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매거진 500일

바다가 내 모자에 담아준 것

D-250

by 세라


0.

언젠가 당신은 나에게 동해에 가 봐, 라고 말했었지. 당신이 말한 건 동해의 동해가 아닐지도 모르겠어. 강릉의 동해, 혹은 삼척의 동해일지도 모르지. 하지만 내가 간 곳은 동해의 동해였다. 단 한 번 내 귓가를 스쳐 지나갔던 동해, 라는 발음. 꿈이었을까. 잘못된 기억일까. 어쩌면 모두 내가 지어낸 이야기일지도 몰라. 미안해, 당신이 누구였는지 모르겠어. 도대체 이 기억은 누가 뱉어놓고 간 침전물일까. 당신은 왜 나에게 동해에 가보라고 했을까.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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1.

그날, 단순히 대문을 열고 밖으로 나와 기차에 올라탄 것만은 아니었어. 나는 이전의 인생이 모두 사치였다는 생각으로부터 아주 오랜만에, 기적처럼 밖으로 나왔던 거야.


내겐 그랬다. 떠날 수밖에 없었던 인생이었다. 떠나고 또 떠나도 떠나라고 하데. 내쫓아버리듯이 가라고 하데. 참 너무하더라. 그리도 많은 것으로부터 떠나왔음서도 나는 떠나는 게 힘들었다.


오늘은 떠날 수밖에 없음에서 떠나고 싶음으로 갈 것이다. 그리하여 이미 너무 멀어진, 머나먼 곳으로 떠나버린 나를 다시 한번만 만나고 싶어.



2.

10시 18분. 나는 112번 버스를 타고 모르는 도시의 모르는 거리를 달리고 있다. 멀미가 난다. 자꾸만 직전의 나와 시차가 생긴다. 직전의 나, 직전의 나가, 무한히 생겨난다…… 버스를 타기 전의 나…… 기차를 타기 전의 나…… 그들은 누구인가? 이제 다 모르는 사람들이다.


우리가 여행하는 곳은 몇 월 며칠의 어느 도시가 아니다. 여행지는 언제나 미증유의 시공간이다. 나는 모르는 도시의 모르는 거리를 달리고 있는 모르는 사람이다.



3.

저 멀리 바다에 십억만 개의 별이 반짝이고 있다. 어쩌면 밤하늘은 저기고, 나는 누워서 천장을 바라보고 있는 건지도 모른다. 물경, 고독이 밀려온다. 고독이 반짝인다…… 고독이 부서진다…… 여기서 태양은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가지 않고 우주를 향해 영원히 떠나가는 듯하다. 누워서 보는 태양이 그렇게 말해준다. 오늘이란 지구 반대편으로 넘어갔다가 내일이면 돌아오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는 듯이. 나는 지금 이 순간 저 태양을 향해 영원한 작별 인사를 해야 하는 것이다. 11:05.



4.

한 가족이 나에게 사진을 부탁한다. 혼자 카메라를 메고 다니다 보면 익숙한 일이다.


예, 제가 찍어드릴게요.



5.

현인원 33. 나는 그때 거기에 있었던 33명 중 한 명이었구나. 이렇게 생각하니 우연히 스쳐 지나갔던 모든 사람들이 조금은 더 친밀하게 느껴진다. 그들은 고작 32명 중 일부였던 것이다.



6.

또 한 무리가 나에게 사진을 부탁한다. "아까 그분이네요!" 공교롭게도 아까 그 가족이었다. 사진을 몇 장 찍어드리고 가던 길을 다시 가는데, 등 뒤로 "우리가 전문가를 만났네" 하며 하하호호 웃는 소리가 들려온다.


예, 다음에 만나면 또 찍어드릴게요. 그다음, 그다음에도요. 11:27.



7.

길 위에 비치는 빛과 그늘이 파도에 반짝이는 찰나의 윤슬 같다. , 모래사장 위를 걷고 있는 것만 같어라. 파도는 내가 생각한 것보다 더 깊숙이 이 지상에 스며들어 있었던 건지도 모른다. 생각이 바다 쪽으로 기운다. 대양적인 상상이 나를 즐겁게 한다. 세상 모든 것을 바다로 대신 말할 수 있을 것 같다. 실은 그러기 위해서 여기에 왔다. 그리고 이건 '대신'이 아닐지도 몰라…… 그때,


자전거 지나간다.


"비켜주세요! 감사합니다!"


11:45.



8.

내 앞에서 재재거리던 새들은 비켜주세요, 라고 말하지도 않았는데 포르르 날아가며 길을 열어준다.


감사합니다.



9.

밝은 시간에도 켜져 있는 등불. 혹시 나 같은 사람을 위한 것일까. 환한 햇빛 아래서도 길이 보이지 않는다며 당당 소리치던 세월들…… 나, 이토록 뜨거운 볕 아래서 떠올리기만 해도 몸 떨리는 기억들이 있어. 그래, 빛들아, 나를 도와다오. 내게 길을 알려다오. 시끄럽게 혼잣말을 지껄이며 지나가는 나를 좀, 말려다오. 14:26.



10.


욕심내지 말고.


소중히 여기고 예쁘게 채워가는.


오늘도 행복하시고.


14:45.



11.

문득 에드워드 호퍼가 좋아했던 사다리꼴의 프레임이 떠오른다. 호퍼의 대명사와도 같은 <나이트호크>. 나는 바다를 맨살 맨눈으로 마주하면서도, 또 다른 프레임을 통해서 바다를 바라보고 있다. 수평선과 수직선이 서로를 이어주면서도 서로를 차단하는 기묘한 경계 안에서, 평온했던 풍경에 알 수 없는 긴장이 싹튼다. 그 긴장의 정체를 모르겠다.


집으로 돌아와 사진을 열어 보니 카메라를 든 내가 저기에 있는 것 같다. 아니, '있는 것 같다'니, 실제로 있었지 않았는가?


호퍼는? 혹시 등을 보이고 앉아 있는 저 남자는 호퍼가 아닐까? 모든 것이 다 끝난 다음 자기 자신을 거기에 그려넣은 건 아닐까?


14:56.


에드워드 호퍼, <나이트호크>(밤을 새는 사람들)


12.

마음의 뚜껑에도 저리 돌 하나 올려둬야야겠다.


작은 바람에도 마음이 흔들리는 분들은 이렇게 하세요.


(숲에 다닐 적에는 꽃 한 송이 선물하는 걸 좋아했는데, 바다에 오니 조약돌 하나 선물하고 싶어지네…….)



13.

여름은 이리도 알록달록하구나. 파라솔을 펼치고, 모래성을 만들고, 공을 던지고, 발을 적시고, 파도를 타고, 배를 타고, 맥주를 마시고……. 여름에 흠뻑 빠지면 책 같은 건 생각도 안 나겠다. 하지만 나의 여름은 언제나 독서였는 걸. 책은 나의 가장 안온한 피서지. 책은 내 마음에 휩쓸려 오는 문장의 조가비를 줍게 하였고, 무뎌진 내 마음에 시트러스 향기를 퍼뜨려 주었다. 독서에 흠뻑 빠지면 여름 같은 건 생각도 안 난다.


여름이면 은둔하는 나에게 외출을 요청하지 말아주셔요. 오만한 왕처럼 약속을 거절하는 나를, 나를 부디 이해해 주길 바라요. 누군지 모르는 당신에게, 나는 늘 미안해요…….



14.

드디어 아무 생각이 없어진다. 하루 중 가장 강한 햇빛은 수그러들었다. 어딘가를 향해 계속 걸어가려는 의지도 빛과 함께 녹아내리고 말았다. 한번 녹아버린 것들은 결코 돌이킬 수 없으리라. 이런저런 메모를 끄적이던 것도 모두 옛날 같다. 더 이상 어딜 향해 걸으려는 특별한 의지도 목적도 없다. 이제 9시 29분 탑승 예정인 마지막 기차를 기다리는 일만 남았다. 15:53.



15.

나는 집안에서 홀로 책을 읽으면서 시간을 보내는 것 이상으로, 풍경 앞에서 책 없이 앉아 시간을 보내는 것도 잘할 수 있다는 걸 잊고 잊었다.


시간이 가네, 노상 가네…….



16.

오늘 하루는 나 자신의 '-고 싶음'을 받아들이는 시간이었을지도 모른다. 떠나고 싶음. 보고 싶음. 걷고 싶음. 아무것도 하지 않고 싶음. 이건 사치가 아니라고. 하루쯤은 생각으로부터 외출하자고. 은둔의 물살을 힘겹게 걸어 나왔던 시간. 내 안의 소금 기둥을 녹이는 시간. 문득 혼잣말을 중얼거린다.


뭐였더라.


갑자기 눈물이 난다.



17.

태양에게 작별 인사를 하고, 외로운 시간을 별처럼 세었다. 지칠 때면 모자를 벗고 바람을 쐬었고, 바다는 내 모자에 파도 소리를 담아주었다.


동해는 언제나 내 등 뒤에 남아 있던 풍경이었다. 내가 떠나가는 태양을 향해 서쪽으로 서 있었던 모든 순간에, 동해는 나의 등 뒤에서 백일홍 같은 핑크빛으로 잔잔히 물들었다 사위고 있었다. 내가 당신을 향해 영원한 작별 인사를 하고 있었을 때에도, 내가 천장 같은 고독을 멍하니 바라보고 있었을 때에도, 동해는…….


내가 떠난 뒤에도 동해는 그곳에 있을 것이다. 떠나가는 모든 존재들의 동쪽에서, 잔잔히 물결치고 있을 것이다.



18.

누군가에게 줄 것이 없다며 도망친 건 핑계였을지도 모르겠다. 줄 것이 없어도, 아무것도 없어도, 내게 다가오는 존재는 늘 있었다. 당황해서 도망친 건 언제나 내쪽이었다.


그날 밤, 혹시 당신이었을까.


당신이었니.



19.

당신이 왜 나에게 동해에 가보라고 했는지 아직도 모르겠어. 그래, 모르는 것이 좋겠어. 모른다는 절망, 모른다는 외롬이 나를 자꾸만 떠나고 싶게 할 테니까. 모르는 당신, 계속 거기에 있어줘. 내가 당신을 등 뒤에 두고 떠나더라도…….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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