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서울여자가 제주여자'에게 보내는 두번째 편지 (일)
로사야. 늘 불안하단 그 일 잘하고 왔지? 일은 참 희한하지 않냐. 공기나 밥처럼 항상 함께해야 할 것 같다가도 어느 순간 없어져버렸으면 좋겠어. 다 때려치우고 싶단 생각이 스멀스멀 올라와서 막상 뻥 차 버리면 시련당한 사람처럼 '그래도 이런 건 좋았는데... 좀 참을 걸 그랬나... 왜 이렇게 하루가 길고 허전하지...' 궁상을 떨다 새 연인을 찾듯 다시 일을 찾고 또 함께 살아가려 무던히 애를 쓴다.
너도 나도 20년 가까이 꾸준히 일했구나. 서른 가을에 퇴사를 하고, 새해까지는 취직하지 않고 쉴 거야 선포했지만... 너무 불안하고 일해야 할 것 같아 11월에 취직을 했던 못난 기억이 난다. 너에게도 몇 번 말한 적 있지만 난 학생 때 범생이였거든. 그땐 누가 내 머릿속에 그 생각을 심은 게 아닌데도 난 공부해서 대학에 가야 하고, 대학을 졸업하면 회사에 다녀야 한다는 모범 답안 같은 생각이 있었어. 지금 딸을 낳아보니 아이에게 이런 생각이 들게 한다는 게 엄청난 숙제처럼 느껴지는데, 그때 난 저런 생각을 왜 그렇게 당연한 듯했나 몰라. 지금처럼 일과 직업의 다양성이 없던 시절이라 그랬나? 여하튼 그렇게 공부해서 대학에 갔고 영화판에 취직을 했지. 사람들이 '좋아하는 건 직업으로 삼는 게 아니야' 했는데 그 말을 뼈 끝까지 실감하며 두 날개를 다 불태운 나방처럼 너덜너덜 영화판에서 빠져나왔다. 그렇게 30대를 맞이하며 30대의 나는 더 이상 건강도, 돈도, 시간도 열정으로 덮으며 일하지 않겠다는 일념으로 지금의 회사, 늘 네가 놀리는(?) 대기업 다니는 여자가 되었다.
니 말대로 누가 물으면 난 외계인 처럼 "전 일하는거 좋아해요" "일이 재밌어요"라고 대답했는데. 대체 난 왜 때문에 그런 대답했던거냐? 일 자체가 맘에 든다는 것일까? 아니면 일하는 내 모습이 맘에 든다는 것일까? 그것도 아니면 일해서 버는 돈이 좋은걸까? 생각해보니 "일 좋아해"라고 쉽게쉽게 대답하면서도 진지하게 내가 하는 일에 대해 생각해본적이 없는 것 같다. 이 대답도 범생이처럼 일을 하면 그 일을 좋아해야한다는 나의 틀에 박힌 사고방식에서 나온걸지도 몰라. 여튼 지금까지는 그래도 애정을 담아, 직업 의식을 가지고 누가 보든 안보든 열심히 일한건 확실하니 그게 일 자체든, 일하는 나 자신의 모습이든, 일을 통해 버는 돈이든 다 괜찮은 것으로! (여기까지는 워킹맘이 되지 않는 직장러의 일기같은 거라면...)
이 문장을 쓰는데 큰 돌덩어리들이 키보드 위에서 와르르르 떨어지는 느낌이 드네. 내일부터 아이 어린이집이 폐업을 해서일까... 로사야 일단 워킹맘이 되자나? 그럼 지금 내 일이 좋고 싫고, 맞고 안맞고의 고민은 두번째야, 일을 계속 할 수 있냐 없냐는 생존의 문제가 첫번째가 된다. 그 다음은 일을 한다고 결정 했을 때 넝쿨째 딸려오는 세트가 있어. 미안함, 눈치, 바쁨, 부족한 슬픔, 그리고 뭘 하고, 뭘 포기할지에 대한 선택까지 워킹맘 '일할꺼야 패키지'가 기다리고 있다. 정말 말 그대로 워킹 + 맘이야. 일을 하지만 엄마의 역할을 해야하고, 엄마의 역할을 하면서 일도 해야하지. 둘 중 뭐에 무게를 두고 사느냐에 따라서 어떤 엄마로, 어떤 직장인으로 살지가 결정된다. 둘 다 잘 한다면 좋겠지만 실제로 그런 슈퍼맘은 거의 없었어. 다들 힘들어했지. 어느 한쪽은 삐걱 거렸어. 결국 일을 그만두는 친구도 있었어. 그녀들은 떠나면서 말했지. 뭐가 중요한지 생각해보았다고. 나 이 말 왜 슬픔?
내가 미혼이거나, 결혼하고도 애가 없을 때 말야. 워킹맘들의 아침은 매일 급해 보였어. 우리 회사는 보통 8시부터~10시까지 자유롭게 출근하는데 워킹맘은 대부분 10시 가까운 시간이 되어서 허겁지겁 출근을 하는거야. 이제 난 알아. 그녀들은 누구보다 일찍 일어났을 것이고 대충이라도 자식을 먹이고, 씻기고, 입혀서, 어린이집이나 또 아이를 맡길 수 있는 곳에 보내는 치열한 아침을 보내고 출근했을거란걸.
예전에는 워킹맘들이 "오늘 아이가 아파서 휴가 낼게요." 또는 어린이집이 방학을 해서, 아이에게 이런 저런 일들이 생겼다며 퇴근하며 "갑자기 죄송해요"라고 말할 때 난 그 말을 100% 신뢰하지 못했던 것 같아. 그녀들이 말하는 죄송한 상황들은 내가 모르는 세계였고, 한편으론 좋게만 보이진 않아서 뒤에서 궁시렁 거리기도 했었어. 난 나중에 아이를 낳아도 최대한 일에 지장주지 말아야지하면서 완전 프로처럼 생각했었는데... "어린이집이 폐업을 해서 다음주에 저 휴가 좀 많이 쓸 것 같아요"라고 오늘 말한 여자가... 나...야... 나. 워킹맘들의 말은 모두 사실이었어. 아이는 어느날 갑자기 열이나고 아팠고. 내가 예측할 수 없는 일들이 생기더라.
아무래도 일 말고 신경 써야 할 부분이 많으니 확실히 일에 대한 몰입도도 떨어지더라고, 정신없이 메모를 휘갈겨 회의에 참석하고, 좀 더 찬찬히 파악하고 스터디도 하면 좋으련만 번갯불 콩 볶듯 시종일관 마음이 급하다. 그렇게 일을 하고도 저녁에 아이를 바라보면 또 미안하단거야. 요즘 "엄마 가치가티(같이)" 라는 말을 정말 많이 하고, 내 손을 잡고 이끄는 딸에게 "엄마, 일~~ 엄마 회사~~"할 때면 정말 중한게 뭔지, 지금 난 일이 먼저인지 매번 같은 질문의 함정에 빠져든다. 어머님댁에 우는 아이를 놓고 매몰차게 나오던 날이나, 아이 몰래 나오려고 살금살금 신발을 신는데 "엄마!!"하고 부르더니 그래도 인사는 하고 가야지란 느낌으로 웃으며 "안녕"하고 손을 흔들어 주는 모습에 현관 문을 닫고 눈물을 훔친 적도 있었어. 얼마나 엄마를 원하고 필요로 하는지 아는데 그 마음을 뒤로하고 일터로 갈 때 비록 내가 정한 길이고, 난 일을 좋아하지만 마음이 슬퍼 로사야. 그냥 너무 미안해.
그럼에도 불구하고 일은 계속 되어야 한다고 마음을 다지고 오늘도 나를 일으켜 세운다. 왜냐면 내가 미래에 아이에게 보여주고 싶은 나의 모습중에 "일하는 엄마'의 모습이 있거든, 일을 한다는 것이 얼마나 생동감 있는 활동인지, 직업을 가진 다는 것이 내 삶에 얼마나 큰 영향을 미치는지, 그 일을 사랑하는 모습은 얼마나 멋진지 꼭 보여주고싶다. 이전에는 여행 다니고, 내가 하고싶은 걸 하기 위한 돈 벌이로 일을 했다면, 이젠 지온이가 좋아하는 샤인머스킷과 딸기를 사주고, 물려 받는 옷 말고 봄이 오면 예쁜 원피스도 한 벌 사주기 위해서 난 돈을 번다고 솔직히 고백해. "언니도 결국 저런 이유로 일을 하게 되었군요." 할지도 모르겠네. 이전처럼 우아한 목적도 나로서의 가치도 뒷전이지만 난 이런 하루살이같은 현실적인 이유도 매우 의미있다고 생각해. 이건 우리 가족의 생존이고 리얼이거든.
좀 더 시간이 지나고 아이가 크면 다시 나와 일의 쫀쫀한 관계와 가치에 대해 생각할 날이 올지도 모르겠어. 하지만 오늘 나의 바램은 내일도 무사히 노트북을 켜고 일할 수 있는 것이다. 무사히 출근해서 일하기 위해선 일단 아이가 건강해야하고, 열+콧물+기침 증상은 없어야하며, 혹시나 만약에같은 사고도 일어나면 안돼. 아이를 봐주시는 어머님의 건강과, 어린이집이 무탈하게 문을 열어 주어야 한다는 이 모든게 함께 가능할 때) 난 매일 평범하게 하던 일을 하는거야. 어찌보면 기적의 하루하루다. 그래서 가끔은 다짐해본다. 내 딸과의 소중한 시간을 물리며 하는 일이니 정말 허투루 하지말자. 그리고 아이가 클 때 일하는 내 모습을 보여주려면 진짜 잘 버텨보자!!
추신) 정말 워킹맘은 대단한 사람들이야. 그걸 아이 낳고 출근하고 알게 되었어. 주변에 워킹맘 있으면 너라도 잘해줘라 정말. 자신의 몸과 시간을 갈아서 일하고 있는걸꺼야...그리고 내일 나와 로사의 일도 안녕-하길!
https://brunch.co.kr/@rosainjeju/7
제주에 살고있는 친구와 (서울여자 제주여자) 편지 프로젝트를 시작했습니다.
같은 동네 10분거리 아파트에 살던 친구가 홀로 제주로 이주했고 그렇게 9년.
결혼을 하고, 아기를 낳고, 여전히 회사에 다니며 워킹맘으로 살고있는 서울여자
홀로 제주로 떠나, 집과 직장을 구했고 지금은 두 마리의 고양이를 키우며 살고있는 제주여자
비슷했으나 또 많이 달라진 두 친구가 서로 편지합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