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by 발태모의 포랍도 Oct 06. 2020

죄의식과 수치심

[탐구: 도덕 감정] 어느 정치인의 죽음에 부쳐

죄의식과 수치심은 우리 행동을 규제하고 구속하는 중요한 도덕 감정이다. 우리는 종종 ‘수치심’(shame)을 남의 시선을 의식하는 부끄러운 마음 정도로 이해하고, 그와 대비되는 ‘죄의식’(guilt)을 ‘수치심’보다 더 깊은 내면에서 작동하는 억제력으로 간주하곤 한다. 20세기 중반에 일본 사회를 ‘수치심의 문화’로 규정하여 서양의 ‘죄의식 문화’와 대비시켰던 <국화와 칼>의 저자 루쓰 베네딕트도 (본인의 의도와는 별도로) 이와 같은 분석 틀을 조장하는데 큰 역할을 했다.

 

도덕 감정을 깊이 탐구하다 보면 이러한 단순 구분이 과연 타당한 것인가 묻게 된다. 나에게 큰 통찰을 준 사람은 정신분석학자 아담 필립스다. 그는 죄의식과 수치심의 차이를 전혀 다른 방법으로 설명한다.


그에 따르면 죄의식은 규범과 자아 사이의 대립에서 비롯된다. 죄의식을 느낀다는 것은 이미 스스로가 어떤 규범에 저항했다는 것을 전제로 한다. 우리가 마땅히 따르고 또 구현해야 한다고 믿는 규범을 ‘내심’ 원치 않을 때, 그래서 그것을 어겼을 때, 그 후에 뒤따라오는 감정이 바로 죄의식인 것이다.

 

반면, 수치심은 자신이 만들어 놓은 이상적인 자아상과 실제 자아 사이의 불일치 때문에 발생한다. 수치심의 핵심은 규범과 관습을 어겼다는 사실이 아니다. 중요한 것은 수치심을 느끼는 사람이 스스로가 이상적이라고 생각하는 본인의 모습을 자신에게, 또 타인에게 선 보이는 데 실패했다는 것이다. 실패한 자아가 맞닥뜨리는 감정, 그것이 바로 수치심이다.


잘못했다고 말은 하는데 좀처럼 부끄러운 줄 모르는 것 같은 사람, 누구보다 도덕적인 줄 알았는데 안 보이는 곳에서 추행을 일삼는 사람, 우리는 그런 사람들을 종종 본다. 전자는 자기 죄를 아는 뻔뻔한 소인배, 후자는 스스로 부끄러움을 아는 교활한 위선자라고 할까?


당신이 친구와 말다툼을 하다가 폭행을 가했다고 가정해보자. 당신은 사람을 때리면 안 된다는 규범을 깨뜨렸다. 그 까닭에 죄의식, 즉 잘못했다는 생각과 느낌이 들 수 있다. 혹은 엄연히 배우자가 있는 상황에서 당신이 친구의 배우자와 바람이 났다고 해보자. 이번에는 당신이 부부간의 약속을 지켜야 한다는 규범, 친구 간의 신의를 저버려서는 안 된다는 규범을 깨뜨렸다. 그랬으니 역시 죄의식에 시달릴 수 있다.


죄의식은 규범에 기인하고, 규범은 외부의 강제력에 토대를 두고 있으니, 죄의식이 생기는 까닭은 우선적으로 처벌에 대한 두려움 때문이다. 그렇지만, 자책하고 두려워하는 자아와 규범 사이에는 뚜렷한 거리가 있다. 그래서 당신은 규범에 저항한 사실 때문에 죄의식을 느끼면서도, 동시에 그 규범 자체를 의심하기도 한다. “내가 큰 잘못을 했네. 그런데, 그런 상황이라면 누구나 한대 치고 싶을 걸?” 혹은, “배우자와 친구한테 진짜 미안하네. 걸리면 어떻게 하지? 그런데 바람 한 번 핀 것이 뭐 그렇게까지 잘못인가?” 이런 식으로 말이다.


스스로가 행한 비행과 악행이 야기할 결과가 두렵기는 해도, 자아는 무너지지 않고 굳건한 상태, 이와 같은 마음 상태를 우리는 ‘죄의식은 있되 수치심은 없는 상태’라고 이해할 수 있겠다.

 

이와는 달리, 수치심은 자아가 산산이 부서지는 경험을 동반한다. 부끄러운 마음은 더 깊은 내면을 파고들고, 자아를 괴롭힌다. 부끄러운 줄 안다는 것은, 부끄러워할 상황이 도래했을 때 몸 둘 바를 모르게 된다는 것이다. 몸 둘 바를 모르는 상황이 극심해지면, 그 몸을 저버릴지도 모를 일이다. 그런 사례들을 우린 때로 목격한다.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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