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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July Choi Jan 18. 2022

일의 기쁨과 슬픔 - 알랭 드 보통

우리 대부분은 찬란한 성취의 가장자리에 자리를 잡고 서서, 목표에 가까이 다가온 것은 맞지만 아직은 저편이 아니라 분명히 이편에 서 있으며, 사소하지만 핵심적인 여러 가지 심리적 결함(약간 지나친 낙관주의, 날 것 그대로 나타나는 반항심, 치명적인 인내심 부족이나 감상주의)으로 인해 현실을 제대로 다루지 못한다는 사실 때문에 괴로워한다. 우리는 아주 작은 부품이 없어 활주로 옆에서 꼼짝도 못하는, 그래서 결국은 트랙터나 자전거보다도 더 느린 존재가 되어버린 첨단 비행기와도 같다. 


나는 시먼스의 회사를 나오면서, 모두가 일과 사랑에서 행복을 발견할 수 있다는 너그러운 부르주아적 자신감 안에 은밀하게 똬리를 틀고 있는 배려 없는 잔혹성을 새삼스럽게 깨달았다. 그 두가자에서 절대 충족감을 얻지 못한다는 이야기가 아니다. 충족감을 얻는 경우가 극히 드물다는 뜻일 뿐이다. 예외가 규칙으로 잘못 표현될 때, 우리의 개인적 불행은 삶에 불가피한 측면으로 받아들여지는 것이 아니라, 특별한 저주처럼 우리를 짓누르게 된다. 부르주아 이데올리가는 인간의 운명에서 갈망과 오류를 위해 마련된 자연스러운 자리를 부정하며, 우리가 경솔하게 결혼을 하고 야망을 실현하지 못한 것에 대해 집단적인 위로를 받을 가능성을 부인해버린다. 그 결과 우리는 어떻게 해도 진정한 나 자신이 되지 못하는 상황에서 나 혼자만 박해와 수모를 당한다는 느낌에 사로잡힐 수밖에 없다.

- [직업 상담]



엔지니어의 간결성이 적용되어 이익을 볼 수 있는 감정의 예는 부족하지 않은 것 같았다. 가령 특별히 좋아하지도 않는 사람들에게서 사랑을 이끌어내고자 하는, 이따금씩 생기는 이상한 욕망을 우아하게 암시할 수 있는 기호가 있으면 얼마나 좋을까(이것을 &라고 해두자). 자신의 병을 두고 친지가 자신보다 더 걱정하는 것처럼 보일  때 느끼는 짜증은 w라고 할까. 또 가끔 삶의 다양한 시기가 동시에 공존하는 듯한, 그래서 어렸을 때 살던 집에 돌아가기만 하면 아무도 죽지 않고 아무것도 변하지 않을 채로 모든 것이 옛날 그대로임을 확인할 수 있을 것 같은 막연하기 짝이 없는 느낌은 $라고 해보자. 이런 표기 체계를 갖고 있다면 일요일 오후면 느끼곤 하는 그 제멋대로 둥둥 떠다니는 노스탤지어와 불안을 압축해서 모호한 구석이 전혀 없는 명료한 수식(&+w+$x2)*으로 표현할 수 있을 것이고, 그러면 아무 도움 안 되는 투덜거림만 늘어놓기 십상인 주위의 친구들한테서도 공감과 동정을 끌어낼 수 있을 텐데.

- [송전 공학] 



위대한 예술 작품은 어떤 것을 깨우치는 특성이 있다. 예를 들어 바람 없는 뜨거운 여름 오후 떡갈나무의 서늘한 그림자. 초가을 잎의 황금빛을 띈 갈색. 기차에서 스쳐가며 본, 묵직한 잿빛 하늘을 배경으로 윤곽으로만 서 있는 헐벗은 나무의 어떤 금욕적인 슬픔. 동시에 그림은 우리 정신의 잊고 있던 측면들과 신비하게 결합될 수 있다. 우리는 나무에서 말로 표현하지 못했던 갈망을 발견하고 놀라기도 하고, 여름 하늘의 아지랑이 색조에서 사춘기의 자아를 발견하기도 한다. 

- [그림]


*본문의 기호를 찾지 못해 다르게 표기했습니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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