brunch
매거진 500일

믿지 못하는, 믿고 싶은

[다시, 상담일기] 3회차

by 세라

#혼술


혼술하는 사람들은 술에 취해 무엇을 하나? 어떤 이는 자기만의 시간을 즐기려고 마시고, 어떤 이는 세상을 잊으려고 마신다. 한편 어떤 이는 자기 자신을 잊으려고 마시고, 어떤 이는 세상을 즐기려고 마신다. (그런데 어떤 이는 그 넷 모두를 원한다고…….)


"어쨌든 즐기는 거네요?"

"그럴 수도 있겠네요. 웃고 싶은 즐거움도, 울고 싶은 즐거움도, 따지고 보면 즐기려고……."


회하면서도 자꾸만 마시는 '선택'을 한다는 건, 거기에 뭔가 자신이 원하는 것이 있다는 것이다. 나는 단순히 잠들려고 술을 마시는 사람은 아니다. 오히려 그 반대다. 나는 취한 채로 최대한 오래 깨어 있고 싶어 한다. '취하고 싶음'과 '깨어 있고 싶음', 그 둘을 한꺼번에 원한다. 가질 수 없는 것을 원한다. 울고 싶음을 원한다. 웃고 싶음을 원한다. 네 가지 모두를 원한다. 아마도 그 욕심 많은 이가 바로…….


"나는 우울해지고 싶어 하나요?"

"그런 것도 같고요."




알코올 의존증에 대한 선생님의 소견: 정상.


(보세요, 나 정상이라 죽겠다니까요…….)




#믿음


내가 줄곧 토로해 온 피로는, 구 할 구 푼이 사람에 대한 피로일 것이다. 믿지 못함, 믿을 사람 없음, 그렇고 그런 세상, 뭐 그런 거. 그러나 문제는 내게는 사람을 믿을 마음도 없다는 거, 나는 사람을 믿지 못할 뿐만 아니라 믿음을 주지도 못하는 사람 아닐까. 이제 와서 믿을 만한 사람이 나타난다 해도, 정작 믿음을 주지 못하는 건 내쪽 아닐까.


(그런데 믿음? 믿음이라는 말을 계속 쓰고 있으니 믿음이란 게 뭔지 모르겠어.)


(믿음이라고? 역시 어색해. 내가 그걸 잃어버렸던가? 혹시 태어난 이래로 아직까지 내가 믿음이란 걸 배우지 못했나?)


선생님은 믿음이란 내가 믿기로 해서 믿는 게 아니라, 내가 믿음을 주겠다고 정해야 하는 그런 종류의 것이 아니라, 오랫동안 함께 지내다 보면 믿음은 절로 가는 것이라고 했다. 아 맞다 맞네…… 우리에겐 '믿음이 간다'는 말이 있었지요…… 그래, 그 말을 기억한다. 그렇다면 난 믿음을 잊어버린 거다. 한때는 가지고 있었는데 잃어버린 거다.


"선생님 그래도 저는요, 안 될 것 같아요. 너무 시간이 오래 걸려서요."

"물론 사람에 따라 오래 걸릴 수도 있죠."

"네, 남은 시간 동안에는 힘들 것 같아요."

"그런데 남은 시간이란 건 뭐죠?"

"살아있는 시간이요."




#부적응


나는 여러 사람들 앞에서 말하는 걸 어려워한다. 어떤 사건의 당사자가 되어 발언해야 할 때, 심장이 쿵쾅거리는 소리가 장기 밖으로 튀어나와 흘러내릴 것만 같다. 당연히 눈도 잘 마주치지 못하고, 손을 가만히 두지도 못한다. (여기서 한 단계만 더 가면 공황 장애가 아닐까 하고 생각한다.) 면접, 회의, 회식 등 기본적인 사회생활도 마찬가지다. 아무리 반복해도 적응이 안 된다. 아니, 사실을 말하자면 훨씬 더 심각하다. 나는 뭘 해도 어색한 사람이다. 심지어 사람들 사이로 들어가 "안녕하세요!"하고 인사를 하는 것도 어렵고 어색하다. 내가 그들에게 "안녕하세요!"라고 천연덕스럽게 인사를 건네는 데까지 얼마나 큰 용기와 결단이 필요했는지 사람들은 모를 것이다. 이 모든 코믹한 상황이 진짜 고민인 사람도 있다는 거, 정상적인 사람들은 알 수가 없을 것이다.


태어난 이래로 아직까지 '함께 있음'에 적응하지 못했다. 어쩌면 태어남 자체에 대해서 아직까지 적응하지 못한 건지도 모른다. 미국 작가 도로시 파커는 묘비명에 이렇게 적었다고 했던가. "먼지를 일으켜 죄송합니다." 나는 마지막 순간까지 이렇게 말하고 있을지도 모른다. "아직 적응 중이에요."




세상에는 '함께 있음'을 견디지 못하는 만큼이나

'혼자 있음'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들도 있다고 한다.


혼자 있음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다가간다.

함께 있음을 견디지 못하는 사람이 도망친다.


서로가 서로를 견디지 못하네.




#믿고 싶음


나는 친절한 사람이다. 나는 쉽게 속는 사람이다. 나는 잘 흔들리는 사람이다. 선생님은 사람과 세상에 대해 믿음을 잃었을 때라도 이성적으로 상황을 분별하고, 맺고 끊음의 결단을 내리며, 무엇보다 자기 자신을 지탱할 수 있는 근원적인 힘은, (안타깝게도) 어린 시절 부모와의 유대 관계에서 길러지는 거라고 결론 지으셨다. 그리고 세상에는 가질 수 없는 것이 있고, 선생님 자신도 그것을 갖지 못했다고. (그렇지만 선생님은 스스로 선택한 가족과 함께 삶을 꾸려나가고 있고, '너네 부럽다'고 실컷 투정도 부리면서 산다고 하셨다.)


나는 나를 의지하고 나를 지탱하며 살아간다. 서로가 서로를 견디지 못한다. 아마도 너무 연약해서…… 어쩌면 믿는다는 건 의지하고 지탱한다는 뜻일까?


실연과 실업과 사기를 당하며 악착하게 살아왔지만, 그 시끄러운 전생을 다 기억하고도 또다시 세상에 나가면 사기를 당할 사람은 여러 사람 중에 결국 나 같았다. 왜냐하면 나는 여전히 친절하고, 쉽게 속고, 잘 흔들리니까. 그게 나였다. 세상이 아니라, 나 때문이었다. 그러니까 이 모든 건, '믿지 못하는 마음'이 아니라, '믿고 싶은 마음' 때문이라는 걸, 나는 깨달았다. 내게 믿고 싶은 마음이 없었다면, 속지도 흔들리지도 않았을 것이다. 속고 흔들렸더라도, 그토록 크게 실망하지 않았을 것이다. 나는 믿고 싶었던 것이다. 믿음이 필요했던 것이다.




시간이 거의 끝나갈 때쯤, 선생님은 상담 서류를 모두 덮어두고 한층 부드러운 얼굴로 말씀하셨다.

"그냥 지금까지 제가 봐 온 느낌대로만 말하면요."


"세라 씨는 여리고, 착하고, 순한 사람 같아요."


"세라 씨는 여장부 같은 사람이 아니에요. 그냥 코스모스 같아요."


"복잡한 도시에서 하루하루 싸우고 부딪치는 게 아니라, 한적한 곳에서 조용히 살아가는 게 잘 어울리는 사람이에요. 대신 '혼자'가 아니라 '같이'요! 제 욕심이지만 무던하고 듬직한 사람을 만난다면, 안정적인 관계를 지속하며 누구보다 행복하게 잘 살 것 같아요."


전에도 그랬지만, 선생님의 결론이 좋은 반려자를 만나는 쪽으로 기우는 것은 일부 세대 차이라는 생각을 완전히 다 지우지는 못했다. (나는 고독사의 불안을 떠안더라도 독신이 좋다고 생각하니까.) 그렇지만 한평생 전투적으로 살아온 내가, 그에 걸맞은 사람이 아니었다는 건 알겠다.


코스모스 같은 마음으로는 전투적인 삶을 살아내기가 힘들었을 거…….




찬바람이 불었다. 가방에서 목도리를 꺼냈다. 조금 울었다. 코스모스라는 표현이 예뻐서.




어떤 일을 당했을 때 자동적인 반응으로 누군가를 열렬히 미워하게 되는데, 이제는 그런 미움의 열기도 금세 식는다. 지칠 줄을 모르고 미워하는 힘, 밤낮으로 악착같이 읽어대던 책, 그런 것들이 희망처럼 나를 살아가게 했던 시절이 있었는데…… 피곤하구나,


이젠 미움이 피로를 이기지 못하는 것을 본다.


피로를 못 이겨 미움도 내려놓는다.


오늘밤 문득 이 시가 생각난다.




keyword
매거진의 이전글중간을 잃었다