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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줄라이조던 Jan 04. 2023

뚱보를 털보라고 말하는 여자

나의 특징을 하나 꼽자면 단어를 묘하게 비슷한 다른 단어로 잘못 말하는 것이다. 이 특징은 급할수록 더 심해진다. 예를 들자면 이런 것들이 있었다.


스트라이프(줄무늬)를 스프라이트(사이다)로/ 아포가토를 아보카도로/ 페리에를 페라리로... 말한다. 쓰다 보니 나 영어에 약한가? 아... 영어 말고 야채참치를 야치참채라고 말한 적도 있었구나. 한 번은 팀원들과 모여서 어릴 때 보던 TV프로그램명을 말하다가 '내사랑 컬리수'라는 프로그램을 '내사랑 하리수'라고 잘못 말해서 다들 동심 파괴라며 폭소했던 기억난다. 그래 저 사랑스러운 9살 컬리수에게 내가 너무했구나...


뽀글뽀글 파마가 킬포인 내사랑 컬리수


급할수록 심해진다고 말했던 이 특징은 아마 마음속에선 당장 말하고 싶은데, 내 입에선 그만큼 단어가 빨리 나오지 않는 순간에 생기는 오류 같다. 언제나 마음이 급하다. 이런 나의 특징을 가장 잘 알면서도 제일 얄밉게 놀리는 사람은 남편이다. 남편은 문맥상 이해하고 넘어갈만한 단어도 토씨 하나 놓치지 않는다. "뭐? 뭐라고? 혹시 00 말한 거야?" 푸하하 하면서 통쾌해한다. 속으로 '한 번을 안 넘어가네' 하면서도 왜 이렇게 내 입에선 비슷하지만 틀린 단어가 나오는지 원. 이렇게 찾아서 말하라해도 어려울 것 같다.

그중 최근 에피소드를 하나를 소개해본다. 우리 동네엔 '뚱보 아저씨"라는 맛집이 있다. 뚱보 아저씨네 메뉴는 간단하다. 돈까스와 국수. 개인적으로 가장 좋아하는 동네 맛집이고 크고 바삭한 돈까스 + 매콤하고 시원한 물비빔국수는 나의 최애 메뉴 조합이다. 메뉴를 쓰면서도 파블로스의 개처럼 침이 고인다. 헌데 이 뚱보아저씨네는 맛집답게(?) 문을 잘 열지 않으신다. 운영 시간도 점심시간 3시간 정도 이후엔 브레이크 타임이고 저녁 5시부터 ~ 6시 30분 정도다.  문을 연 날을 놓치면 안 되고 저 시간도 잘 맞춰야 한다. 배달도 안된다. 배고픈 나와 신랑의 관심사는 '오늘 뚱보 아저씨 돈까스 집이 열었을까?'다. 열었다면 우린 망설임 없이 뚱보 돈까스로 의견을 통일한다. 근처를 지난다면 문을 열었는지 궁금해 가게 앞으로 돌아오기도 했다. 그러다 열었으면 홀린 듯 들어가서 혼자 물비빔국수 한 그릇 먹고 오던 여름날도 있었다. 혼밥을 잘 못하는 나인데 말이다. 오픈시간에 맞춰 수시로 전화를 해보기도 한다. "네네 열었어요"라는 답을 받는 순간 마음이 급해진다. 먹어야 한다! 지금 당장 롸잇나우! 언제나 오는 기회가 아니다. 급해진 내 마음은 벌써 저만치 남편에게 달려간다. 난 흥분해서 남편에게 전화를 하거나 퇴근한 남편에게 에디슨이 전구라도 발명 한 듯 육성으로 외친다.


"오늘 털보!! 아저씨네!! 열었대!!!! 갈래?"


남편은 잠시 멈칫 한 뒤 역시나 놓치지 않는다. "털..? 털보? 혹시 뚱보 말하는 거야?" 다 알면서 이렇게 얄밉게 묻는다" 그리고 나에게 '털보'와 '뚱보'는 너무 다르다며 자꾸 네가 털보라고 해서 돈까스에서 털이 나올 것만 같다고 놀려대며 즐거워한다. 아니 돈까스에서 털이 나올 것 같다며 왜 이렇게 즐거워 하는건데? 하긴 듣고 보니 그렇기도 하네 뚱보와 털보는 너무 다르다. 특히 식당 이름으로 생각했을 땐 더 그럴 수 있겠구나. 그렇게 시간이 흐르고 또다시 뚱보 아저씨네가 문을 열었던 어떤 날. 한동안 아저씨의 개인사정으로 가게가 열지 않았던지라 오픈을 기다리던 애탔던 내 마음은 더더더 급해졌다. 남편과 연락이 닿았다. "내가 전화해 봤는데!!! 오늘 열였대!!! 털보 할아버지!!! 오늘 열였대!!!" 다시 또 찰나의 정적. 그리고 남편은 말한다. "이제 털보 아저씨도 아니고 할. 아. 버. 지? 지현아 더 먹기 싫어지는 것 같아..."



남편과 딸이 출근하고 등원한 아침. 재택근무를 시작하려고 앉은 자리에서 남편의 글을 보고 난 빵 터지고 말았다. 휴...내사랑 컬리수를 내사랑 하리수라고 말하고, 뚱보를 털보라고 말하는 나랑 살아서 이 나이에도 그래도 종종 웃는 줄 아셔!

남편의 메모장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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