D-464
2025. 1. 19. 일. D-464
<메모들>
10:00
출근길에 산 자와 죽은 자가 주고받은 편지를 더금더금 읽다가, 더이상 울음을 참을 수가 없어서 읽기를 중단했다. 엉엉 울기를 잠시 미뤄두고, 일찍이 책방을 열고 환기를 한다. 잊으려 애쓰다가 잊어버렸다는 걸 잊어버리는 시간. 결국 잃어버림.
11:18
갑작스런 장례식으로 인해 앞도 뒤도 없이 덜컥 화해해 버린 두 사람. 정신을 차리고 보니 서로 '미안해'하고 말하며 껴안고 엉엉 울어버린 뒤였다. 우리는 항상 주고받는 문자의 끝마다 '힘!'하고 매조지하곤 했었지.
"나는 우리가 다시 만나 좋기도 했네. 힘!"
"나도 그랬어. 힘!"
몇 해만에 마주한 우리만의 태연한 비밀 단어, 힘, 이라는 글자 앞에서 눈물이 흐드득 떨어진다. 그녀를 미워하기 위해 나 자신까지 미워해야 했던 나는, 다시, 모든 것을 미워하기 이전의 상태로 돌아오고 말았다. 결국 사랑. 사랑의 힘. 사랑의 힘은 세고 부드럽다.
눈물이 멈추질 않는다. 지금 이 순간 손님이 없어서 다행이다. 아아, 사는 게 그리도 겨운가. 나여.
13:18
누군가 책장을 넘긴다. 나도 책장을 넘긴다.
14:24
손난로가 있어서 따뜻하다. 마치 아기의 손처럼 주머니 속의 온기를 꽈악 쥐고 있는 나. 이 손난로는 재작년에 한 독자 분께서 주신 선물. 아껴 쓰고 있어요. 길게 추울 것이 확실한 날들에만 꺼냈거든요. 덕분에 여기, 2025년까지 따뜻하네요. 아직 몇 개 더 남아 있어요!
16:07
결국 10년 넘게 쓰던 가방과 똑같은 가방을 주문했다. '나의 편안하고 허름한 옛 누더기'를 다시 찾게 된 것이다!
'나는 나의 오래된 가운의 완벽한 주인이었다. 그러나 이제 새 가운의 종이 되었다.' (드니 디드로, <나의 오래된 가운을 버림에 대한 후회> 中)
나는 새 가방의 종이 되지 않으련다! 철학자 드니는 못했던 그것을 소공녀 세라는 합니다!
*디드로 효과: 하나의 물건을 사고 나서 그에 어울릴만한 물건을 계속 구매하며 또 다른 소비로 이어지는 현상.
17:05
연필을 들고 나오지 않아 불편하기 그지없다. 가방이 없는 동안 이것저것 가방 삼아 들고 다니다 보니 많은 것들을 놓치고 다니게 된다. 연필이 없는 게 이리도 불편한 일이었나. 볼펜은 안 되겠다. 연필처럼 자유롭게 지워지지 않으니까. 내가 다니는 장소, 내가 지니고 다니는 사물마다 '연필 기능'이 있었으면 좋겠다. 언제 어디서든 흑심이 콩나무처럼 자라나서 아무데나 그때그때 메모할 수 있는 스마트한! 스마트폰은 시계, 달력, 은행, 심지어 신분증마저 대수롭지 않게 뒤집어 주던데 연필 한 자루가 안 되나?
17:36
커피는 나를 깨어있게 하고, 술은 나를 잠들게 한다. 잠들고 싶은 낮에는 커피를 마시고, 깨어 있고 싶은 밤에는 술을 마신다. 커피는 커피를 부르고, 술은 술을 부른다. 커피와 술을 잘 블렌딩할 수는 없을까. 꽃과 물처럼.
17:42
슬프게도 나에게 컵이나 주전자는 소모품에 가깝다. 자주 손에 갑자기 힘이 빠지기 때문이기도, 부엌이라기엔 너무 좁은 부엌에서 항상 위태롭게 놓여있기 때문이기도 하겠다만. 투명한 것들은 원래 잘 깨지기 때문이라고 말하자. 그리 말하자.
(사실은 어제 유리 주전자를 깨 먹었다. 도대체 몇 번짼지!)
20:46
집에 와서 씻고 정리하고 보니 이 시간. 지금부터 24시까지 일기를 쓸 것이다. 자, 시작!