책 '여행의 이유'를 읽고 떠오른 단상들
"그렇다면 여행기란 본질적으로 무엇일까? 그것은 성공이라는 목적을 향해 집을 떠난 주인공이 이런저런 시련을 겪다가 원래 성취하고자 했던 것과 다른 어떤 것을 얻어서 출발점으로 돌아오는 것이다." p.18-19
서른을 앞두고 도망치듯 혼자서 5주간의 유럽여행을 떠났다. 목적 같은 건 없었다. 그저 언젠가 떠나야지 하며 오래 꿈꿔왔던 바람이 홧김에 성사되었다. 첫 번째 직장을 퇴사한 후 별다른 계획 없이 비행기 왕복 티켓과 예약한 숙소 몇 개, 환전한 유로, 여행 가이드 책 한 권에 의지해서 떠난 여행이었다.
발길 닿는 대로 참 많이도 걸었다. 비가 오는 날도 맑은 날도 신발이 닳아서 해지면 버리고 새로 사신고 또 걸었다. 길치인데 낯선 길 걷기를 좋아하는 나, 혼자 길을 헤매다가 온 하루를 보낸 날도 있었다. 왜 이렇게 비싼 돈을 주고 사서 고생을 하는 건지 어리둥절한 순간도 있었지만 아침잠이 많은 내가 꼬박꼬박 조식을 챙겨 먹을 만큼 매일 설렜던 것 같다.
오늘은 어딜 갈까? 무얼 볼까? 뭘 먹을까? 어떤 즐거움이 있을까? 궁금해하면서, 여행을 떠나올 때 무표정했던 얼굴에도 조금씩 생기가 돌았다. 좌충우돌 소소한 에피소드들도 하나둘 생겼고 잊을 수 없는 아름다운 풍경들도 많이 만났다.
마침내 여행의 막바지에 이르렀을 때, 마지막 여행지였던 파리의 센 강변 어느 다리 위에서 한 남자가 기타를 연주하며 노래를 부르고 있었고, 난 노을이 질 때까지 아름다운 풍경을 바라보면서 의심 없이 행복하다고 생각했다. 그 순간 이 여행에 완벽하게 적응하고 있었고 내일이면 집으로 돌아가야 하지만 여행이 끝나지 않기를 바라고 있었다.
“모든 여행은 고유한 궤적으로 진행되고, 그래서 모든 여행자는 다르다.” p.152
돌아보면 그때의 여행은 있는 그대로의 나를 닮았다. 어딘가에 쫓기지 않고 구름처럼 자유롭게 흐르는 느낌이 좋았고, 공원에 앉아 유유자적 하루를 보내며 호기심 많은 눈으로 사람들을 구경하는 게 좋았다. 목적지로 가는 길이 두 개라면 빠른 길보다 예쁜 길을 더 좋아하는 나는, 비록 자주 헤매더라도 결과보다 과정을 즐기는 게 더 중요한 사람이었다. 그리고 그 과정 중에 낯선 이를 만나도 경계심보다는 궁금함이 앞서는 순진한 구석이 있었다.
먼 곳에서 나와 만나며, 익숙한 곳에서는 게을렀던 감각들이 깨어나 신이 났다. 낯선 도시가 품은 특유의 냄새, 사람들의 분위기와 표정, 옷차림, 이국적인 풍경... 보이고 들리고 만져지는 모든 것들이 흥미로움의 대상이 되었다. 그렇게 감각으로 기억된 여행은 문득문득 그와 닮은 향기나 분위기를 만나면 떠올랐다. 마치 음악이 추억을 소환하는 것처럼.
내게 여행지는 머물렀던 날의 날씨와 향기로 기억되는 데, 여름의 문턱을 넘을 때마다 자주 비를 뿌리던 그날의 파리가 떠올랐다. 그 풍경은 날씨와도 같은 그 모든 우연들의 합으로 나만의 ‘고유한 궤적’을 품고 있어 유일할 것이고 똑같이 재현될 수 없으므로 소중하다.
[여행의 이유]를 읽으며 여행에 대해 추억하고 다시 꿈꿀 수 있어서 행복했다. 그리고 다시 새롭게 추억할 수 있는 긴 여행을 떠나고 싶어졌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