고 싶어? 안돼 밖은 위험해. 집에 있자. 같이 있자. 




본 프로젝트는 한국문화예술위원회 공연예술창작산실 창작실험활동지원에 선정, 지원을 통해 제작된 프로젝트입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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